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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의 삶 (갈 0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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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거울이 없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할까요? 서로가 상대방에게 거울 노릇을 해 주느라 바쁘겠지요? 그러나 거울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혼자서 머리를 빗을 수도 있고 화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는 사람은 단정하지 못한 모습을 다른 사람 앞에 내보이는 실수를 덜 하게 되지요.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거울 보는 일에 썩 성공적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제 밤에 어떤 목사님과 대화하는 중에 그분 말씀이 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보기란 정말 어렵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일깨워 주고 충고도 해 주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우리가 정말로 자신을 모습을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갈등과 오해가 훨씬 줄어들리라고 생각됩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만 잘 보는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셨겠어요?

우리 주위에서도 보면 어떤 사람의 행동 가운데서 그 사람의 마음이 다 들여다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유치하기까지 할 정도로 누구에게나 그 속마음이 다 들여다보이는데, 오직 누구만 그것을 모르는가 하면요, 자기 자신만 모릅니다. 그러니 그런 행동을 계속하는 거지요. 왜 그렇게 남의 잘못은 금방 눈에 띄는지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일이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을 보고 우리의 반응하는 모습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또 하나의 수수께끼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더합니다.

사도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의 범죄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아 주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의 기회로 삼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살필 줄 아는 사람, 그래서 부끄럽거나 단정치 못한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실수했을 때 온유한 심령으로, 부드럽게 그 잘못을 시정해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살필 줄 모르는 사람, 그래서 남들 눈에 늘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 보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더 들추어내고 비난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우리 선조들은 아주 적절한 표현을 했습니다.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입니까? 짐을 서로 짐으로써 무엇을 성취하게 됩니까? 바로 사랑이지요.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가요? 자기가 한 일들을 살펴보면 내가 제일 똑똑하고 잘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자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구원을 얻게 하신 것도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자기 일을 살피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않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면서 신실하고 정직하게 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우리의 기쁨과 위로를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고 비난하거나 정죄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각자가 각각 자기의 짐을 짊으로써, 그러니까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 안에서 기쁨과 하나님의 위로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 보세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왜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합니까? 그렇게 해서 의에 이르기 위함입니까? 천만의 말씀이죠. 우리는 이제 이미 의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서요?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렇습니까? 아니죠,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미 의롭게 되어버렸으니까 착한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까? 의롭게 된 다음의 단계는 거룩하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해지는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5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은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인 육체의 소욕을 거스립니다. 다시 말해서 쉽지 않다는 얘기죠.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피곤을 극복하면서 선을 계속 행하면 때가 이르러 거두게 될 것입니다. 즉 거룩함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삶은 거룩함을 향한 부단한 노정입니다. 그래서 8절의 말씀처럼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즉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은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을 힘입어 거룩함에 이르게 되고 그래서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 중간에 흥미 있는 구절이 있는데, 6절 보세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아마 목사님들이 좋아하실 구절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우리 한국교회는 이 말씀의 가르침대로 목회자를 잘 섬기는 아름다운 전통을 세워왔습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큰 유익이 되었는데, 정작 목사님들에게는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경찰 한 분하고, 선생님 한 분, 그리고 목사님 한 분이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값을 누가 냈게요? 여론조사에 따르면 목사님들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신부님들에 대한 신뢰도는 1,2위에 늘 있는데, 개신교 목사님들의 신뢰도가 갈수록 떨어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가 사회의 등불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목사님들이 섬김 받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져가지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예수님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목사님들만 탓할 일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같이 하라는 이 말씀과 유교전통의 가부장적 권위가 묘하게 혼합되어 만들어낸 이 잘못된 전통을 우리 모두가 깨뜨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사도는 이 편지의 결론은 내리고 있습니다. 15절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나 행하지 않는 것이 이제는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못 박혔고, 우리가 비록 이 육체 가운데 살고 있지만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그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 거룩함에 이르는 성도의 삶, 그것이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들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 안에 살 때 하나님의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율법주의자들은 몸에 할례의 흔적을 갖는 것이 중요했지만, 우리는 예수의 흔적, 십자가의 흔적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2장 20절의 위대한 선언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 삶을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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