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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선택 (엡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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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참 어렵지요? 3절에서 6절까지가 한 문장인 것 같은데, 주어가 무엇이고 동사가 무엇인지, 부사절이 너무 많아서 문장 파악이 잘 안되는군요. 그러면 우선 주요 개념들을 살펴 봅시다.

3절,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4절,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
4-5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
5절,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6절,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한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이 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 복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기복신앙을 부추겨 교인들을 호도하고 있다는 얘기들을 종종 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 '복받으려면 교회 나와라.' 이런 말이 기복신앙이라는 비난을 초래한다는 것이지요.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복을 받으려고 신을 섬겼습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도 조상신이 복을 가져다 주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복신앙의 행태가 기독교가 전래된 후 교회 안에까지 침투되었다는 분석을 할 수 있습니다. 복받기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다 보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주셨다고 했잖아요? 아브라함에게도 축복하시면서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복받는 종교이고 기독교 신앙은 기복신앙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이라고 비난을 받습니까? 문제는 뭔가 하면 복의 개념이지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복의 개념은, 그리고 기복신앙이라고 비난받는 데서 의미하는 복의 개념은 다분히 물질적인 내용입니다. 물론 물질적인 복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적인 복을 위해서 우리가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기독교 신앙과 물질적인 풍요나 안녕을 결부시킨다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안믿을 때는 잘나가던 사람이 예수 믿은 후에 사업 망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 집안에도 우환과 질고가 없으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시각장애인이세요. 앞이 안보여도 사모님의 도움을 받아 신학교를 마치고 목회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보통의 각오와 노력으로 가능하겠어요? 하나님 보시기에도 얼마나 귀한 헌신입니까? 그 집에 아주 똑똑하고 예쁜 딸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유치원에 갔다 오다가 그만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좋아야 복을 받는다는 사상으로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반면에 예수도 믿지 않고 정직하지 않게 사는 사람들 중에 잘 살고 출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고 받는 복은 부자가 되고 자녀들이 잘되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3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에요. 그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4절 이하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우선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도 많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셨지요. 그때만 해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만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타락한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멸망이라는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멸망을 당할 것이냐? 바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멸망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선택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예수 믿고 받게 되는 복인 거예요. 어찌 돈많고 잘사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창세 전이라면 우리가 존재하기 전이지요. 우리 옆집에 사는 전도사님은 아이를 낳기 전에 이름을 미리 지어 놓았답니다. 여호수아를 너무 좋아해서 아이 이름을 Joshua로 미리 지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딸을 낳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수아로 했답니다. 그런데 이 전도사님 성이 조씨거든요. 결국 아이 이름이 조수아가 된 거지요. 이렇게 아이 낳기 몇 개월 전에 이름 제대로 짓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나님은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했느냐 하는 것이죠. 또 논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 봐서 구원을 주셔야 할 터인데,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그 사람의 운명을 정해 놓고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도 문제 아닙니까? 잘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본인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 책임이라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을 안해 주셔서 구원 못받게 되니까요. 그래서 이 사상에 찬성하지 않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가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미리 아시고 선택을 하신 것이라고 타협안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리 택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구원받는 진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설명해 줍니다. 1961년에 이정선이 태어나고 1998년에 조수아가 태어날 것을 창세 전에 하나님이 어떻게 아셨나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고,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미리 아셨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특정인이 예수를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 아시고 선택을 하셨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선택을 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믿을 것을 미리 아시고 선택을 하셨다면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의미가 없잖아요? 선택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선택은 선택하는 사람이 알아서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해야 선택인데, 누가 믿을 것인지 미리 아시고 선택하셨다면 그 믿을 사람을 선택 안할 수가 없잖아요? 또 안믿을 사람을 선택할 수가 없잖아요? 이건 선택이 아니죠. 선택은 선택하는 사람 마음대로 해야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절에 보세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했다고 그랬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압력이나 어떤 상황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행위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선택해도 되는 것입니까? 최소한 구원받을 당사자인 우리에게 물어보거나 우리 의사도 조금은 반영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옛말에 평양감사도 본인이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지위와 구원을 받아야 할 우리의 처지를 살펴보면 이 질문은 너무나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구조선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면 구조대원들이 먼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당신을 구해 줄까요, 말까요?' 물어 보고 구조합니까? 자살하려고 물에 뛰어든 사람이 아닌 이상 죽어가는 사람을 구조하는 데는 그 사람의 동의를 얻는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우리는 모두 범죄해서 멸망을 당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조선이 다가와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감사하고 황송할 뿐이지, 거기서 왜 먼저 우리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이의를 제기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또 하나의 문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선택을 안해 주셔서 구원 못받았으니, 구원받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책임입니까? 그렇다면 사람이 멸망을 당하게 된 이유를 한 번 살펴봅시다. 왜 멸망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선택을 안했기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죄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죄악 때문에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 안했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지요? 반면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선택이 은혜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구원받을 사람들을 선택하시는 행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와 권한에 속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토기장이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 21절에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말합니다. 그릇 만드는 사람이 흙 한 덩어리로 예쁜 꽃병을 만들든지 쓰레기통을 만들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자기가 지은 사람 중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으셨는데, 그걸 누가 탓한다면 지음을 받은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는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지는 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부분을 우리가 간섭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선택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뿐이지요.

그래서 사도는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라고 문장을 시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선택하셔서 아들로 삼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송을 드리는 일 외에 우리가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은혜를 생각만 해도 찬송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상태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11장 45절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거룩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잃어버린 그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셨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4절의 '사랑 안에서'라는 부사구는 5절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이 잘못 되어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로 자기 아들이 되도록 예정하셨다'는 것이 원래 문장의 흐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삼아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삼아 주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우리같은 죄인을 아들로 삼으실 수 있겠습니까? 아들로 삼았다고 해서 여자분들이 섭섭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자분들은 딸로 삼아 주셨다고 읽으세요. 여러분을 딸로 삼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잘 아는 형님 한 분은 딸 하나를 입양했어요. 시골에서 어떤 새댁이 아이를 막 낳았는데 남편이 사고로 죽었습니다. 젊은 여자가 이제 남편도 없이 막 낳은 딸 하나를 데리고 평생을 살아야 할 형편이니 기가 막히지요. 그래서 이 엄마는 새로운 인생을 위해서 딸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형님이 그 아이를 자기 딸로 삼아 데려왔습니다. 그런 일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형님의 법률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딸로서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고 나중에 재산도 있다면 상속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삼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또 우리의 신분이 그렇게 변했다는 것을 말해 주지요.

이 문장의 시작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도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지요?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선택해 주시고 아들로 삼아 주신 그 은혜를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소요리문답 제1번에 '사람의 첫 번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자, 그런데 3절부터 6절까지 각 절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주시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요, 우리를 택하신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이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로도 그의 사랑하시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시요, 구세주이십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를 우리 믿음의 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히 12:2). 우리 믿음의 핵심이라는 말이지요.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은혜와 복을 충만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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