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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값비싼 대가 (엡 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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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대가 (엡 1:7-10)

이 부분 역시 문장파악이 쉽지 않네요. 빨리 좋은 번역본이 나와서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선 7절의 내용이 무엇인지 봅시다. 우리가 무엇을 받았다구요? 구속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영어로 redemption이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가 하면 도로 찾아왔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 20년 전만 해도 한국에 전당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당장 돈이 필요한데 없을 경우 찾아가는 곳이 바로 전당포지요. 그래서 서민들이나 또는 시골에서 혼자 올라와 공부하는 학생들이 요긴하게 돈을 꾸어 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맨손으로 가면 돈을 꾸어 주겠습니까? 아니지요. 전당포에서 돈을 빌리려면 뭔가를 맡겨야 합니다. 시계를 맡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옷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당포에 가 보면 찾아가지 않은 물건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전당포에서는 그런 물건을 내다 팝니다. 예를 들어 내가 시계를 맡기고 돈을 빌려 썼다고 칩시다. 그 시계는 분명히 내 시계지만, 전당포에 있는 한 내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찾아가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전당포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것입니다. 내가 다시 그 시계를 사용하려면 빌린 돈에 이자를 얹어서 갚고 찾아와야만 해요. 이때 전당포에 맡긴 시계를 다시 찾아오는 것을 redemption, 구속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 구속의 개념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신 제도에서도 비롯됩니다. 그때는 농경사회니까 농토가 삶의 기반이겠지요? 올해는 무슨 농사를 지을까 하다가 작년에 누가 땅콩을 심어서 돈을 많이 벌었다더라 하는 말을 듣고 땅콩을 심었습니다. 우선 농협에서 빚을 내서 종자를 사고 비료를 사고 일꾼도 고용해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집집마다 다 땅콩을 심어가지고 올해는 땅콩값이 폭락해 버렸습니다. 땅콩을 캐 봐야 인건비도 안 나오게 됐어요. 1년 내 고생해서 농사를 지었는데 남은 것은 빚밖에 없습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입니다. 땅콩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가진 거라고는 땅뿐이니 이 땅이라도 팔아야 빚도 갚고 우선 입에 풀칠이라도 하지요. 그런데 농토를 팔아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삽니까? 정말 답답한 노릇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에게 친척이 있습니다. 이 친척은 마늘 농사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땅콩을 심는 바람에 마늘값이 폭등했어요. 그래서 마늘을 심은 이 친척은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러면 이 친척에게는 한 가지 의무가 주어지게 됩니다. 바로 농사를 망쳐서 팔아야 했던 친척의 땅을 구속해 주는 일이에요. 판 땅을 언제든지 다시 되무를 수가 있었거든요.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 바로 구속입니다.

고대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지요? 노예가 되는 이유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거나 너무 가난해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팔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번 노예가 되면 자손 대대로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노예가 별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면 주인은 노예를 노예시장에 내다 팔아버립니다. 하지만 노예도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주인이 마음만 먹으면 자유를 줄 수 있는 거지요. 제3자가 그 노예의 주인에게 값을 지불하고 그 노예를 해방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구속의 개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구속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사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했지요? 그러데 그 선택한 아들들이 집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 있어요. 어디 있는가 하면 노예시장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그 아들들을 모아 자기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셔야 했던 겁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었어요. 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지요? 아주 선하게 지으셨어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셨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은 완전히 한 편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용납할 수가 없고 반드시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리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죄악과 멸망의 세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권세 아래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가 선하게 창조해서 교제하던 인간을 잃어버린 것이죠. 그 잃어버린 인간을 다시 찾아오신 하나님의 행위가 바로 구속입니다.

잃어버린 인간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 하나님이 꼭 하셔야 했던 일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야 했던 이유가 바로 죄 때문이었거든요. 그래서 인간에게 굴레처럼 씌워진 죄를 제거해야만 인간이 다시 하나님 편에 속할 수가 있게 됩니다. 7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구속과 동의어로 사용된 단어가 죄 사함이라는 말이잖아요.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구속, 즉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빌린 돈을 갚지 않고서는 전당포에서 시계를 찾아올 수가 없지요. 노예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노예의 몸값을 지불해야만 그 노예를 해방시킬 수가 있습니다. 마귀의 권세 아래로 넘어간 우리를 되찾아 오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대가를 지불하셔야 했습니다. 무엇을 지불하셨습니까? 7절 다시 보세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나님이 지불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헌혈차에 누워 피를 좀 뽑으신 것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과 우리를 바꾸셨다는 의미입니다. 왜 우리를 구속하는 데 그리스도의 피, 즉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은 말하기를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죄를 지은 인간은 그 죄값으로 반드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죽어버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속하시고 다시 자기의 소유로 만드실 수 있습니까? 죽은 시체를 가지고 와서 다시 찾아왔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인간이 죄값을 치루고 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구속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죽이지 않고 구속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인간 대신 죽으면 되는 거지요.

그래서 구약의 제사에서는 누가 죽었습니까? 짐승이 죽었습니다. 소가 죽었고, 양도 죽었습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씩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이 가지고 온 피를 보시고 잠시 인간의 죄를 잊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전당포에 시계를 맡기고 만원을 빌렸습니다. 그리고는 5천원만 가지고 가서 시계를 달라고 하면 전당포 주인이 시계를 내주겠습니까? 우리의 죄값을 치루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값은 인간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인간보다 못한 짐승의 죽음을 대가로 치루고 인간을 구속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4절에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돈 만원이 없어서 전당포에 맡긴 시계를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데, 백만장자인 삼촌이 내 얘기를 듣고는 걱정하지 말라며, 더 비싼 시계를 사 주겠대요. 하지만 나에게는 그 전당포에 맡긴 그 시계가 사연이 있는 시계여서 꼭 그 시계를 되찾고 싶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꼭 그러셨어요. 죄를 짓고 타락한 인간을 다 버리시고 다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 인간을 다시 찾아오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뭔가 더 값진 것을 지불하고라도 인간을 구속하시려 했습니다.

꼭 그 시계를 다시 찾아와야겠다고 하니까 삼촌은 그 전당포 주인을 만났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자동차를 한 대 사줄 테니 그 시계를 돌려 주시겠소?' 겨우 만원짜리 시계를 찾기 위해서 자동차를 사 주겠다는 것입니다. 싫다고 할 전당포 주인이 어디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 지불하신 것은 인간의 목숨보다 훨씬 소중하고 값진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기로 하신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대신 죽겠다고 나선 분이 바로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았고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었다는 표현을 하는데, 피 자체가 죄를 없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metaphor, 즉 은유지요. 구약에서 제사를 드릴 때 짐승에게 상처를 입혀서 거기서 나오는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까? 아니지요. 짐승이 아직 살아있다면 그 피는 의미가 없습니다.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은 그 짐승의 목숨을 가지고 들어간다는 의미예요. 예수의 피로 우리 죄를 씻는다는 말의 뜻은 예수께서 우리가 지은 죄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죽으셨고, 그렇게 죄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죄값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구속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우리에게 이러한 구속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요? 성경은 우리의 구속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라는 말의 뜻은 쉽게 말해서 공짜라는 말입니다. 내가 공사장에 나가서 하루 막노동을 하면 품삯을 받아서 우리 식구가 하루 먹고 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하루는 독감에 걸려서 일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날은 우리 온 식구가 굶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공사장 감독이 그날 품삯을 보내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의미예요. 내가 일을 했다면 마땅히 그 대가로 품삯을 받게 되겠지요. 하지만 일을 안했는데 돈을 받은 것은 은혜로 받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라는 말을 감동의 동의어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설교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경우지요. 이 때는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면 맞는 말이 되겠지요?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깨닫고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맞는 말이지만, 설교가 정말 감동적이었다는 것과 은혜받았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에게 구속을 베풀어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하루 품삯을 공짜로 주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내줄 만큼 풍성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우리의 본문이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둘로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는 문장과 '하나님께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이제 두 번째 문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다고 했습니다. 8절에 보면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셨다'고 했지요? 그래서 그 비밀을 알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번역이 아주 애매하게 되어 있어요.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셨다면 무엇이 넘치게 하셨다는 말입니까?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지혜와 총명으로 뭔가 다른 것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우리 말 성경에서는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셨다는 말로 오해하기 쉽도록 되어 있는데, 우리에게 넘치게 하신 것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지혜와 총명으로'라는 말이 어디로 가서 붙어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영어의 NIV 성경은 이 말을 앞 문장에 붙여서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신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이렇게 번역을 했고, 좀 더 최근에 나온 NRSV 성경은 그것을 뒷문장에 붙여서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이렇게 번역했어요. 헬라어 원문을 보면 문법적으로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어느 번역이 더 타당합니까? 제 생각에는 지혜와 총명으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은 번역인 것 같군요.

중요한 것은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비밀이라는 말은 감취어진 것, 즉 충분이 계시되지 않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알려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는 것이지요. 무엇을 계시해 주셨는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되면 모두 이루어지도록 예정해 놓으신 것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모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계획을 조금씩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마침내 그 예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된 것이죠.

그렇게 하신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말은 모두가 그리스도에게로 모인다, 혹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그 아래 모인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인류구원의 과업을 완성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비록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처참하게 달리기까지 하셨지만, 그 모든 치욕과 희생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속을 완성하신 후에는 다시 온 우주의 왕과 주로서 다스리십니다. 그분이 자신의 목숨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 아래 모였을 때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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