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 III-사랑의 영원성 (고전 13:8-13)

첨부 1


우리는 사랑이 주는 감격과 기쁨, 그 축복스러움을 늘 연상하며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세계 어느 종족, 어느 문화에도 사랑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영국 사람들은 영국 지명과 전혀 상관없는 제노아의 '로미오와 쥴리엣'을 자기 민족의 깊은 러브 스토리로 어릴 때부터 듣고 꿈꾸며 삽니다. 또 소련 사람들은 '백조의 호수'나 '지젤'의 이야기를 통해서 러브 스토리의 아름다움을 연상하면서 삽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춘향전'을 먹고사는 민족입니다. 몇 년만에 한번씩은 춘향전이 다시 리바이벌 되어서 계속 화제를 몰고 다닙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사랑 속에서 양육됩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으로 인생의 걸음마를 시작합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우정이라는 사랑으로 풍요롭게 자랍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서 사랑의 반려를 만나기 위한 진통을 겪은 다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사랑을 날마다 익혀가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부족은 인생 전체의 부족입니다. 사랑이 부족할 때 그 부족을 메꾸기 위해서 다른 것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만족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성격장애가 되거나 인생 자체가 완전히 딴 걸음을 걷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은 이처럼 고귀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꿈꾸며 살고, 사랑하면서 살다가 영광스러운 사랑의 완성을 향해서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요한 계시록 21장 보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져 내려오는데 그 새 땅은 마치 신부가 자신을 위하여 단장한 아름다움으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클라이맥스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랑을 연습하고 삽니다. 사랑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생애의 마지막에 인생을 살면서 가졌던 사랑의 목마름, 한계, 누추함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사랑의 대상인 그리스도를 만나서 영원한 사랑을 펼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결론입니다. 그 영원의 땅에 만약 사랑이 없다면 그 영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람이 죽지도 못하는 천국, 얼마나 지루할까?'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날마다 만나도 가슴 설레이는 첫 사랑의 향연이다.' 첫사랑 안 해봤으면 무슨 소리인줄 모릅니다. 사랑하고 있으면 심심한 것이 없어집니다. 뱀은 하루 종일 또아리를 틀고 있어도 권태를 모릅니다. 소는 하루종일 반추하고 있어도 지루함을 모릅니다. 권태라는 것은 타락한 사랑 없는 인생이 갖는 증세입니다. 여러분, 만약 영원을 두고 그 영원 속에 사랑이 없다면 인생은 정말 지루할 것입니다. 답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있는 한, 그 가슴 속에 사랑이 불타고 있는 한, 우리는 날마다 신기해할 것이고, 날마다 감격할 것이고, 시간마다 순간마다 기뻐할 것이고, 마르지 않는 감격으로 영원을 살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클라이맥스를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 인생이 이 가치를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언제입니까? 사랑하고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래서 새 힘을 얻습니다.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감격을 가지고 일어납니다.

사랑은 자기 충족 속에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으면 만족스러워집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다 채워집니다. 더 이상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만났던 구약의 사람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아쉬울 것 없어라.'라고 말합니다. 이북 성경은 그렇게 번역했어요. '아쉬울 것 없어라.' 자기 속에 충족해집니다. 더 이상 아무 것이 없어도 부족을 모릅니다. 사랑이 채워버린 그 공간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풍요와 빈곤이 결정되고,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그 사랑의 밀도가 온전한가에 따라서 인생의 상급이 결정될 것입니다. 사랑, 그 속에 '영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에게 영생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영생을 누릴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사랑할 때입니다. '순간만 사랑합시다.' 이렇게 말하는 말을 저는 아직 못들어 봤습니다. 사랑할 때, 영생을 붙잡고 있습니다. '영원히 사랑합시다.' 그런데 이 귀한 사랑의 영광스러움과 보배스러움과 그 완전하고 충족함을 모르는 이유를 오늘 성경은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고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그 다음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 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밖에 모르기 때문에 사랑의 영광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제가 부분적으로 편견을 참 많이 가지고 인생을 삽니다. 이 사람 말 들어보면 이 사람 말이 옳아요. 저 사람 말을 들어보면 저 사람이 몹쓸 사람이예요. 부분적으로 들어보면 그렇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생애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적인 지식이 사랑의 영광스러움을 모르게 만듭니다.

저는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예수님 영접했고, 대학생 선교하는 것이 제 생애 사명이라고 늘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북경 들렸을 때 제게 큰 선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북경 대학 졸업하고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 받고 동경의 유명한 연구소에서 있다가 북경 대학과 사범대학에서 교수 청빙을 받아서 사범대학으로 온 한 젊은 청년을 만난 것입니다. 11년 전에 만나서 성경을 가르쳤던 제자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두 학교에서 청빙을 받고 고민을 많이 했대요. 제가 그 친구 유학 떠나는 날, '너 편하다고 미국, 일본 가서 눌러 붙어 있지 말아라. 잘 훈련된 사람들, 준비 잘된 사람들이 미국 가서 그냥 그냥 밥 먹고 좋은 차 타는 것으로 인생 끝나더라. 한번 밖에 못사는 인생, 너 편한 데 좇아 다니지 말고 가치있는 데를 좇아가라.'라고 충고했었습니다. 동경에서 받는 월급의 1/30 밖에 안되는 중국의 대학교수입니다. 그런데 그는 오기로 결정했는데, 오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 두 직장 중에 어디를 가야 됩니까?' 북경 대학 가면 모교이니까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고 스승도 있고 또 가르칠 학생들이 모두 후배들이니까 다른 설명이 필요없이 쉽게 적응할 수 있겠는데, 사범대학은 출신학교가 아니니까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 같더래요. 그렇지만 기도하니까 '네가 좋은 믿은 선생들을 많이 키워라. 그러면 자라나는 수많은 중국의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가르쳐줄 수 있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낼 거다.'는 이 메시지를 마음 속에 담고 사범대학으로 결정했답니다.

그리고 지난 3개월 동안 대학생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사랑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부부가 와서 하는데, 제가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서 기뻐했습니다. 참 보람되었습니다. 11년 전 가서 가르쳤던 학생들 대부분이 지금 신학교에 갔는데, 이 친구만 그냥 자기 전공으로 가서 모든 학위 끝나고 다시 교수로 돌아왔는데 신학교 간 사람하고 똑같은 마음의 소명을 가지고 돌아와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도하고 양육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이 얼마나 뜨거워졌는지 모릅니다. 이 맛에 참 전도자의 보람이 있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또 내일부터 시카고의 휘튼 대학에서 미국 유학생수련회가 있습니다. 캐나다의 토론토, 밴쿠버, 중국, 일본, 밀라노, 모스크바, 브라질 등 계속해서 여름방학, 겨울방학 동안에 수련회가 계속되는데 제가 15년 째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15년 동안에 무수한 대학교수들, 좋은 전문직을 가진 연구원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정말 투자에 비해서 이익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학생단체 쫓겨나서 교회 목회를 시작하면서 '내가 효율로 봐서는 가장 좋은 것 붙잡았지만 그러나 못본 것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암만 말해도 이해 못하는 어린 아이부터 시작해서 귀가 안들리고 나이가 들어서 시력이 잘 보이지 않아 가르치는 것이 효과가 없는 어르신들까지 있는 교회, 아니 요즘은 정신 지체나 정서 장애아들까지도 보살펴야 되는 일을 하면서 제가 목회를 너무 부분적으로 알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3년 째 밀알학교에서 정서 장애아들을 봅니다. 아이들 이름을 제가 꽤 많이 압니다. 그래서 같이 악수하고 껴안고 인사합니다. 어떤 학생이 곽장로님에게 그러더래요. 저를 가리키면서 '나 저 사람 알아.' '어떻게 아니?'하고 물으니까 '여기 사장인데, 내 친구야.' 그러더래요. 졸지에 제가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해줘도 사랑받는 것을 잘 못 느끼고 은혜를 입어도 은혜 입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 아이들을 보면서 예수 믿기 전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내 모습과 닮아있는 것을 깨닫고 그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더 크게 누리고 느끼는 지 모릅니다. 효율로 봐서는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효율은 적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현장을 본다는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아무런 대가 없이 쏟아야되는 그 현장을 통해 받는 은혜가 참 큽니다. 그 은혜를 아셨던 손양원 목사님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의 큰 교회로, 부산의 유명한 교회로 모셔 가려고 할 때, 그 분은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내 형제들, 나를 참으로 필요로 하는 그 형제들에게 안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뿌리치시고 여수 애양원 나병 환자들에게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평생을 사시다가 6.25 때 순교의 제물로 드려지셨습니다. 부분적으로 보면 효율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효율 보다 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로 그 사랑의 영광을 모르는 이유를 우리가 유치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니까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어린아이는 자라지 못했습니다. 'Childish'하다고 영어 성경은 번역했어요. 유치하다는 말입니다. 내 속에 자라지 못한 것이 사고를 바로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어렸을 때 학교 처음 입학해서 선생님들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아이에게 정답입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어린 그 시절에 그것은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크면 달라지지 않습니까?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6.25 맞이해서 전라남도 목포의 유달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 학교 운동장이 얼마나 크던지, 아무리 달려도 끝까지 달리기 힘든 운동장이었습니다. 또 다른 학교에는 없는 강당 하나가 큰 것이 있었습니다. 일본 학생들을 위해서 세운 학교였기 때문에 그 학교만 다른 학교에 없는 강당이 있었는데 그 강당이 얼마나 크던지 비가 오면 그 강당에서 축구 선수들을 연습시켰습니다. 30년만에 제가 그 지역에 집회를 갔다가 그 학교가 불연 듯 보고 싶어서 처음으로 한번 찾아갔습니다. 그 학교 운동장이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처럼은 안커도 그래도 상당히 크겠거니 했는데 동네 마당이더라구요. 내 머리 속에 장충체육관 보다는 조금 작겠지만 꽤 크다고 생각했던 강당이 그냥 교실 몇 개 터놓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어렸을 때 그렇게 크게 보였는데요. 마찬가지로 인생의 어린 눈에는 돈이 가장 크게 보입니다. 인생의 어린 눈에 명예가 가장 크게 보입니다. 인생의 어린 눈에는 권력이 가장 크게 보입니다. 유치한 인생의 눈에 명성이 가장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보면 사랑의 엄청나고 영광스러운 가치 앞에 놀랍니다.

여러분, 그런가하면 세 번째로 우리가 사랑의 영광스러움을 모르는 이유를 우리 시력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2절 보니까 '이제는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제가 눈이 참 좋았습니다. 한쪽은 2.0이고 한쪽은 1.5였습니다. 그래서 늘 보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마음속에 어느 날부터 불평이 생겼습니다. 다른 것은 다 발전하는데 활자기술은 왜 이렇게 발전하지 않는가? 날이 갈수록 글자가 삐뚤게 인쇄가 되어요. 또 언젠가는 글씨가 희미하게 인쇄가 되어졌어요. 그래서 왜 인쇄를 이렇게 하나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느 교회에서 설교하는데 성경본문을 자꾸 틀리게 읽으니까 옆에 있는 목사님이 얼른 돋보기를 씌워주어요. 와! 그렇게 잘 보이는 것을... 내 시력 나쁜 줄 모르고 활자만 잘못되었다고 탓했어요. 그런데 그런 비슷한 일이 고대 로마 시대에 있었습니다. 청동기 이후에 사람들이 청동기 가운데 가장 많이 가깝게 쓰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청동거울입니다. 청동을 잘 연마하고 닦아놓으면 사물이 비췹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것도 형태와 윤곽만 보일 뿐이지 온전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윤곽만 보이는 이 청동기 거울을 보면서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잘 보이는 거울은 없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보는 것이 청동기 거울에 비췬 것처럼 인생의 실체를 다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의 영광스러움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성공이 최고인줄 알고 많이 쌓아놓은 것이 전부인줄 알고 사람들이 속고 삽니다. 그러면서 얼굴과 얼굴을 보는 그 날, 우리들은 그 사랑의 영광스러움에 놀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 생활하는 사람은 세 가지는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믿음, 우리가 가야될 주께서 완성하신 천국의 빛나는 소망입니다. 또 우리 주님을 만나는 그 영광의 날에 내 누추한 것이 누추한 것을 벗어버리고, 부분적인 것이 부분적인 것을 벗어버리고, 유치한 것이 유치한 것을 벗어버리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시력이 완전하게 얼굴을 마주보는 것처럼 주의 얼굴을 보는 소망의 그 날, 우리들은 그 소망 보다 더 소중한,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랑의 본체이신 우리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갈 것이 사랑 밖에 없는 그 날을 만난다고 말씀합니다. 그 분이 사랑이십니다. 그 분이 내 생애를 향해서 부어주신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내게 요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 인생, 얼마나 그 사랑으로 채워졌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네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면서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네 주변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섬김으로 입증한 증거를 가지고 내 앞에 나오라'고 주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만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 앞에 빛납니다. 그 외의 것은 하나님 앞에 쓰레기입니다. 그 사랑만은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이 세상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고 영원의 세계로 떠났습니다. 그 나그네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가로막는 그 요단강가에 섰습니다. 그 때입니다. 천사가 지키고 있다가

'당신은 이 강물을 마시고 영원의 세계 들어가길 원하는가?' 물었습니다.
'마시면 어떻게 되는가?'
'당신이 살았던 모든 삶의 추억은 당신 생각 속에서 지워집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얼른 마시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경고합니다.
'마시면 모든 것이 다 지워지는데 당신이 말하는 그 실패의 기록 뿐 아니라 당신이 성공했고 아름다웠던 순간들도 지워집니다'
그러니까 그 분이 말하기를
'내가 가난해서 몹시 배가 고팠거든요. 그래서 내 슬픈 기억을 다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빵 한 조각 먹었을 때의 기쁨과 감동도 지워집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다 잊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당한 비참함, 그 수모와 사람들에게 당한 배신감을 잊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신뢰했던 사람들로부터 얻었던 기쁨의 추억도 다 잊게 됩니다.'
'세상에서 흘렸던 눈물도 모두 잊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기쁨의 추억들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 나그네가 말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받은 상처, 그 고통, 그 비참한 것들을 생각하기조차 싫습니다.'
천사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생애, 모든 것이 다 지워지는데 그 중에 당신이 사랑했던 기억도 지워집니다.'
이 나그네는 한참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렇다면 나는 마시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지고 가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가지고 가는 것, 나 자신을 가지고 갑니다. 이것은 분명하지요? 두 번째로 가져가는 것 있습니다. 전도했던 그 영혼 가지고 갑니다. 가지고 가는지 같이 가는지, 하여튼 갑니다. 그 외의 것은 다 없어져요. 그리고 또 가는 것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했던 추억들을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그 추억들은 천국에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과 무수한 사랑의 언어를 이야기할 때, 이 땅에서 사랑했던 그 사랑의 경험과 추억들이 영원을 두고 솟아나는 샘이 되어 아름다운 감격을 계속 누릴 것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니...' 신앙의 아름다운 모든 행태가 다 사라진 그 때도 사랑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가치가 다 사라지는 그 순간, 우리의 소망이 다 이루어져서 이제 나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말할 그 때에도 사랑만은 우뚝 솟아서 영원한 가치로, 영원한 보석으로 내 생애를 찬란하게 비춰줄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것 손해나도 사랑 손해나지 마십시오. 다른 것 다 놓쳐도 사랑할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 사랑하고, 주께서 사랑하는 저들을 사랑하는 일, 사랑하는 방법도 간단할 수 있습니다. 700-0220을 누르면 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북에 있는 아이들이 20일을 여러분의 사랑을 먹고 자랄 것입니다. 가족간에도 서로 깊이 사랑하십시오. 사랑한 것만 남습니다. 사랑한 것만 영원히 우리의 추억에 남아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