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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옥에서 온 편지 (엡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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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온 편지 (엡 1:1-2)

세상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들 중 하나는 아마도 우체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체부는 편지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다니고 있는 바이블칼리지에는 각 학생들의 편지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저는 수시로 가서 그 편지함을 봅니다. 혹시 무슨 편지가 와 있나 해서 말이죠. 그런데 제 편지함은 주로 텅 비어 있습니다. 다른 학생들 편지함에는 편지도 들어 있고, 초콜렛도 들어 있고, 심지어는 꽃도 들어 있는데 말이죠. 텅 비어 있는 편지함을 보면 제 마음도 허전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제 편지함에 편지가 들어 있는 수가 있습니다. 그걸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나에게 편지가 왔다는 것은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를 사랑하고 또 위로와 격려를 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이지요.

우리가 편지를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얼른 뜯어보잖아요? 무슨 소식인지, 어떤 내용인지 빨리 알고 싶어하지요. 또 보낸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반응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반가운 편지인 줄 알았는데 보낸 사람을 보니 전화국에서 온 편지다, 그러면 이거 돈내라는 고지서구나. 별로 반가운 편지가 아니죠. 그러나 한국에서 어머니가 보내신 편지라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에게서 편지가 왔다면 또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요?

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가 한 통 배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감옥에서 온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은 이 에베소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했던 첫 번째 담임목사님 바울사도였습니다. 벌써 몇 년 째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여러분 실감이 안나세요? 그럼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 윤호승 목사님은 북한선교에 비전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이곳 오클랜드에서 벧엘교회를 개척하셔서 목회를 하시는데, 몇 년 후 북한선교를 위해 북한에 들어가셨다고 합시다. 그런데 선교사역이 발각되어 북한당국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마나 걱정을 하고, 또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기도를 하지 않겠어요? 물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석방운동을 벌이겠지요? 또 목사님은 얼마나 고생이 심하겠습니까?

그러던 중에 여러분에게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북한의 감옥에서 목사님이 보낸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오클랜드 벧엘교회 성도님들께...'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여러분은 어떡하시겠어요? 편지를 가운데 놓고 온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지 않겠어요?

이 에베소서의 배경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에베소서는 지루하고 딱딱한 설교가 아니라 감옥에 갇힌 목사님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눈물과 사랑이 배어 있는 감동의 편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에베소서를 읽을 때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읽으셔야 합니다.

또 에베소서가 여러분에게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핵심내용은 교회론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고, 교회의 역할과 책임, 교회 구성원들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주옥같은 말씀들이 바로 이 에베소서의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교회를 구성한 여러분들에게는 이 에베소서가 가장 먼저 공부해야 할 교과서인 셈입니다. 앞으로 시간이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는대로 에베소서 말씀을 연구해 보도록 하십시다.

우선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서부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상업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다이아나 여신을 수호신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에베소에서 교회를 개척했고 복음을 전했는지는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 에베소에 가서 보니 믿는 사람들이 몇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물었습니다. '여러분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하는 말, '성령이 뭔데요?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그럼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랬습니다. '허, 요한은 주인공이 아니에요. 요한이 세례를 베풀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석달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 어떤 사람들이 계속해서 반대를 하고 비방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교인들이 예배당을 옮겼어요. 어디로 옮겼는가 하면 두란노 서원으로 옮겼습니다. 서원이라는 것은 일종의 학교인데, 바울이 예배처소로 세를 얻은 것이뇨. 한국에서는 두란노 서원이 유명한데, 그건 원래 에베소 교회가 세들었던 곳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 많은 이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손수건만 갖다가 병자에게 얹어놓아도 병이 낫고 귀신이 나갔습니다. 또 한번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주동이 돼서 온 성이 들고 일어나 '다이아나 여신 만세!'를 부르며, 바울을 반대하는 데모를 벌인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사역해서 큰 결실을 거둔 후에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의 송별회 장면이 나옵니다. 밀레도에 도착한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해서 송별회를 연 것입니다. 이제 로마를 최종 목적지로 삼은 바울이 '앞으로는 여러분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고별사를 마치니까 이 장로들이 바울의 목을 껴안고 울었어요. 만약 윤목사님이 북한으로 떠나시면서 고별사에서 '앞으로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면 여러분도 안그러시겠어요?

그렇게 떠난 바울이 로마에 가서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그런데 그 바울에게서 편지가 온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편지입니까? 바울 입장에서도 이 편지는 대단히 중요한 편지였습니다. 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자기가 전도해서 세례주고 양육한 교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믿음이 성장하도록 교훈과 사랑어린 충고를 담아서 적어 보낸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1,2절 말씀은 이 편지의 서두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1절은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있는데, 보내는 사람은 바울이고 받는 사람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수신자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로 되어 있어서, 에베소 교인들과 또 에베소 교인은 아니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이 편지의 공동 수신자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우리말 성경처럼 공동수신자로 번역한 경우도 있고, 에베소 교인들과 신실한 자들을 동격으로 보아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인 에베소의 성도들'을 수신자로 표현한 성경도 있습니다. 문맥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인 에베소의 성도들'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발신자와 수신자를 공통으로 수식하고 있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지요?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이고,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과 수천리 떨어진 에베소의 교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가 된 것, 한 몸을 이룬 것, 이것을 우리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신념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로 뭉칩니다. 그렇게 되면 국민회의니, 한나라당이니 하는 정당이 되는 것이죠. 조기축구회는 아침에 모여 축구하는 행사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모임입니다. 볼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볼링클럽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막스와 레닌의 사회변혁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로 부릅니다. 학자들 가운데도 학풍을 따라 분파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데는 중심이 되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각자 다른 배경과 사상을 가진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에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원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해야 됩니다. 만약 볼링클럽에서 이제 볼링이 재미없으니 볼링 하지 말고 등산을 하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을 볼링클럽이라고 계속해서 말할 수 있습니까? 그건 이제 볼링클럽이 아니고 산악회가 된 것이죠. 중심되는 이슈가 볼링에서 등산으로 바뀌었고, 그 공동체의 성격도 바뀐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교회에서도 중심되는 이슈가 예수가 아니고 다른 무엇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왜 교회가니?' 하고 묻는데, '교회가면 친구들을 만나니까 좋아.' '교회가면 해야 할 일이 많아. 내가 집사거든.' 이런 식의 대답이 나온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친목단체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구제사업에 힘쓰고 사회정의를 위해 애쓰는 것이 마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없고 사회사업만 한다면 그것은 봉사단체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각 개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이 나타나고 구세주되심이 고백되어야 하고,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들을 준행할 때 참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이름만 내걸었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이런 참된 교회에 소속되지 못하고 친목단체나 봉사단체에 속해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요?

그래서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감옥에 있으나 먼 곳에 있으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도 의미없고 자유인과 노예의 구별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예수라는 공통의 이슈가 너무 강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출신성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른 이슈로는 하나가 되기 어려운 사람들이 교회에서 한 몸을 이룰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같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예수께서 우리 모두를 용납하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인사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뭐라고 인사를 하고 있는가 하면 2절 말씀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와 평강이라는 두 단어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이 은혜에 의한 것 아닙니까? 이 은혜야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말과 구원받았다는 말은 그래서 전적으로 동의어입니다. 그 은혜가 아니고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은 이제 평강으로 특징지워집니다.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평화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누구와 원수가 된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입니다. 북한과 남한이 적으로 지내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불편하게 살아왔습니까? 그 원수가 힘이 강한 상대일 경우에는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과거에 소련과 중국이 우리의 적으로 남아 있을 때는 늘 위험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와 중국이 우리와 평화를 맺게 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우리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싸워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괴로움만 더할 뿐이죠. 그런 우리가 이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삶입니까? 하나님과의 평화,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의 평화를 잘 유지하고 계십니까? 때때로 우리는 이 평화를 깨뜨리는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드리는 경우가 그렇지요.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고 다시 원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이 평화가 잘 유지되고 늘 풍성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또한 이 평화는 성도들간에 지켜져야 할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큰 모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종종 깨뜨리는 것처럼, 우리 서로간의 평화도 종종 깨뜨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불행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평화가 여러분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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