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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려라 (엡 0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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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려라 (엡 3:14-21)

1. 교회를 위한 기도

이 단락 역시 '이러하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라는 말인데, 어떤 이유인가 하면 13절에 바울이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고 에베소 교인들을 위로했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 에베소 교인들이 낙심치 않게 하기 위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하여 바울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빈다고 말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듯이 복음의 씨를 뿌려 그 결실로 나타난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간절한 사랑과 염려가 이 한 마디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믿음이 연약한 에베소 교인들이 바울이 당하고 있는 환난 때문에 낙심하고 실망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 상황입니다.

우선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갈수록 심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박해가 자기들에게까지 미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붙잡혀서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면, 머잖아 에베소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잡아가고 핍박하는 사태가 분명히 닥칠 것입니다. 그 박해가 닥쳤을 때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을 사람들이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박해를 이기지 못해 믿음을 버리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서 이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요.

뿐만 아니라 바울의 환난은 자칫 믿음이 약한 에베소 교인들에게 큰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에게 그런 환난이 닥칠 수 있는가?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어떻게 자기 일꾼이 그 지경에 이르기까지 바라만 보고 계실 수 있는가? 그래서 그 하나님은 정말 믿을 만한 분인가? 이런 여러 가지 의심과 불신이 생겨나지 않겠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환난이 오히려 에베소 교인들의 영광이라고 했지만, 정말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게 되려면 그들의 믿음이 더욱 성숙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자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위로를 얻고 믿음의 성장도 이룰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바울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보세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족속이라고 하면 민족의 개념으로 생각되기 쉬운데, 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은 이 단어를 가족(family)으로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파트리아(patria)인데, 민족이라는 뜻보다는 가족, 가문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을 받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가족 구성원들이 누구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입니다. 그 중의 어떤 이들은 벌써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광 중에 거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이 에베소 교인들처럼 아직 땅에 거하면서 장차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한 가족에 속하게 되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지역교회를 형성하고 있지만, 하늘에 있는 가족들과 아직 땅에 있는 가족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커다란 가족에 포함되는 구성원인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가족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출신일 것이고, 아직 땅에 있는 가족들은 대부분 에베소 사람들과 같은 이방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가족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고, 하늘에 있는 자와 땅에 있는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같은 이름이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교회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속해 있는 에베소 교회가 지금 닥친 바울의 환난이라 앞으로 그들에게 다가올 박해를 인하여 낙심하거나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바울의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있는 것이지요.

2. 교회를 위한 삼위 하나님의 사역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붙드시고 지키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여기에 보면 교회를 위한 일에 삼위 하나님이 모두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십니다. 교회를 통한 인간의 구원계획과 그 주도권이 모두 성부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성부께서 교회를 도우시고 돌보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이후로 성령께서는 교회를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고 하신 우리 주님의 약속에 따라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품어 안으시는 일에 성령께서 성자 하나님과 교대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그 이전에는 활동을 안 하신 것이 아니고, 또 지금은 성령께서만 활동을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역사로 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는 것은 그렇게 해서 성숙한 믿음을 통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그들 마음 속에 거하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어야 합니다.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구원이 성취되었고, 그 구원에 이른 사람들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교회라고 하고 성도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거하시지 않는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교회의 핵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교회가 성립되고 그리스도가 계셔야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 하신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제자 요한은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한다는 이 상호거주(mutual dwelling)의 사상을 많이 피력했습니다. 바로 교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지요.

옛날 인도에 왕비를 무척 사랑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왕비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슬픔에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던 왕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죽은 왕비의 시신을 담기 위한 아름다운 궁전을 지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비의 시체를 담은 관을 놓고 그 위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왕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가장 값진 재료와 최고의 기술을 동원해서 궁전을 지었습니다. 오로지 그 왕비를 위한 마음에서입니다. 그렇게 한창 공사를 하던 중 공사장에서 웬 낡은 궤짝이 왕의 발에 채였습니다. 가장 값진 재료들만 갖다가 공사를 하고 있는데 낡은 궤짝이 웬일입니까? 왕은 이 궤짝을 밖에 내다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공사는 계속되었고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타지마할이 그렇게 해서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왕비의 시신을 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궁전 자체에 정신을 쏟다보니 본래의 목적이었던 왕비의 시신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고, 그를 우리 마음의 왕좌에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루신 구속과 구원을 받아들임이며, 또한 그를 우리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 그를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가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3. 사랑 가운데 뿌리를 내려라

그런데 왜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교회를 세우시고 사람들을 교회에 속하게 하셔서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동기와 원인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혀 터가 굳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를 나무에 비유한다면 교회라는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좋은 땅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사랑에 깊이 박히고 그 터가 단단해졌다면 어떤 폭풍이나 시련에도 요동치 않고 견디며 잘 자라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시련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가에 깊이 침잠해 있는 교회라면 아무리 핍박이 심하고 무서운 환난이 닥쳐도 능히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많은 비난 중 하나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경과는 내버려두고 나타나는 결과만 본다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우선 교회 안에서조차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소란 때문에 우리 마음이 상하고 슬퍼지는데, 하물며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어요? 물론 저마다 내세울만한 이유는 있습니다. 정의를 내세우기도 하고 명분을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잇속을 챙기느라 그런 일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런 이유들이 사랑보다 크기 때문에 그런 분쟁들이 발생하는 것 아니겠어요? 교회가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은 명분과 잇속보다도 사랑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셔서 세우신 교회,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죄인들, 이것이 교회인데, 그 교회가 사랑에 근거하지 못하게 되면 교회의 모습을 상실해 가는 것이지요.

우리를 교회 삼으신 그 주님의 사랑은 지식을 훨씬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우리 지식으로 평가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이라면 우리의 명분이나 이익이나 어떤 것도 초월하지 않겠습니까? 그토록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충만하실 것입니다. 그들에게 담대함도 주실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과 환난도 견뎌낼 만한 믿음에까지 자라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을 굳이 해석하느라 여기저기에 갖다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얼마나 넓은지 온 세상을 다 커버하고 그 길이로는 온 역사를 커버하고...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 사랑은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인데 우리가 우리 지식으로 그렇게 꿰어 맞춘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다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깨닫고 올바른 교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교회 안에 영원무궁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름만 주사랑교회가 아니라 참으로 그 주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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