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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만드는 사람들 (갈 0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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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이 지난 후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동안에 바울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겠죠. 바울은 바나바라는 훌륭한 교회 지도자를 만나 그를 따라 안디옥으로 가서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그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었을 때 바나바와 함께 구제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기도 하였고, 바나바와 함께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아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역의 결과 많은 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이방인들의 교회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유대인들의 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점차 큰 집단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아주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약간의 차이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이 문제점들이 이제는 그대로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큰 것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큰 차이를 내부에 품은 채 그리스도의 한 지체, 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문제는 점점 심각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기독교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바울은 안디옥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문제가 무엇이었느냐? 사도행전 15장으로 가서 살펴 봅시다. 유대인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유대인 교회에서 오신 강사들이니까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부흥회에 참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부흥회를 하려면 강사를 잘 선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안디옥 교회에서는 강사를 잘못 선정하는 바람에 교회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 유대에서 오신 강사님들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요,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이 강사님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인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은혜스러운 부흥회를 기대했는데, 강사님들과 교회 목사님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으니 얼마나 곤란한 지경에 이르고 만 것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었고, 그 가르침에 기초해서 많은 이방인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에서 온 강사님들 말씀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꼭 할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모든 행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고 율법의 행위들을 기대하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100%의 효력을 발휘하는데, 이 유대에서 온 강사님들에 의해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80%, 율법의 행위 20%, 이렇게 해서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대속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득권자들의 비겁한 속임수에서 나온 논리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천 수백년 동안 애를 써 왔습니다. 그렇게 애를 쓰고 고생을 했는데도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구원의 다른 길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우상이나 섬기던 이방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돼 버렸습니다. 자기들은 그렇게 고생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겨우 힘들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데, 이 새로 믿은 이방인들은 그동안 실컷 우상을 숭배하다가 이제 와서는 율법은 아랑곳 하지도 않고 너무 편하게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유대인들이 배가 아프지 않겠어요?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바울과 같은 지도자, 신학자가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는 이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이 귀하신 강사님들과 한바탕 붙는 것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사님들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수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1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뭐라고 했던가요?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어쨌든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회의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교회의 운명도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이러한 중요한 회의들이 많이 소집되었습니다. 때때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도 있었지만, 이러한 회의를 통해서 이단들이 정죄되고 바른 신학이 정립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보면, 이러한 회의들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교회가 올바로 서도록 하신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 회의도 그랬습니다. 과연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이냐,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율법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인가? 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회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4,5절 보세요. 이 사람들은 바울이 할례 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 데려온 것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할례를 받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관철된다면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의 전파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진리가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사도들과 장로들의 소규모 모임에서 자신의 입장을 잘 설명했습니다. 물론 디도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회의에서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아주 영향력이 큰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11절, '우리 유대인들도 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결국 어떤 결정이 났습니까? 이 회의의 의장이었던 아고보가 일어나서 결론으로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우상숭배, 음행, 목매어 죽은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권고를 하기로 하고 그 외 모든 율법의 속박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 베드로, 야고보 같은 모든 유명한 사람들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하고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확보되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율법의 굴레에 얽어 매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가 그런 실수를 범했습니다.

한번은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대사도가 오셨으니 환영이 얼마나 대단했겠어요? 그래서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 어디있고 이방인이 어디있습니까? 또 베드로로서는 과거에 특별한 체험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다가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로부터 보자기가 내려와 들여다보니 각종 짐승, 기는 것, 새 등이 들어있는데,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베드로는 펄쩍 뛰며 말하기를,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속되고 깨끗지 않은 것들을 먹을 수 있습니까?' 율법에 의하면 먹어서는 안되는 부정한 짐승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정색을 하고 거절했는데, 다시 하늘로부터의 음성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더럽다고 하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규정에 더 이상 얽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아무 차별없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한 베드로였기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그 자유를 알고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필 그때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봐서 이 사람들은 할례주의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얼른 식탁을 떠나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러니 다른 유대인들도 모두 자리를 피했고,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외식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는 것이 아니고, 해 놓고도 안한 척 발뺌했다는 것입니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놓는 일이죠. 결국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는 행위입니다.

베드로나 바나바나 모두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알고 확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면 때문에, 혹은 어떤 손해를 당할까 봐 그 확신을 떳떳하게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운 모습 아닌가요? 여기서 그 외식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바울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다시 한번 의분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죠. 그래서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대선배인 베드로를 아주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베드로의 그런 행동은 베드로 개인의 비겁한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깨닫고 누리는 데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베드로는 한참 후배인 바울의 책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나이가 많건 적건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 더이상 기록은 되어 있지 않지만,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회개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두 분이서 싸웠다는 기록은 없으니까요. 이 대목에서 베드로가 다시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후배의 책망도 받을 줄 아는 인격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납니까?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찾아보기가 상당히 어려운 미덕입니다. 윗사람은 잘못을 해 놓고도 큰 소리를 치는 게 우리 문화인 것 같아요.

그럼 여기서 바울의 주요 논점이 무엇입니까?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죠. 만약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쓸데없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작업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짓 아니겠어요?

그러니 이제 율법은 없습니다. 율법의 효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율법은 잡을 필요도 없도 잡으려고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이냐?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으니까, 율법이 말하는 규정들은 아무 소용이 없고 우리는 이제 모든 법과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 내 맘대로 행해도 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씀이 17절입니다. 율법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고 했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법도 없고 도덕도 없는 모습으로 죄인으로 나타난다면 어떻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결국 그리스도 때문에 더 죄인이 된 것 아니냐? 그럼 그 책임이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 아니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죄인으로 나타날까 두려워 그럼 율법을 다시 가져와서 지켜야 되겠습니까? 이것도 안되는 일입니다. 언제는 율법이 필요없다 해서 헐었던 것을 이제 다시 필요하다 하고 세우면, 과거에 헐었던 것은 실수였고 잘못이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도는 말하기를 자신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가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율법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을 율법의 권세 아래 두시고 그 율법 아래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율법의 저주에 내어 주심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율법의 요구사항이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율법의 권세와 힘은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빚쟁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빚을 졌는데 빚을 갚지 않으면 그 빚쟁이가 우리를 고소해서 감옥에 가든지 어떤 벌을 받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빚을 갚으셨는데 한번 갚으신 것이 아니라 두 번 갚으신 것입니다. 한번은 자신을 위해 갚으셨습니다. 자신이 율법 아래 있으시면서 그 율법을 모두 행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신 것이죠. 예수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모두 충족하셨으므로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율법의 저주 아래 두시고 죽음으로 그 빚을 갚으셨습니다. 이 두 번째 갚으신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그것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자신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고, 죽음으로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한다면 바로 자신의 빚을 갚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율법의 행위로 자신의 빚을 갚으셨기 때문에 죽음으로 다른 사람의 빚을 다시 한번 갚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빚을 갚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그 저주를 우리에게 두려고 할 때 우리는 빚을 갚은 영수증만 제시하면 됩니다. 비록 내가 갚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대신 갚으신 영수증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그 영수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우리가 연합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우리도 함께 못박힘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켰고 그래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물론 의롭게 되었다는 것,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연합합니까?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고 비밀인데,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십자가에서 두 번째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다 해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을 때 우리도 그 죽음에 연합해서 우리에게 효력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그 율법의 요구를 갚았다는 영수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켰으니까 우리는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롭게 된 것이 착한 일을 많이 해서입니까? 율법을 다 지켰기 때문입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으로 그 요구를 갚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 유대주의자들은 아직도 율법에 매달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뿐만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도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율법주의, 우리의 행위에 의해 우리의 구원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는다고 느낀다면, 이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커다란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율법주의가 우리의 행동양식을 지배하고 있음을 많이 봅니다. 새로운 율법주의, 새로운 유대주의입니다. 이런 잘못된 사고방식에 대해서 앞으로 좀더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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