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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짜 (엡 0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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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엡 2:4-10)

1. 공짜가 좋아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가장 눈에 많이 띠는 단어는 '공짜'라는 말입니다. 네티즌들의 정보제공 성향을 분석한 바에 의하면, 자신은 애를 써서 또는 돈을 들여서 획득한 정보나 자료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제공하는 데는 무척 인심이 후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네티즌들의 인심이 후한 이유는 소프트웨어화된 자료의 특징 때문입니다. 이 자료는 다른 사람에게 제공된다 할지라도 없어지거나 손상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본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무궁무진하게 복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제의 용이성 때문에 소프트웨어의 불법복제가 성행하게 되기도 합니다만. 그런데 정보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도 처음에는 공짜 정보로 사람들을 끌어들인 다음, 진짜 중요한 정보는 돈을 받고 팝니다. 그때부터는 공짜가 아니지요.

어쨌든 공짜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성행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공짜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래서 옛말에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나 봅니다. 그처럼 공짜를 너무 좋아하다가는 극약인 양잿물까지 마시게 되는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에 공짜에 대한 경고로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고 했는지도 모르겠구요. 또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공짜인 줄 알고 받았다가 더 큰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그래서 공짜라고 하면 사람들이 우선 의심부터 하게 됩니다. '진짜 공짜일까?' '분명히 무슨 함정이 있을거야.' 공짜라고 해 놓고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대가를 지불하게 해 놓은 교묘한 상술에 속아보지 않은 사람은 얼마 안될 거예요. 또 만약에 그것이 정말로 공짜라면 별 쓸모 없는 물건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괜히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물건 주면서 생색을 내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공짜라고 하면 '그저 그런 것이겠지' 하고 별로 반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원리는 받는 만큼 지불해야 하고, 지불한 만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을 해야 그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아서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능력 되는 범위 안에서 필요한 것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돈이 충분하지 않으면서 값비싼 물건을 외상으로 구입했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겠지요. 그래서 갖고 싶은 물건이 있어도 예산을 초과하면 그림의 떡일 수밖에요.

좋은 것을 가졌다는 것은 그것을 위한 대가를 지불했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에서는 고급 승용차가 그 사람의 성공과 출세의 증거로 사용되는 경향이 많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목에 힘을 주고 다닙니다.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지요. 좋은 집에 사는 사람은 그만큼 열심히 일을 해서 또 저축을 많이 해서 좋은 집을 장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능력과 성실함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훨씬 넘는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물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가령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이 10만원인데 정말 갖고 싶은 다이아몬드 반지 가격이 천만원입니다. 저는 그것을 갖기 위해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을 내 것으로 하는 방법은 밤에 몰래 들어가 훔쳐오는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불법이고 실패할 수도 있으며, 발각되었을 때는 또 그 대가를 치뤄야 할 것입니다. 합법적으로 또 그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그것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바로 공짜지요.

그런데 공짜로 얻는 데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짜는 전적으로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주는 사람은 원하지 않는데 받는 사람 마음대로 공짜가 된다면, 그것은 억지로 빼앗은 것이 되겠지요. 다시 말해서 강도짓이 되는 겁니다. 공짜는 주는 사람이 자기 의지에 따라서 대가를 받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2. 에베소 교인들이 공짜로 얻은 것

에베소 교인들은 과거에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줄을 잘못 서가지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라다니면서 이 세상 풍속을 좇아 허물과 죄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다 죽은 사람들이었단 말이죠. 그렇게 죽었다는 것은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픈 처지와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음받아 존재하게 된 인간으로서 가장 큰 슬픔과 고통입니다. 저주와 형벌만이 그들의 몫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으로 향해야 했던 그들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았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이런 구원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뭔가를 지불해야 했다면 그 구원의 대가가 너무나 커서 지불할 능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이 공짜로 그들에게 주어져야 했습니다. 공짜가 아니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을 훔치거나 억지로 빼앗을 수도 없는 일이지요. 오로지 공짜 외에는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공짜가 되기 위해서는 주는 사람이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은 여기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멸망과 죽음에 처한 비참한 인생들에 대해 하나님은 불쌍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너무나 많아서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공짜로 줄 마음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베푸시면서 하나님은 그것이 오로지 공짜로만 얻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이제 그만 죽고 살아야겠다 하고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데 스스로 기여할 수 공헌도는 0%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살리시는 하나님의 공헌도가 100%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원은 공짜입니다. 만약 구원을 얻는 사람의 공헌도가 1%만 되어도 그것은 공짜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은 공짜라고 해서 사람들을 끌어모은 다음에 숨겨진 가격이 나중에 제시되는 그런 속임수가 아닙니다. 또 공짜라고 해서 그저 그렇고 그런 별 쓸모없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이라서 공짜가 아니면 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시는 분이 긍휼에 풍성하시기 때문에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3. 구원이 공짜인 이유

이처럼 구원이 공짜로 주어진 것은 또한 누구든지 그 구원 때문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대가를 치르고 구원을 얻게 된다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목에 얼마나 힘을 주겠습니까? 자동차만 좋은 것 타고 다녀도 목에 힘이 들어가는데 말이죠.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는 있지만, 마치 내가 잘해서 성취한 것처럼, 또는 무슨 특권이나 가진 것처럼 행세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했다가 망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영적 교만이라고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지요(잠 16:18). 그래서 구원과 영적 교만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적 교만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시기 위해서 구원을 공짜로 주셨습니다.

구원이 공짜이다 보니까 구원을 받는 사람이 그 구원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공짜가 아니도록 만들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공짜로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반하는 행위인 것이지요. 하나님이 구원을 공짜로 주시는데 받는 사람이 자꾸 돈을 내겠다고 하는 셈이지요. 그렇게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는 것이 크신 구원에 비추어 가소로울 뿐 아니라, 공짜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호의와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공짜로 구원을 주시는 것은 그의 크신 사랑을 인한 것이라고 했습니다(4절).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비참한 인생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이미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롬 5:8).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거나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다른 뭔가를 의지하려는 시도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히 공짜입니다. 이것을 은혜로 받는 구원이라고 하지요. 은혜라는 말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매우 귀중한 것을 준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공짜라고 할 수 있지만, 공짜라는 말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뭔가를 더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으려고 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또 우리가 잘못하고 실수했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한다고 사랑하시거나 잘못한다고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선한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는 것입니까? 이런 오해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10절에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올바르게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은 우리가 그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는데 선행이 필요하냐,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고 왈가왈부할 여지가 어디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하나도 안했다고 그것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는 일도 없습니다. 선행과 구원은 인과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행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히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행을 하도록 지으심을 받았고 선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강조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행실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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