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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십자가 (롬 08: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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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물론 믿음을 통하여 물질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건강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구원을 가장 간단하고도 정확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그것은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 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고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천당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죽어서 가는 천당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죽어서만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문제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형통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면 세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도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구원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도 가난하게 살 수 있습니다. 병들어 약한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형통하지 못하여 어려운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상적인 문제들이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천국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부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아멘.

우리의 생명은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세상을 얻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얻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행함은 세상을 잃은 때문이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의 불행함이 세상을 잃은 때문이라고 속이지만 아닙니다 우리의 불행함은 세상을 잃은 때문이 아니요 하늘을 잃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소중한 하늘을 잃고 사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이 죄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잃은 까닭은 죄 때문입니다. 가난 때문에 하늘을 잃지는 않습니다. 가난하다고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못하고 장애가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장애가 있다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잃은 까닭은 가난 때문도 아니요 건강 때문도 아니요 세상적인 여건과 환경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어도 인간은 행복해지지 않는 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불행한 삶을 사는 부자들을 얼마든지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 즉 구원 받은 삶을 살지 못하는 까닭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행복 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는 우리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상대방이 용서해 줄 때에만 끝이 납니다. 상대방이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은 잘 한 일이었으나 아버지가 용서하지 아니하고 받아 주지 않았었더라면 그 뉘우치고 돌아감이 허사였을 것입니다. 뉘우치고 돌아갔는데 왜 용서해 주지 않느냐고 따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탕자의 회복은 탕자에게 없었습니다. 탕자의 회복의 능력은 아버지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을 칼빈은 전적인 무능력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인간은 구원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력 한 존재입니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그를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 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방법을 선택하신 것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죄의 문제는 용서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용서는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돈을 받고도 용서를 해주지만 그것은 진정한 용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용서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형제의 죄를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끝까지 용서해 주 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능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도 꼭 한가지 경우 그와 같은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고 하여도 그것은 불가능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의 죄를 그렇게까지라도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랑하는가가 어디까지 용서하는가 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용서할 수 있고 조금 사랑하면 조금 용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 해 주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방법이 십자가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보다 더 큰사랑은 없는 가장 큰사랑입니다. 그 십자가의 큰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없습니다. 워낙 십자가의 사랑이 크고 놀랍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용서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사형을 당하여야 하리만큼 흉악한 강도 였지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와 같은 흉악한 죄를 사하여 주시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몇 해 전에 있었던 지존파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존파는 참으로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같은 흉악한 강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모두 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교회 집사님 한 분이 편지를 통하여 저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형을 받기 전에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그 지존파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을 때 한 마디도 상소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사탄이 예수님에게 그와 같은 상소를 하였다면 예수님은 사탄에게 그 지존파들의 죄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저울에 달아보자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감당 못 할 죄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것은 일본의 삼포능자 라고 하는 여류 소설가의 '양치는 언덕'이라는 소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소설에는 나오미라고 하는 목사 딸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료오이찌라고 하는 남자에게 반해 부모를 버리고 도망합니다. 그러나 그 료오이찌라고 하는 사람은 술꾼이요 바람둥이이었기 때문에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얼마후 친정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그때 료오이찌라고 하는 사람이 폐병에 걸려 나오미에게로 옵니다. 나오미는 그 사람을 받아 들이기가 싫었지만 목사인 아버지가 그를 받아들입니다. 처가 집에서 요양생활을 하는 동안 료오이찌는 처가집 식구들의 믿음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요양 생활을 하면서 료오이찌는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아무도 보지 못하게 힌 천으로 그림을 덮어놓곤 합니다. 그리고 부인에게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선물로 그림을 완성하여 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고 그림도 다 완성되었을 때 전에 사귀던 좋지 못한 여자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할 수 없어서 나가 만납니다. 술을 권하지만 마시지 않습니다. 하루 밤 자고가라고 유혹하지만 그 유혹 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몰래 술에 수면제를 탑니다. 그리고 이 한잔만 마시면 보내주겠 다고 속입니다. 술에 수면제가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술을 받아 마신 료오이찌는 그곳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길을 나섰다가 길에서 잠이 들어 그만 동사하고 맙니다.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료오이찌를 장사하고 그가 다락방에서 그렸던 그림의 천을 벗기는 것입니 다. 힌 천을 벗기자 거기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발아래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채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등위에 예수님의 피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료오이찌 자신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받았던 감동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마음으로 두가지 소리를 외쳤는데 그것은 '료오이찌는 구원받았다'라는 말과 '주의 보혈을 능력 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료오이찌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와 같은 마음과 믿음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면 그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든 지간에 상관없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료오이찌의 구원을 통 하여 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능력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게 된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몇 해전 박찬호 선수가 메이져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며 승리 투수의 수를 높이고 있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5승째를 올렸을 때라 고 기억이됩니다. 저는 그 게임을 녹화된 테이프를 통하여 보고 있었습니다.

녹화 테이프는 끝난 게임을 다시 처음부터 볼 수 있게 합니다. 과거의 시간을 현재 상태에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1회초에 그는 19개의 공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컨디션 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이었습니다. 게임을 중계하는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걱정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태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게임을 결국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회 때는 홈런도 맞았습니다. 만루 위기에 몰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걱정이 많았지만 저는 태평히 얻습니다. 왜냐하면 그 게임은 이미 이긴 게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테이프를 보면서 나의 인생이 마치 저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저는 구원 얻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긴 게임을 경기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살다 보면 홈런을 맞을 때도 있고 만루의 위기에 몰릴 때도 있습니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아 한 회에 19개 의 공을 던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이 이미 이긴 게임이라면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구원 얻은 사람도 홈런을 맞을 수 있습니다. 만루에 몰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승리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세상엔 이긴 게임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다 이긴 게임을 포기함으로 패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 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9회말을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그것들을 인내해 나가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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