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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시의 우월성 (갈 0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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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우리는 바울이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있을 수 없으며, 만약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매우 확신있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 확신을 가졌던 근거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이성의 판단에 의해서입니까? 아니면 훌륭한 스승들에게서 배워서인가요? 공부를 많이 해서 터득한 결과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의 믿음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해서 합당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게 된 분이 계십니까? 한때 이성만능주의가 풍미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일단 의심해 본 다음 이성에 의해 증명되어야 진리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은 얼마든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아주 제한된 능력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성은 틀릴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으로 파악이 되지 않는 영역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의 진리들이 어떻게 우리의 이성으로 다 파악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삼위일체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이것도 이성의 범주를 넘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의 믿음이 이성으로부터 기인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지거나, 아니면 교회는 약간 모자라는 사람들만 모인 곳이 될 거예요.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이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를 진리되게 하는 근거가 바로 이 계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해석하거나 신학을 연구할 때 우리의 이성이 아니라 계시에 의존해야 합니다. 물론 이성이 활동을 하지만 그 이성은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태도를 계시의존사색이라고 말합니다.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이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에만 의존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해 놓은 일이 무엇입니까? 기독교를 이성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놓은 것입니다.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빼버리거나 다른 의미로 해석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물위로 걸어가셨다는 것에 대해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말도 안돼. 예수님이 물가 언덕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희미한 달빛 아래서 제자들이 잘못보았던 것이 틀림없어.' 이렇게 해서 이성은 만족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어디로 갔습니까?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다. 그럼 이게 한 하나님이냐, 세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한 분인데 이름이 셋이거나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거야. 이런 식으로 나온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주의이고, 이단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경험과 이성에 위배될지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 자신의 판단에 의해 예수를 믿어야 한다면 믿을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제 이성의 판단에 따른다면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우리에게 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할 일인가요?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에게 복음을 주셨고, 또 어떻게 사도의 직분을 받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약간 언급합니다. 사실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은 기독교의 파괴자였습니다. 기독교의 뿌리를 뽑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살기가 등등해서 기독교인들을 다 잡아 가두려고 출장을 가는 길에 그만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 후로 기독교의 파괴자가 기독교의 건설자로, 기독교의 박해자가 기독교의 변호자로 변한 것입니다. 이처럼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분들이 변하여 과거의 부끄러움을 다 상쇄하고도 더 많은 존경을 받을 만한 분들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깡패가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 경우도 그 하나겠지요.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던 이기풍 목사님도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과거의 부끄러운 삶을 고백하고 거기서 나와 새로운 삶으로 옮겨오게 되었을 때, 때로는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 때문에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이 더욱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옛날의 부도덕하고 방탕하게 살았던 이야기들을 아주 자랑스러운 듯이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옛날에 한창 술먹을 때는 나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는 둥. 한번은 제가 대학 다니던 때에 아주 유명한 부흥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갔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면서 말이죠. 목사님은 자기가 과거에 깡패였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양 설교시간에 얼마나 심한 욕설을 거침없이 해대는지... '야 이 썅년아! 잠을 자려면 집에 가서 자지, 설교시간에 졸긴 왜 졸아?'

사도 바울은 자기 같은 죄인을 부르셔서 복음의 사역자 삼으신 것을 말하기 위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고 있는데, 우리는 때때로 그 부끄러운 과거를 자랑이나 하듯, 혹은 그리워하듯 떠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책과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옛날의 부끄러운 모습을 자랑하듯 떠벌일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못된 습관들을 계속할 수 있겠어요? 우리의 신앙인격이 성숙되려면, 이런 습성도 고쳐야 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청년 사울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들의 유전에 큰 열심히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유대교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핍박하고 뿌리뽑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교에 대한 확신은 무엇으로 인한 것입니까? 가말리엘과 같은 훌륭한 스승에게서 배운 결과였고, 자신이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해서 터득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계시가 임했습니다.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가 임했을 때 그가 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지식과 확신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계시의 우월성 앞에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 어떻게 했습니까? 16, 17절에 보면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고 했습니다. 진리는 윗사람의 결재를 맡아야 할 사항이 결코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예수를 믿게 된 사울은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만나 그의 회심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이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일이 필요했을지 모릅니다. 베드로나 요한 같은 훌륭한 사도들을 만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진리에 관해 더 듣고 배워야 할 필요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그는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지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가를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평생동안 쌓아올린 학문과 종교체계의 탑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습니까? 그래서 그가 더 갈급하게 원했던 것은 베드로 같은 지도자들의 인정이나 그들의 지식을 전수받는 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계시를 더욱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아라비아 광야로 물러가서 하나님의 개인교습, 직접적인 계시를 추구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라비아에 머무는 동안 그의 신학체계가 정립되고 그리스도로부터 사도의 직분을 받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장 큰 공헌은 기독교의 신학을 정립한 일입니다. 그는 신약성경 가운데 13권을 기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후 아라비아로 갔던 일은 얼마나 잘한 일입니까?

아라비아에서 돌아온 바울은 또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다메섹으로 왔습니다. 자신이 회심하여 처음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했던 그곳으로 돌아와 사역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3년이 더 지나서야 바울은 비로소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15일 동안 거기 머물면서 베드로와 교제를 나누었는데,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하던 야고보 사도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 수년이 지난 후에야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그것도 15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베드로와 야고보만을 만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의 신학적인 지식이 교회의 지도자들인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도들에게서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또 그의 사도직분이 다른 사람들의 선거나 추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 자신의 사도직 등에 관해,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담대하게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말해야 하겠습니까? 나도 사람에게 배우는 지식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야겠다, 그러니 목사님의 가르침이나 설교를 들을 필요 없이 나 혼자 성경말씀을 묵상해서 진리를 깨달아야 하겠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되면 곤란하겠죠. 오히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 이단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확실한 계시는 바로 이 성경말씀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계시를 올바로 알고 해석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사역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분들이 바로 교회를 돌보고 성도들을 지도하는 목사님들 아닌가요? 또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라는 확실한 계시가 주어졌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그보다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만일 어느날 예수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셔서 하늘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행해야 할 일을 지시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안해 주셔도 섭섭하거나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계시로 주어진 이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3, 24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사도 바울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모습이 점점 변해갈 때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나 행동을 버리지 못할 때,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게 됩니다. 바로 우리들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가 잘못 행하고 바로 서지 못할 때 욕을 듣는 분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순간 순간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이 사람에게 비춰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가 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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