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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골 02: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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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신앙생활은 마라톤 경기와 같습니다. 출발을 잘해야 하지만 동시에 잘 달려야 합니다. 끝까지 잘 달려야 합니다. 중간에 한 번 넘어져버리면 금메달의 영광이 사라져버립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이 마라톤과 다른점은 여러 가지 장애요인이 그 길에는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8절에 이어 다시 한번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달리고 있는지를 확실히 하도록 골로새 성도들을 경고합니다. 무엇을 붙잡고 사는지를 분명히 하도록 골로새 성도들에게 요구합니다.

맨 먼저 오늘 읽어드린 본문의 위치를 살펴봅시다. 골로새서 2장 8절부터는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전부이시며 우리가 필요한 전부임을 부각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하신 분이며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해졌다는 사실을 먼저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으로 가득해졌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함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마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죄악된 옛 성품을 잘라내고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됨으로써 우리의 옛 사람을 청산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성품의 충만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일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룩하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고발하고 우리에게 대한 불리한 증언을 하는 모든 기록이 삭제되고 그 문서조차 십자가에서 폐기처분을 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모든 저항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온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금욕적이고 신비적인 경향을 띤 율법주의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승리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아직도 옛 율법의 멍에 아래 끌려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사도는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승리하셨기에 이 세상 어두움의 정사와 권세는 무력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대적이 우리를 참소 하던 근거가 사라졌습니다. 그가 참소하는 우리의 모든 잘못은 사실이더라도 그 죄를 인해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처벌을 이미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이상 옛 율법의 규정아래 매여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을 좀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우선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6, 17절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면서 우리가 비난받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영역을 제시합니다. 먼저는 먹고 마시는 식사법에 관한 것이고 다음은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대해서 우리는 비판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일시적인 규례들이요 실체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18, 19절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라는 경고로서 시작합니다.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에 빠져서 안 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본 환상을 과시합니다. 헛되고 독선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의 결정적인 잘못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못된 것을 믿으면 잘못된 길로 빠져듭니다. 나쁜 신학은 나쁜 행동을 낳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바로 알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실제적인 삶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본문은 그런 면에서 잘못된 신학을 믿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하나의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엉뚱한 곳에 끌려 들어가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슨 일을 했는지를 바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삶의 규범 뒤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패배하고 끝장을 본 악한 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규정들을 가지고 오만하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우리는 흠모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분명하게 깨달으면 무슨 말을 해도 요동치 아니할 것입니다.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면 솔깃해지는 것입니다. 울산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지역에 세워준 진리의 파수꾼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가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가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했는지를 알고 진리를 바로 알리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골로새 교회를 어지럽힌 이단들의 정체를 자세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단편적이고 간접적인 정보를 이 앞 뒤 구절들로 추측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이 부분은 논쟁적으로 기록되었고 이단들의 가르침이나 주장을 빗댄 글로서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말들이 상대방의 말을 되받아 반박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도 바울이 직접 사용한 것인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찌되었건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우리가 붙들고 살아야 할 것을 두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째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우선 16, 17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 구절을 통해 볼 때 골로새 교회를 어지럽히는 어떤 사람들이 골로새 성도들의 신앙형태로 인해서 비난하는 것을 쉽게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여기에 나열된 다섯 가지는 모두 유대 율법적인 규례들처럼 생각됩니다. 특히 앞의 두 가지는 먹고 마시는 식사법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형제들의 삶이나 행동을 가지고 입을 대었던 모양입니다.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남을 비판하는 일은 새 천년이 되어도 계속되고 있는 악습입니다. 벌써 이 천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인간은 그 본성상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가차없이 판단하는 일을 수 천년동안 인간은 끈질기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우리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남을 바라보면 판단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자신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할수록 남을 꾸짖고 책망할 일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판단의 기준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형제의 심판관으로 세움을 입은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이 사람들은 자신의 유대교적 전통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골로새 성도들을 수시로 입에 올렸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라난 배경에 따라서 그 나름의 편견들을 가지게 됩니다. 어떤 가정에서 자랐느냐에 따라서 가정적인 문화가 다르고 어떤 지역에서 자랐느냐에 따라서 그 지방 나름의 문화와 가치관이 서로 다릅니다.

그 뿐 만 아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가치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은 유대교적 기준을 절대적으로 여기듯이 여러분도 어떤 가정, 어떤 지역, 또는 어떤 교회, 혹은 교단에서 자랐느냐에 따라서 그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행동하는 기준은 공자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사실을 잊어버리고 언제나 장유유서를 따지며 한 번 눈밖에 나면 전혀 용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 교회 안에도 가끔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성경대로 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산다는 주장이 어떻게 입증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 본문에 나오는 먹고 마시는 문제는 직접 구약 율법의 음식 법이나 신약 사도들의 편지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구약 율법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금지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신약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는 다만 유대교의 배경을 가진 연약한 형제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타협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언급된 먹고 마시는 것은 좀 더 엄격한 규범처럼 보입니다. 아마 여기는 나실인의 모양을 따라서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이나 술을 먹는 것을 금하는 금욕적인 성격을 띤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23절의 표현을 빌리면 몸을 괴롭히는 요구를 했고 따라서 어떤 것은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도록 요구했나 봅니다.

그러면 왜 특정한 것을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도록 했을까요? 거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들을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영혼의 윤회설을 믿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순결 규례를 따라서 고기를 먹지 않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금식을 하므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간다고 여겼습니다. 금식을 하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준비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골로새 이단들은 음식 금기나 날짜를 신성시하므로 세상의 초등 학문에 복종하는 것으로 가르친 듯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를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아무도 여러분의 자유에 입을 대지 못하도록 하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앞서 고린도서나 로마서를 통해서 먹고 마시는 문제나 날짜 준수의 문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다룬 것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문제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확신을 가진 자라도 그렇지 못한 연약한 형제를 생각하고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골로새 교회의 문제는 반대로 음식문제에 까다로운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자들이 나머지 모든 성도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잘못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약에는 하나님께 봉헌된 특정한 날을 가리키는 말로서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런 구별된 날을 지키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증거였고 열방 가운데 택한 백성된 증표였습니다.

하지만 골로새에서는 오히려 구별된 날들을 지키도록 요구한 것은 '세상의 초등 학문'을 따르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절기를 지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동기가 거기에 작용했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초등 학문' '세상의 악한 영들' '어두움의 정사와 권세'와 연관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잘못된 경향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비판합니까?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런 절기를 지키는 것은 다만 장래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받을 일이 없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다만 지나가는 것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이래로 본질과 그림자는 많이 다루어진 철학적 주제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하는 말과 철학에서 사용하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서로 다릅니다. 우선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림자와 몸'은 존재론적인 차이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차이입니다. '본질과 그림자'의 대조보다는 '장차 올 것의 그림자'란 의미로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합니다.
'장래 일'이란 말은 기록할 당시의 관점에서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의 관점에서 미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습니다. 실체는 이미 도래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규례든 날짜에 관한 규례든 이 모든 규정들은 일시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하고 실체가 오기까지 임시적인 것들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차이는 기독론적인 차이입니다.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는 말은 실체는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림자를 드리우는 실체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 모든 구약의 규정들이 암시하는 바의 실체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새로운 질서는 이러한 규정들이 가리키던 완벽한 실제입니다.

날들에 관한 이 모든 규정들은 다만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이제 모두 힘을 잃었습니다. 이미 실체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더 이상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이 오셨고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이후에 아무도 더 이상 이런 율법적인 규정에 얽매여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을 먹든 마시든 남의 판단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할 뿐입니다.

이제 두 번째 부분으로 가봅시다. 우선 18, 19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아마 이단들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주장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징은 자기들의 환상을 과시하고 헛되고 엉뚱한 생각으로 가득했으며 결정적인 문제는 교회 성장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지 않는 것으로 지적합니다.

그러면 하나씩 살펴봅시다. 먼저 여기서 지적된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이란 무엇일까요? 두 명사가 한 전치사에 의해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사안이라기 보다는 여기서 말하는 거짓된 겸손은 이어서 나오는 천사 숭배함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이것들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일부러 겸손함'이란 하늘의 신비적 환상을 보기 위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내세우는 골로새 이단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천사 숭배함'이란 얼핏 생각되는 대로 사람들이 천사들을 숭배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천사들의 예배를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본래적인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금식이라든지 하는 금욕적인 수행을 통해서 하늘의 영역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비밀한 환상을 받는 준비를 하므로 천사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예배에 참여하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추구해야할 종교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한 듯 싶습니다. 하늘 성전에서 드려지는 천사들의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내세운 듯 합니다. 그런 것을 경험한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임을 과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무엇이라고 이들의 작태에 대해서 평가합니까? '자기 비하와 사교적인 천사숭배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구원의 은혜의 상을 강탈하도록 허용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쭐대며 자기의 망상적인 경험을 과시하며 그 육욕적인 생각과 견해 때문에 헛된 생각과 독단으로 꽉 차 있습니다'.

이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온 교회 가운데 자신들만 가장 영적인 것처럼 우쭐댑니다. 자기들만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바로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근거 없는 자기의 망상적인 경험을 과시합니다. 헛된 생각과 독단으로 꽉 차 있습니다. 자신은 영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모두는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생각과 견해에 기초한 것일 뿐입니다.

이런 잘못된 영적 교만은 교회를 분열로 치닫게 합니다. 일부의 신자들이 특정의 신비한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할 때는 언제든지 교회의 분열을 일으킵니다. 어느 시대나 신비로운 꿈을 꾸는 자들이 이런 문제를 야기 시킵니다. 오늘날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골로새 거짓교사들이 내세우던 바와 흡사합니다.

성령의 지시와 인도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때로 겸손을 가장한 교만한 행동입니다. 이런 지혜롭지 못한 자들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이 욕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다른 지식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일부 신자들에게는 아무런 가르침도 먹혀들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분명히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예수를 구주로 알고 있는 다른 성도들에게서 배울 바는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선물로 주신 가르치는 직무를 맡은 자들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듣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도 소중합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을 남보다 월등한 최고의 영성을 가졌다는 것으로 그 속에 교만을 감추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결정적인 잘못을 무엇이라고 바울은 지적합니까? 다시 한번 본문을 읽어봅시다.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그들의 결정적인 잘못은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 등에 빠지는 대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왜 그리스도를 붙잡고 사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까? 그것은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영양을 공급받고 머리의 통제 아래서 한 몸으로 제 기능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통해서 정상적인 영양을 공급받고 정상적인 기능을 다할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는 구절은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을 참조해 볼까요?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만 하나님께서 성장케 하심으로 우리의 몸이 골고루 영양을 공급받고 자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단단히 붙지 못합니다'.

몸은 머리에 붙어있어야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신경조직과 근육조직이 활성화되고 힘과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머리의 통제 아래서 만이 유기체로서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몸은 머리를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을 때 유기적인 성장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서부터 떨어지면 성장은 그만두고 살아갈 수조차 없습니다. 골로새 이단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이 본 것을 의지하고 그것을 과장하여 내세우는 한 머리를 붙잡지 아니하는 결정적인 잘못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무엇을 내세우고 있습니까? 자신의 체험입니까? 자신의 신령한 경험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힘과 영양을 공급하고 우리를 그 몸의 일부로 자라게 하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요 성장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 때문에 새 생명을 얻었고 그 분을 통해서 지금까지 자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인적인 성숙과 공동체적인 확산은 오직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가능케 하십니다. 하늘의 경험도 아니고 천사의 예배에 동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숙해지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성도는 홀로 성숙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몸이 머리에 붙어 있을 때 성장과 성숙은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성숙한 분량에 이르고 있습니까?

꼭 기억하십시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새 천년 생명 사랑 나눔 축제를 앞두고 우리가 우선 적으로 물어야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아직도 이런 저런 규정입니까? 이제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한 분만을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을 붙잡고 사십니까?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먼저 확인해야할 사안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경험입니까? 여러분이 본 그 어떤 환상이나 들은 천사의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붙드십시오. 여러분이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붙어있을 때 하나님의 계획대로 자라며 하나님의 의도대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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