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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하나님의 비밀의 전달자 (엡 0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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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하나님의 비밀의 전달자 (엡 3:7-13)

1. 바울이 모든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가 된 이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가장 수고한 사람을 꼽으라면 바울을 말하는 데 다른 의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부르심도 매우 극적이었고, 그의 생애 역시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위한 그의 공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해석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해박한 지식과 명석한 두뇌로 그는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정립했습니다. 신약 성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저술은 구절구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탁월한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서는 그와 같은 빼어난 신학자가 없었습니다. 이제 복음이 증거되어 나가고 이 복음이 확고하게 체계를 세워나가야 할 시점에 이르러 탁월한 신학자가 없다는 것은 대단한 위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는 긴급 수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많이 사용되는 용어가 젊은 피 수혈, 또는 맑은 피 수혈입니다. 워낙 정치판이 부패하고 이전투구를 반복하다 보니까 민심이 돌아섰고, 이대로 가다가는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때묻지 않는 맑은 피를 수혈해서 정치권에 만연한 부패 이미지를 불식한다는 것이지요. 또 참신하고 신선한 젊은이들을 영입해서 구태의연한 정치판을 새로 짜고 세대교체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발상입니다. 수혈을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수혈을 하는 것이 아니지요. 상태가 위독해서 자력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할 때 다른 피를 공급함으로써 생명을 소생시키는 것이 바로 수혈입니다. 그러다 보면 기왕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젊은 피, 맑은 피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리바꿈이 일어나면서 다소 불협화음이 발생하기도 하겠지요.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자들을 훈련시키셨어요. 그렇지만 그 제자들 중에 기독교 신학을 정립할 만한 탁월한 신학자가 없는 것을 보시고 긴급히 바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 때 기존의 제자들에게 상당한 불만이 있을 만도 하지요? 바울이라는 친구는 주님 세상에 계시던 동안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사람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교회가 처음으로 태동해서 막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에 그 싹을 잘라버리려고 덤벼든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렇게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잔해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부르심을 받아서 가장 탁월한 신학자요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이 상당히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보세요. 자기를 복음의 일꾼 삼아주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공헌에 의해서 발탁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복음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다는 것이 분에 넘치는 은혜가 아닐 수 없지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듯이 감히 하나님의 교회를 뿌리뽑으려고 했으니 잡아다가 엄벌에 처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그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수종들도록 일꾼으로 부르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쟁쟁한 선배 사도들을 모두 제치고 기독교회의 신학체계를 완성하는 이 큰 일을 감당하게 하신 것이 얼마나 황송한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모든 성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바울을 모든 성도 중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고, 또 그럴 만한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바울의 겸손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노년에 이르러 그는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합니다(딤전 1:15). 바울처럼 경건하고 실수 없이 하나님을 섬긴 사람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죄인 주의 괴수라는 것입니까?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평가함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평가를 받을 때 절대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지 상대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입학정원을 정해 놓고 치르는 시험에서는 내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어도 다른 사람들의 성적이 더 나쁘면 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점 이상 맞아야 합격할 수 있는 자격시험에서는 다른 사람이 몇 점을 맞든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내가 몇 점을 맞느냐 하는 것에 따라 합격, 불합격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실 때 누구보다 낫기 때문에 합격이고 다른 사람보다 못하기 때문에 불합격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 그것과는 전혀 별개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하고 바라볼 때도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서 있는가를 보아야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는데 나는 그보다 낫다, 혹은 못하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그 김집사보다는 낫다.' '내가 비록 죄가 많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가벼운 편이야.' '우리 교회에서 내 믿음이 최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평가와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고, 되지도 않는 자기의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을 의롭다고 하거나 교만에 빠지게 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바울이 다른 사람과 비교된다면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의롭고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평가를 거부하고 모든 성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신을 평가하며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비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받으시고 그 낮아진 마음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비밀을 위임받은 교회

그렇게 바울을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신 목적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은 그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사실이지요. 과거에는 감추어져 있었던 비밀,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된다는 이 비밀을 널리 공개하기 위해서 바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교회를 통해서 알리시겠다고 합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혜들을 알리시려는 것은 영원부터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이 비밀, 복음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나 놀라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지혜를 받아서 전달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지혜가 효력을 나타낼 수가 없지요. 그 하나님의 구원을 맡아서 관리하는 대리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 지혜의 전달자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중요성과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교회에게 복음을 맡기기로 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에게 이 복음을 맡기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지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가리켜 구원의 방주라고 부르기도 하고, 성도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로지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지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 그 교회를 통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 나오지 않으면서도 예수를 믿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또 예수를 믿지만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없어서 교회에 소속되지 못하고 혼자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형편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또 이단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들은 교회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 밖에 있습니까?

천주교에서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할 때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천주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천주교 이외의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고 천주교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무형교회를 말합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천주교니 장로교니 감리교, 침례교 하는 제도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우리 눈으로 판단할 수 없는 불가견교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장로교에 구원이 있고 앵글리칸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장로교회에 소속해 있는 사람들 중에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천주교회에나 이단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단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있을 확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있을 수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이처럼 누가 구원받고 구원받지 못했는가 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을 모아놓은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이나 공산국가에서 박해를 피해 혼자서 몰래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는 사람도 당연히 이 교회에 포함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교회 밖에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또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이 교회를 부정하고 의도적으로 교회에 소속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교회 밖에서 구원 얻을 수 없다는 이 공식을 적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또 넓게 본다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다른 어떠한 종교적 제도나 행위를 통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내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예정하신 것이 바로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리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교회를 섬길 수 있고 더 나아가 교회를 위하여 희생하고 고난을 받게 된다면 부끄럽고 낙심할 일이 아니라 우리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이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고 그 지혜를 선포하는 교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교회를 섬기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그 구원을 품고 소유한 기관으로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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