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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이르는 길 (갈 0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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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사상은 그 섬기는 신을 노엽게 하면 벌을 받고 그 신을 기쁘게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을 기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심청을 공양미 삼백석을 주고 산 뱃사람들은 이 죄없는 처녀를 인당수에 빠뜨려 죽게 함으로써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노여움을 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사한 항해를 하려 한 것이죠. 구약에 기록된 어떤 이방인들의 종교적 행위는 신전에 가서 신을 섬기는 여인들과 성행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풍요의 신을 기쁘게 하고 풍년을 약속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나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는 종교와 문화,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한 양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고등종교라고 불리우는 주요 종교들에서 신을 기쁘게 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의롭게 되는 일입니다. 의를 행하면 신을 기쁘게 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고, 반면에 불의를 행하면 신을 노엽게 해서 벌을 받게 됩니다. 이런 종교들은 사회적으로 도덕을 세우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 고등종교라고 불리웁니다.

가령 불교에서는 보시를 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또 모든 살생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를 예방하는 데 큰 공헌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기 수양과 노력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어떻습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두 명의 천사가 따라다닙니다. 오른쪽에 있는 천사는 이 사람이 착한 일을 행할 때마다 그것을 기록합니다. 왼쪽에 있는 천사는 그 사람의 모든 악행을 기록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오른쪽 천사의 기록과 왼쪽 천사의 기록을 저울에 달아서 선행의 기록이 더 무거우면 천국에 가게 되고, 악행의 기록이 조금이라도 더 무거우면 지옥행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의를 이루는 것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인데, 그 의를 이루는 방법은 각 개인의 노력과 헌신과 희생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 의를 이루는 방법이 아주 독특합니다. 다른 종교에서 의를 이루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길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종교에서는 착한 일을 행하고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함으로써 의로움에 도달하게 되는데, 기독교에서는 믿음으로 의로움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얘깁니다. 자기가 착한 일을 해서 그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착한 일을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믿기만 하면 착한 일을 많이 한 것처럼 의롭게 되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이게 말이 안되는 얘기 같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예비하신 것은 행위로 말미암은 방법이 아니라 바로 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방법입니다. 행위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과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근거를 누가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의 공로로 구원을 얻습니까? 자신이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구원을 얻는다면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에는 자신의 공로가 구원에 전혀 영향조차 미치지 못합니다. 이 믿음이란 다시 말해서 다른 누군가가 이루어 놓은 의로움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은 다른 누군가에 의한 구원, 밖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어쨌든 의를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다른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자신의 선한 행위를 통한 것인데, 구약에서 그것은 율법이라는 특별한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12절을 보세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을 지키면 믿음과 상관없이 의로움에 이르러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의에 이르러 구원을 받게 되는 반면,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의에 이르지 못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 되고 결국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를 더 심각하게 하는 것은 51%의 의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착한 행실이 51%만 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에 이르는 방편으로 주어진 율법은 99%로도 부족합니다. 10절 보세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려고 하다가 그 중 단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인류 가운데 그 율법을 100% 다 지켜서 의에 이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11절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요,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2장 16절에서도 그랬지요?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의를 이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율법의 행위로 의에 이르려고 애쓰는 사람은 결국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저주 아래 있다고 한 것입니다(10절).

그래서 의에 이르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박국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해서 믿음을 소개합니다. 11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는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불평조로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자식이 없으니 하나님이 아무리 큰 축복을 주셔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남 좋은 일 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여 주시면서 그의 자손이 그렇게 번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즉 그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창 15:6).

그러니까 의롭게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은 우리에게 전혀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남은 다른 방법, 즉 믿음이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왜 가능성도 없는 율법을 의로움에 이르는 길로 주셔서 사람들을 그렇게 고생시키고 실패를 경험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으로는 의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 행하면 의롭게 될 수 있는데, 그래서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렇게 하려고 해 보니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되는 이 방법의 한계를 깨닫고 의를 이루는 다른 방편을 찾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24절에서 말하기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이제 분명한 것은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고 그 대안으로서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의에 이르러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은 우리가 의를 이루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갈라디아 사람들은 율법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축복과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율법으로도 의를 이룰 수 있다는 사상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강사님들을 유대에서 초청해다가 부흥회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율법으로 의를 이룬다는 주장은 이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습니다. 내가 뭔가를 해서 성취할 수 있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내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에 이른다는 것은 결국 내가 엄청난 것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공짜에 대한 죄의식 같은 것이 있는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믿음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죄의식을 유발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으로 의에 이른다는 사상을 쉽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1절에, '이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또 1장 6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자기의 행위와 노력으로 뭔가를 성취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에 조금이라도 공헌하려는 태도, 이것을 우리는 율법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또한 내가 뭔가를 하지 않거나 뭔가 잘못을 저지르면 나의 구원에 어떤 영향이 미치거나 어떤 형태의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율법주의입니다.

무슬림들 보세요. 이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신실한 무슬림들은 선행에 대한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행의 동기가 무엇인가 하면요, 선행을 하지 않으면 신을 노엽게 해서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율법주의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직도 우리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율법의 거짓된 지배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특별히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이 이러한 율법주의의 성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주일날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당장 무슨 벌을 받을 것처럼 느껴진다면 율법주의입니다. 무슨 일이든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율법주의에 얽매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온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십일조를 냅니까? 그렇다면 율법의 지배 아래 예속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아주 엄격한 부친에게서 상당한 율법주의적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만약 제가 성경책 위에 다른 책을 올려 놓으면 혼났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성경책 위에 소설책을 올려 놓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코란을 올려 놓을 수도 있는 자유 정도는 누리고 있습니다.

월요일에 아주 중요한 시험이 있어도 주일에는 절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그랬다더군요. 일요일 밤에 모든 준비를 다 해 놓고 기다리다가 12시 땡 치면 밤새워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구요. 왜 그렇게 율법에 스스로를 쓸데없이 얽어매야 하는 것입니까? 왜 월요일에는 공부해도 되고 주일날에는 공부하면 안됩니까? 주일날은 거룩하게 지내야 하기 때문에 공부를 안하고 있다가 월요일은 거룩하지 않게 지내도 되기 때문에 시험치면서 컨닝을 해도 되는 것입니까?

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돈을 써도 되고 주일에는 돈을 쓰면 안됩니까? 그래서 꼭 주일에 물건을 사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돈이 있으면서도 외상으로 사고서는 월요일에 돈을 갖다 주는 것을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 돈이 일만 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거룩한 주일에는 만지면 안되는 것입니까? 주일날 돈을 내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먹는 것은 안되고, 집에 있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는 것은 괜찮습니까? 주일날 차비 내고 택시타는 것은 안되고 자가용을 타는 것은 괜찮습니까?

물론 제가 그런 노력들을 외식의 행위로 간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진정한 경건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탄식하지 않으시겠어요?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그 자유를 내버리고 스스로 얽매는 것이냐?'

과거 유대인들이 꼭 그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발달시킨 나머지 안식일에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는 무화과 열매 하나 정도, 안식일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1km 정도,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무화과 열매 두 개를 들고 가면 율법을 깨뜨린 죄가 되구요, 마차를 타고 10km 가는 것은 죄가 되지 않겠네요?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다음 '네 자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을 때, 이 고침받은 사람은 당장 사람들의 눈에 띄고 말았습니다. 그 날이 하필 안식일이었는데, 어떻게 감히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갈 수 있습니까? 38년 동안이나 꼼짝 못하고 누워 있다가 이렇게 고침을 받고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안식일의 규정에 의하면 집에도 못가게 되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빨리 가서 가족들에게 알려야 되지 않겠어요?

율법 때문에 정작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셈이죠. 하나님께서는 38년 된 병에서 해방된 기쁨을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38년이나 누워 있었던 그 지겨운 곳에서 하룻밤을 더 지내도록 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주셨겠어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베드로에게 새로운 자유로 주어졌습니다. 그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자유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어졌는데 왜 스스로 그 자유를 포기하고 율법의 굴레를 다시 쓰려고 하는 것입니까? 율법주의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의 파괴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파괴자가 아니라 그 율법을 완성하시고 우리를 율법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율법주의의 파괴자가 되셨습니다.

만약 우리의 행위 가운데 이러한 율법주의의 경향이 있다면 그 율법주의를 깨뜨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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