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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 (갈 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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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라고도 불리우는 책입니다. 기록한 분은 바울 사도이고,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입니다. 갈라디아는 로마 제국의 한 지방으로 현재의 터키의 일부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피를 토하듯 간절하게 호소하는 사도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도는 그렇게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자유를 빼앗겨 본 사람은 정말로 자유가 귀한 것인 줄 압니다. 그래서 그 소중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감수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소중한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죠. 자유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입니까?

우리의 조상들은 이 자유를 잃고 수많은 고통을 당한 분들입니다. 일제의 치하에서 나라 빼앗긴 설움을 당했습니다. 나라를 되찾았는가 했더니 6.25 동란으로 나라가 쑥밭이 되면서 공산치하의 살벌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은 목숨을 바쳐가면서 자유를 지켜 왔습니다. 자유는 목숨보다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좀 살 만해지니까 젊은이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을 들이대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접근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캠퍼스에 인공깃발을 게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공산주의에게 자유를 빼앗기고 치를 떨었던 세대들이 볼 때 얼마나 한심하고 기가 막히겠습니까? 물론 민족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유를 짓밟혀 본 적이 있는 분들에게는 이 젊은이들의 행동이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또 요즘에는 학원폭력이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그 원인을 조사해 보니 청소년 문화에 깊숙히 침투해 있는 일본만화의 영향이라는 것입니다. 그 만화에서 이름을 딴 폭력 써클이 학교마다 조직이 되고, 만화에서나 가능한 끔찍한 범죄들이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현실에서 시행되고 있다는 것은 정말 기가 막힐 일 아닌가요? 일본이라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 세대가 볼 때 문화적인 침탈을 통해 또다른 형태의 일제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는 사실이 얼마나 통탄할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자유의 소중함을 아는 어른들이 자유를 내팽개치려고 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애절하게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줄 아느냐?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단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 자유를 내팽개치겠다는 것이냐? 제발 정신차리고 다시 이 자유의 품으로 돌아오너라. 이러지 않겠어요? 6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해산하는 것과 같은 수고를 통해서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자유를 버리고 율법의 속박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보고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그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사도가 말하는 이 자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종류의 자유인가요?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우선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쓴 대부분의 편지 서두는 자신을 사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의 편지 서두에서 자신을 사도라 칭하고 있지만, 요한은 그냥 장로라고 썼고, 야고보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자신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편지마다 그렇게 집요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사도된 바울,'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사도직을 밝히고 있을까요? 자기가 사도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인가요? 바울 사도의 인격으로 미루어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사도직이 많은 도전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변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사도 바울,' '바울 사도' 하는 식으로 그의 이름에는 언제나 사도라는 말이 붙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별로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가두고 핍박하는 선봉장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마음이 변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면서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서열에 자신을 올려놓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겠어요?

우리 인간에게는 남을 시기하는 좋지 않은 성품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같은 일을 하는 동역자들 간에도 그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특별히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이 더 큰 능력을 발휘하거나 인정을 받게 될 때 시기심은 더욱 타오르게 마련입니다. 어떤 선교사님 한 분이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해서 해외 여기저기서 집회 강사로 초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두 번은 괜찮았는데, 세 번, 네 번째가 되니 그에 대한 곱지 않은 시각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선교지의 책임자가 그 선교사님의 해외 집회를 허락할 수 없다고 나왔습니다. 그 책임자 선교사님은 아직까지 한번도 해외집회의 강사로 초빙을 받은 적이 없었거든요.

복음의 사역자들 가운데서도 이 시기질투가 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당시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마음이 많이 상했지만 선교지의 평화를 위해 초청받은 집회에 가지 않기로 양보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울 선생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시기하고 반대하는데, 꼭 사도직을 그렇게 고집하셔야만 되겠습니까? 사도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사도가 아닌 분들을 사용하셔서 사도들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하신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기독교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 좀 양보하셔도 됐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사도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다시 말해서 자신이 사도라고 말하는 것은 높은 지위를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고, 무슨 대접을 받기 위함도 아니라 하나님의 인치심 받았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보고 마음이 좁은 사람이라거나 양보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양보를 하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아십니까?

고린도전서 9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한 가지 행동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늘 실없는 소리만 하는 사람이 한번 아무리 진지한 얘기를 해도 믿으려 드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늘 약속에 늦는 사람이 한번 약속시간을 제대로 지켜서 나왔다면 다른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늘 성실하고 착하게 살던 사람이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평소 그 사람의 인격과 성실함 때문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고 분명히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는 것을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집쟁이이고 양보와 타협을 모르는 독선가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자신의 사도직을 그토록 고집했을까요? 어떤 지위나 특권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해졌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입니까? 7절과 8절을 보세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복음이 변질되고 거짓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사도라는 권위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전했던 복음이 진짜다. 다른 복음은 가짜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야말로 참 복음을 전하는 사도다. 내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의 선거에 의한 것도 아니고, 누구의 임명을 받은 것도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 사도의 권위로 내가 이 복음을 전하노라.'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런 확신과 소명이 없이 복음을 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단종파에 속해 전도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전도하던가요? 그런 확신이 있으니까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는 것 아닙니까? 저 자신도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부끄러운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 복음, 다른 복음에 속아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저렇게 확신 가운데 살아가는데, 참 복음, 참 진리를 소유한 우리가 때로는 그렇게 티미하게 살아서야 되겠어요?

우리가 이 사도의 말씀 가운데 또 한 가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권위의 근거는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만약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렇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이지 천사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 천사들의 거짓말에 속고 있습니다.

간디의 예를 들어 봅시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간디만큼 위대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결국 무저항, 비폭력 운동으로 조국을 독립시켰고, 민족간 종교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애쓰다가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했던 분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스승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인도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자랑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분이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가 모두 소중하게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함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위대한 분이기 때문에 그의 말이 아무런 저항이나 재고없이 모두 진리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 가운데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종교는 결국 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서로 다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한 나라 내의 종교분쟁을 가라앉힐 수 있는 좋은 이론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결코 없다는 기독교의 진리에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입니다. 권위는 진리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명성이나 업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심지어는 강단에서조차 천사들의 거짓말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유명하신 부흥사 목사님들, 박사님들의 말씀 가운데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들으면 거짓말이라는 것이 뻔한 말들이 정신없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교육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 유명한 목사님을 모셔다가 교사부흥회를 했는데, 교사들이 아멘, 아멘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다음 주일 교사 모임에서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오. 목사님의 말씀이니까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다 보니 평신도들이 다 병신도들이 됐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요, 목사는 제사장이래요. 그래서 목사에게만 축복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목사님은 빨리 천주교로 개종을 하셔서 신부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믿는 목사님들이 너무 많습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바로 만인제사장 아닙니까?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구약의 제사장들이 드리던 그림자 같은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그런 불완전한 제사나 제사장이 이제는 아무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제사장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목사가 제사장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씀들을 하시더라는 말입니다. 또 그것을 목사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아멘! 하면서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다른 거짓말 한 가지는 뭐였는가 하면요, 그분이 러시아를 방문하셨는데, 그 정교회 건물을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하게 꾸며놨던지 그 안에 들어가니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면서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거야 그 목사님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체험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목사님의 말씀이 교회에 끼칠 나쁜 영향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나님의 임재 자체가 장엄한 것이지 예배장소가 장엄하다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장엄한 건물과 하나님의 영광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출애굽기 20장 25절에 보면 참된 제사를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쌓을 때 다듬은 돌 사용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김희보 목사님은 다듬은 돌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겨 하나님께 참된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될 위험을 제거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정으로 다듬은 돌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참된 제사를 방해할진대, 하물며 장엄한 예배당과 하나님의 임재를 혼동하시는 목사님이 계셔서야 되겠어요? 그 러시아 정교회 건물들이 어떻게 지어진 줄 아십니까?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교회는 거둬들인 세금으로 지붕을 금으로 입혔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교회가 부패하고 백성의 고통을 외면할 때 결국 러시아 대제국이 볼셰비키 혁명 앞에 그만 붕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배당을 아름답게 짓는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집을 잘 꾸민다는 것이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만, 이 사상이 자본주의 사상, 물질만능 사상과 결탁했을 때 교회를 타락시키고 파멸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교회들은 예배당 짓는 것을 제1의 과제로 삼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예배당이 허름한 교회는 교인들이 떠나가고, 예배당을 그럴듯하게 짓지 못한 교회의 성도들은 비애와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러시아의 붕괴과정을 본받을 필요는 없잖아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진리를 바로 알 때 그러한 모든 거짓된 가르침이나 다른 복음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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