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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과 성령 (갈 0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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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성령 (갈 5:1-26)

의롭게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의에 도달함으로써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면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의롭게 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할 상황입니다. 의롭게 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주어졌지요? 하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이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덧입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을 지키겠다는 표시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니잖아요?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마치 무슬림이나 불교신자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의롭게 되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5절 말씀 보세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의롭게 될 소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소망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의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어떻게 해서 믿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이 믿음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을 보니까 믿음이란 말을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믿어 우러르는 일 이라고 설명했더군요. 물론 다른 뜻도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여겨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가령 친구를 믿는다, 약속을 믿는다, 진실을 믿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 삶에 여러 가지 형태의 믿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2 더하기 2는 4라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셨다는 것도 믿습니다. 서울에서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려면 좌석버스 48번을 탑니다. 48번 버스가 고속버스 터미널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카톨릭 고등학교를 다녔는데요, 학생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믿음 가운데 살고 있다. 만약 우리가 믿음을 상실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혼란에 빠질 것이냐? 내가 탄 버스가 내가 가려고 하는 목적지에 갈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더 이상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느냐?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이 친구와 동행할 수 있겠느냐? 결국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이 믿음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다.

상당히 그럴듯한 얘기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의에 이르는 믿음과 내가 탄 버스가 나를 올바른 행선지로 데려다 줄 것이라는 믿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국어사전에서 기독교의 믿음을 다른 형태의 믿음과 구별한 것은 타당한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종교가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고 가르치던가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독특하게 말하고 있는 교리입니다.

2 더하기 2는 4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지적 활동을 통하여 우리에게 수용된 결과입니다. 따라서 2 더하기 2는 4를 믿는다는 것은 지적인 동의인 셈입니다. 48번 버스가 고속터미날에 간다는 것을 믿는 것은 지적인 활동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경험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그래서 경험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 엄마 품에 안긴 아기를 생각해 보세요. 이 아기에게는 엄마 품보다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100% 믿게 됩니다. 엄마 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때때로 감정과 믿음이 동일시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의에 이를 수 있게 하는 믿음은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닙니다. 누가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 의에 이를 수 있습니까? 소위 영지주의자들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영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적 활동을 통해 의에 이른다면 IQ 순으로 구원을 받게 되겠군요. 또 누가 경험으로 증명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임재나 능력이 경험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시죠?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애굽을 탈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한 만큼 하나님을 잊고 범죄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던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경험된 하나님을 배척했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의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우리의 지식이나 감정이나 경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닙니다. 5절에서 사도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갖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에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면서 그랬죠?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으로 시작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때 우리가 이 의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믿음을 가져다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성령의 역사와 이 믿음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 문제는 다시 조금 있다가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 다음으로 6절 말씀을 보세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즉 의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그 방법에 있어서는 할례를 행한다, 율법을 지킨다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나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한 가지 더한다고 더 빨리 의에 이른다거나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에 이르는 일이 방해를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의에 이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제 율법은 없다. 그러면 그 자유를 실컷 누려보자. 율법에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제 그 율법에서 자유로우니 얼마든지 거짓말을 해도 된다. 율법은 간음하고 도적질하는 것을 정죄하는데 그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니까 이제 마음껏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해도 될 것 아니냐? 실제로 교회의 역사를 보면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해서 완전한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며 그들만의 공동체를 조직하고서 모든 도덕과 규범을 폐기하고 그렇게 이상한 자유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라고 했습니까? 6절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효력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의 여부가 아니라 믿음 뿐인데, 그 믿음이란 어떤 성격의 믿음인가 하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그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어떤 계명이 크겠어요? 거짓말 안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일성수 잘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러니까 율법의 정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거짓말 할 수 있나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도둑질하고 살인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자유케 하는 믿음은 육체의 기회를 삼고 방종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14절 말씀처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이 한 말씀에 온 율법이 이루었다, 즉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언제는 믿음으로 의에 이르기 때문에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안된다고 하더니, 믿음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결국 믿음 안에서도 사랑을 행하고 율법을 행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냐? 그게 그거고 결국 말장난에 불과한 것 아니냐?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아까 믿음은 어떻게 온다고 했습니까? 성령의 역사로만 믿음이 가능하다고 했지요?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는데,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있게 되면 육체의 소욕을 행할 수가 없게 되지요. 19절부터 21절에는 육체의 소욕으로 인한 일들이 몇 가지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런 육체의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믿음 밖에 있는 것이고, 믿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22절과 23절에서 구체적으로 명시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하심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떤 열매들인가요? 사랑, 기쁨,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그래서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된 사람들의 삶에서는 이런 열매들이 탐스럽게 맺혀져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율법을 행해서 의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들의 삶보다 얼마나 더 차원이 높고 풍요로운 것입니까? 율법으로 의에 이르려는 사람들의 의로운 행위의 동기는 두려움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되지 못하면 심판을 받고 멸망에 이르거든요. 그러나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사람들의 행위에서 두려움을 찾을 수 있습니까? 이들은 성령으로 살면서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결국 그게 그것이고 말장난에 불과합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사도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시다.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가 2:20에서 뭐라고 선언했던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면서 어떻게 내가 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고 있는지 늘 점검하십시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사 우리가 항상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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