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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위와 은혜 (갈 0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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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에 다니시던 한 분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이런 이야기 를 합니다. IMF로 구조조정을 시작 해서 사람들을 감축시키고 명예퇴직 시킬 때 부하직원 한 사람, 한 사람 잘라내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요. 전심전력으로 헌신하고 봉사하 던 회사에서 쫓겨났다는 울분으로 그 인생을 어떻게 할 줄 모르는 것 을 볼 때마다 너무나 안타까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 분들이 부럽다고 합니다. 회사가 앞 으로 어떻게 될지, 퇴직금이나 받고 물러날지를 걱정하는 대우 식구들을 볼 때 또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 리 눈으로는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모르겠어요. 구조조정할 때는 남은 사람들이
'나는 살았다!'고 했어요. 쫓겨난 사람들은 울면서 나갔습니 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나 간 사람이 부러운 자리에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축복이고 더 불행인지 를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런가하면 우리 인생의 선택에 있어서도 한 번 상상해보십시다. 내가 지금 내 남편 과 아내와 결혼하지 않고 내가 생각 하는 그 사람하고 결혼했다면 내 인 생이 어떻게 펼쳐졌을 것 같습니까? 제가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지금이 최선입니다. 딴 맘 먹지 마십시오. 정말 우리 생애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확실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을 성 경 본문 통해서 보여주기를 원합니 다. 두 선택의 내용이 있습니다. 하 나는 율법으로입니다. 하나는 하나 님의 은혜를 믿음으로입니다. 여기 첫 번째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 니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 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 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여러분, 인생 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는 '내가 정 말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입니다. 다른 말로 고친다면 '내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 을까?'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를 가지려고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 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 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지킴으로, 선 행을 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 다. 이것이 이 지상 모든 종교의 과 제입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선행함 으로, 좋은 계율을 지킴으로 하나님 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런 사람을 향해서 성 경은 말합니다.
'무릇 율법의 행위 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 니...'
율법으로 애쓰고 수고하고 노 력하는 그 사람이 저주 아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바 누구 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 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아무도 온전하게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십계명 을 압니다.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 우리가 반드시 지켜 야될 10개의 계명을 하나님께서 주 셨습니다.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 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 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웃 을 해하거나 탐내지 말라.'
무수한 계명 가운데 '나는 이 계명에 대해 서 완전히 지켰다'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 은
'네가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다. 말하기를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 는 저주 아래 있는 자다.'

'아니, 내가 그 때는 그래도 잘 지키고 살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그 때 잘 지키고 그 때 잘 살았느냐고 말하지 않고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만 잘 했느냐가 아니라 항상 잘 했냐고 묻고 있습니다. 모든 순간, 모든 시 간에 하나님의 율법에 충만한 순종 자냐고 묻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그래도 그 일만은 끝내주게 했지 않아요? 물론 이 율 법을 보니까 내가 잘못한 것도 사실 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참 잘 했 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 나를 버 리십니까? 그래도 내게 저주가 있다 는 말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어느 것 잘 했고, 어느 것은 못했느 냐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일입 니다. 이 계명만 잘 지켰는가 뿐 아 니라 저 계명도 잘 지켰느냐까지 입 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동네에서는 그래도 내가 괜 찮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날더러 그래도 덕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내가 저주받아야 됩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덕이 있든지 없든지, 사람들에게 좋 은 평판을 가졌던지 갖지 못했던지, 누구든지 모든 온갖 일에 항상 주의 율법대로 행하지 않은 자는 저주 아 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십계 명의 표면적인 내용만 갖고도 머리 가 숙여집니다. 나는 그렇게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 말씀 을 다시 깊이 풀어주시기를

'네가 살인하지 않았다. 아니야, 네가 마음 으로 살인했으면 살인이야. 네가 간 음하지 않았다고? 마음으로 간음했 으면 간음한거야.'
사람은 겉모습 밖에 못 봅니다. 하나님 눈에는 보 이는 것 있습니다. 뭐가 보입니까? 마음이 보입니다. 그런고로 누구든 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 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율법의 모든 행위는 우리 머리 위에 저주를 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 전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 가장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기 위해서 나 가고 나가고 나가도 그 분께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율법 을 바로 지키는 사람들은 결국 절망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안된다. 내 한계는 여기까지다. 내가 하나님 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고 그 구 원은 나와 상관이 없다. 그 대신 저 주가 내 머리 위에 있다고 절망합니 다.

여러분, 이런 절망하는 인 생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해답을 주 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고 십자가입니다. 12절에 이렇게 말 합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 살리라 하였느니라.'
아무도 자기 삶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 량하셨습니다. 내가 받을 저주를 주 님께서 다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그 리고 주께서 그 저주의 값을 지불하 시고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언 제 그랬습니까?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 이니라.'
여러분 동양에서 사람들을 나무에 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국가를 크 게 더럽히고 어지럽힌 사람들, 민란 이나 국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목 을 베어 효수를 했습니다. 목을 장 대에 높이 꽂아서 못되고 나쁜 놈, 저주받을 사람의 상징으로 매달아놓 았습니다. '이런 사람의 삶을 따라서 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효수(梟首) 라는 것은 목만 베서 메달아 놓는 것이고 효시(梟示)는 사람을 곤장으 로 쳐서 죽으면 목을 베지 않고 그 사람 목을 맨 채 나무에 달아 오가 는 사람들로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요근래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러다가 개화기 임오군란, 갑오경장 때 젊은 청년들이 법을 고치면서 어떤 경우 에도 그냥 목을 매달아 교수대 처형 하는 것 이상은 안된다고 못을 박았 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은 사람 목을 매다는 경우가 없습니다. 하여 튼, 나무에 높이 달려있는 시신을 보면 저것은 저주다, 저 인생은 저 주받은 인생이다라는 사실을 동양의 모든 국가가 동일하게 알았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율 법을 범하면 돌로 쳐서 죽이고 그 다음, 하나님의 진노 받기에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목을 매달아서 나무에 달아놨습니다. 그 의 일그러진 몰골을 보면서
'하나님 의 저주가 마땅히 이 사람에게 임했 지 않느냐? 이를 본으로 여겨 죄를 미워하고 주의 율법을 따라야한다.'
고 가르쳤었습니다.

그랬는데 로마에서는 죽고 난 다음 목을 베어 매다는 것이 아 니라 아예 나무에 사람을 매다는 무 지무지한 십자가라는 사형대가 있었 습니다. 원래 이 십자가는 카르타고 에서 민족 반역자를 죽이는데 사용 한 사형도구입니다. 기본 개념은

'이 친구는 땅에 묻힐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시체라도 누워 있어서는 안될 못된 놈이다.'는 의 미입니다. 대개 십자가에 못을 박을 때 손바닥에 못을 치지 않습니다. 손바닥에 못을 치면 사람의 체중에 의해서 찢겨 버리든지 빠진답니다. 그래서 손 뼈가 모두 모여 있는 팔 목에 못을 칩니다. 만져보면 못을 칠만한 자리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 도 사람을 그냥 오징어 말리듯이 팔, 다리를 쫙 펴서 못을 박아놓으 면 평균적으로 힘이 분산되기 때문 에 고통이 덜 하답니다. 이것을 느 슨하게 쳐놓으니까 손에 힘을 주면 발에 힘을 줄 수 없고 발에 힘을 주 면 손에 힘을 줄 수 없어서 의식이 있는 동안에는 이리 꿈틀 저리 꿈 틀... 너무 아파서 기절했다가 또 의 식이 돌아오면 꿈틀꿈틀 거립니다. 며칠이고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 대로 놔두었습니다. 로마가 카르타 고를 점령한 다음, 이 이상한 사형 제도를 자기 나라에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정했습니다. '아무리 극악무 도해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에 죽을 수 없다.' 그래서 시 세로의 글을 보면 '십자가라는 것은 치욕이고, 십자가는 저주고, 십자가 는 형벌이고, 십자가는 패배이고, 십 자가는 어둠이다. 십자가 문양은 로 마 사람들과 영원히 상관없다'고 했 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죄를 지었는 데도 로마 시민권자인 사도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사도 바울이 참수당했다는 예배당이 로마 에 있습니다. 그 목이 떨어져서 네 번인가 다섯 번 굴렀다는데 굴러 떨 어지는 곳마다 표식이 있다고 해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 겠습니다만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일 으키는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민권을 갖지 못했던 사도 베 드로는 그 극악무도한 십자가 형틀 을 확정받습니다. 그는 사형 집행인 에게 말합니다.
'나 같은 못된 놈이 어찌 우리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 을 수 있습니까? 거꾸로 십자가를 매달아주세요.'
그래서 베드로는 거 꾸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 동 생 안드레는 십자가에 못박힐 때 사 형 집행인에게
'나도 감히 우리 주 님처럼 그 영광의 십자가에 달릴 수 가 없습니다. 어떻게 인생으로 주님 모습을 흉내낼 수 있나요? 십자가를 엇비슷하게 뉘어주세요.'
그래서 X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X자 십자 가를 St. Andrew's Cross라고 이야 기합니다. 성 안드레의 십자가!

여러분, 그 십자가에 우리 주님이 달리셨습니다. 초대 교회 예 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는 사 실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십자가를 목에도 매고 사방에서 보니까 그렇지, 사형 집행 틀 중에서 어떤 사형대를 자기 종교 의 심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수 있 습니까? 어디 그런 상상이 있을 수 가 있어요? 그래서 이 십자가가 어 떤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 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 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패배와 저주 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저주의 상징에 못이 박혔단 말이예 요. 그런데 그 저주는 그냥 저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13절은 다 시 말합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 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 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 라.'
즉, '나무 아래 있는 자는 저주 를 받는 자다, 주께서 저주를 받으 셨다, 그 저주는 그냥 저주가 아니 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틀이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십자 가를 지러 올라가실 때 로마 군인들 의 무서운 채찍이 그의 등을 할퀴었 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 이요...'
주께서 십자가에서 못이 박혔습니 다. 손과 발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 위의 가시관이 힘껏 눌려서 가시 끝이 박힌 곳에 피가 주르르 흘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 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몸부림치고 바르게 하려고하면 할수 록 내게 하나님의 저주 밖에 없다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죄를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해 결해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처치하는 완전한 방법을 고안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십자 가를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약속하 신 저주의 시행처라고 믿으면 내 저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로 옮겨 집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자매 들이여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왜 나 는 이처럼 재수 없는 인생인가, 내 삶에 있어서는 저주의 저주가 계속 되지 않았는가? 내가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한번도 내 마음에 유쾌한 날 을 갖지 못하지 않았는가? 내 마음 속에 어두운 그늘을 한번도 헤쳐보 지 못하지 않았는가? 마음 속에 깊 은 저주의식을 가지신 분 있으십니 까? 그 모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에 옮겨놓으시기 바랍니 다. 주께서 나의 저주되셨습니다. 여 러분, 행위는 나를 믿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결론은 절망입니다. 온전 히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내 저주에서 내가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혼자 그 늪 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 면 움직일수록 그 늪 속 깊은 곳으 로 더 빨리 빠져버리는 것과 같습니 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이 큰 막 대기를 주어서 그 막대기를 붙잡으 면 올라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 간은 내 저주에 빠져서 허우적거립 니다. 아침에 일어나도 유쾌함이 없 습니다. 저녁에 자면서도 기쁨과 평 안이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잘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무거운 억눌림이 있습니다. 내일 어떤 불길 한 일이 나를 뒤덮을까하는 저주의 식으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닙 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 라보시면서 내 모든 저주가 그 십자 가에서 시행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 랍니다. 내 저주는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 주받은 바 되사...'
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저주 받을 이유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렇 기 때문에 남의 저주를 대신 지실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분이 죄인 이어서 자기 저주를 자신이 받을 인 생이었다면 그는 자기 저주를 자기 가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님은 흠 없는 분으로 저주와 상관없 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래서 디모데전서 1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 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이 말을 믿으십니까? 나를 믿는데서 그리스도, 주님을 믿는 대로 그 믿 음이 바뀌어져야 됩니다. 이제까지 는 항상 나였습니다. 나 중심이었습 니다. 그 중심이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완성하신 그 해결책,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옮겨집니 다.

아브라함은 몸이 늙어서 도무지 자녀 낳을 수 없는 조건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약 속하시니까 믿었습니다. 그것이 그 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미 내 무시무시한 저주가 우리 주님 께 시행되었습니다. 그것을 내가 믿 음으로 수납하는 것입니다. 그 때 내 저주는 옮겨지고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시는 의로 옷을 입습니다. 주님의 의가 내게 전가됩니다. 내 죄는 던져집니다. 하나님과 막혔던 장벽을 주께서 제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사귐이 시작되 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새로운 인생을 삽니다.
'아빠 하나님!'
여러분, 인 생 사시면서 참 외롭지 않아요? 그 런 인생들이여, 아빠 하나님의 이름 을 불러보세요.
'아버지!'
언제나 내 곁에 계신 분, 나를 나 보다 더 사 랑하십니다. 아빠 개념이 나 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 의 저주가 되신 주님, 십자가를 바 라보십시다. 나의 죄를 바라보지 마 시고 나의 저주를 바라보지 마시고 내 저주가 실현된 십자가를 바라봅 시다. 그 안에 내 구원이 있습니다. 그 안에 내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 에 내 인생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애쓰고 수고 해서 얻었다는 것, 내 노력의 댓가 이지 복음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내 대신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저주를 해결 해주신 우리 하나님, 그 놀라운 약 속을 내 것으로 믿을 때에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인쳐주십니다. 하나님 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주십니다. 그 리고 내 인생이 새로운 생애로 펼쳐 집니다. 내 저주가 십자가에 달렸고,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움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 르는 믿음의 삶! 이것이 그리스도인 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둘 중의 하나를 선택 해야 됩니다. 내 노력으로, 내 믿음 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내 열심에서 내 죄의 모든 저주를 해결하신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완전하심,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 혜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인생의 방 향을 옮기십시오. 이 두 생애가 평 생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도 내재합니다.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 니까? 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어느 편으로 가길 원하십니 까? 이미 내 저주가 주님께 퍼부어 져서 내 모든 죄가 주님께 전가된 것을 믿으신다면 중심으로 할렐루 야, 찬송하십시오. 그 저주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지금 고통스럽다구 요? 그건 저주 아닙니다. 아빠의 사 랑의 채찍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고통 없이 크고 아름다운 인 생이 된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저 주가 없어야 되요. 저주가 없으면 아파도 좋습니다. 저주 의식만 없다 면 실패도 괜찮습니다.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산성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저 주는 이미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하 나님의 저주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 다. 요즘 책 중에 엉터리 책이 있습 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 라! 복음을 모르는 소리예요. 그 친 구는 율법에 갇혀있는 친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 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습니다. 믿습니까? 무슨 가계에 저주가 있어 요? 지금 그 사람들이 말하는 유전 적인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전 달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저주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복음을 모르면 그렇게 헛된데 마음을 뺏깁니다. 여 러분, 내 저주는 사라졌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해야 됩니다. 십자가 를 바라보십시오. 내 저주는 끝났습 니다. 이미 내 저주는 처형되었습니 다. 그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천국에 가 서도
'죽임 당하신 어린 양, 힘과 영광과 권능이 다 주께 있습니다'
하고 찬송으로 우리 주님 앞에 영광 을 돌려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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