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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에로의 부르심 (엡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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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에로의 부르심 (엡 4:1-6)

1. 부르심 이후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에베소 사람들을 부르셨는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부르심의 결과는 어떤 것인지 자세하게 말했습니다. 그 부르심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일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자원해서 '나 좀 불러주십시오'하고 나설 일이 아니지요. 또 그 부르심의 성격을 에베소 사람들이 바꿀 수도 없습니다. 이 부르심이 마음에 안 드니까 다른 부르심으로 바꿔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르심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죄악과 멸망으로부터 벗어나 구원과 영생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의 수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는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일단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다음에는 에베소 사람들의 역할과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이제 공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넘어왔다고나 할까요? 부르심 그 자체는 완전한 하나님의 행위이지만, 그 부르심 이후에 그에 합당한 삶은 사는 것은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베소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에베소 사람들은 교회 안에 속한 사람들로서의 삶의 태도와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라고 권면하는데, 권면하는 자신을 뭐라고 부르는가 하면 주 안에서 갇힌 바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중요한 부탁을 할 때는 추천서가 필요할 경우가 있지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추천은 어느 정도 부탁을 받는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또 왕명을 전달하는 사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습니다. 그 사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왕에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갇혔다는 말은 물론 주님 때문에 지금 감옥에 갇혀있다는 말이지만, 바울은 내가 주님에게 붙잡힌 사람, 주님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두며 날뛰다가 주님에게 그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 후 바울은 자신이 자유인이라기보다 주님의 섭리와 은혜에 붙잡힌 포로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권면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권위가 바로 주님의 포로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권위로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권위로, 그리스도에게 포로로 잡혀서 그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너희에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큰 마음을 먹고 창세 전부터 예정하신 대로 이 에베소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부르셨는데, 이 사람들이 마치 교회 밖에 있는 것처럼, 과거에 살던 모습대로 이 세상 풍속을 좇으며 살아간다면,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어요? 자, 그래서 이제부터 바울은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에베소서 1-3장이 부르심에 대해 설명한 것이라면, 4-6장은 부르심 이후의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1-3장이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라면, 4-6장은 교회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울의 많은 책들이 이런 패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교리에 관해 설명하고, 후반부는 그 교리에 근거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2. 부르심에 합당한 삶

그러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2절부터 말하고 있지요? 우선 겸손과 온유한 삶입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쩌면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미덕일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나 노력은 0.1%도 없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겸손 말고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찌 감히 하나님 앞에서 높아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첫 번째가 바로 교만한 눈이라고 했어요 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지요(잠 6:16-18). 사람이 교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높으심과 주권에 도전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 주님이 가장 싫어하셨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교만한 사람들이었지요. 또한 이 교만은 교회의 하나됨과 평화를 해치는 악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교만이 절대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겸손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미덕이라면, 온유함은 우리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할 수 없고 겸손히 행하여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형제들을 대할 때 포악하고 거칠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똑같이 지음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잘못했다면 나도 똑같이 잘못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온유하지 못하고 난폭하게 구는 것은 내가 더 잘났고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는 교만이지요.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했습니다(빌 2:3). 어떤 분은 농담으로 그러더군요. 교회 안에서 서로 잘났다고 싸우게 되는 것은 우리 한국말에 있는 문제 때문이라구요. 사람들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기라'로 읽으니까 내가 남들보다 더 높고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늘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서로 좋을 때야 얼마든지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겠지요. 그러다가 한번 틀어져서 사이가 벌어지면 온유한 태도와 친절한 말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본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모든 일에 겸손과 온유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온유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가 유사시에 그 가면을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면 속의 본래 모습이 온유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온유하다가 서로 싸울 일이 있을 때에도 온유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싸움이 싸움 같지도 않겠지요? 이것이 교회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또 사도는 말하기를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사랑은 오래참는다고 했지요? 서로 용납하는 데는 오래 참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한번 잘못했을 때 참고 용납하고 두 번 잘못했을 때도 참고 용납하고, 그렇게 해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참고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지키기 힘든 일만 골라서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저 적당히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말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규범들은 너무 수준이 높아서 어차피 우리 같은 죄인들은 다 지킬 수 없는데, 그럴 바에 교회가 좀 더 관용을 베풀어서 그 규범의 수위를 낮추어 주는 것이 우리의 죄책감도 덜하고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규범을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 당연히 오른쪽 차선으로 차를 몰고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뉴질랜드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큰일이 나지요. 그렇다고 왜 힘들고 헷갈리게 왼쪽으로 다니도록 했느냐고 따질 것입니까? 에베소 사람들이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추종할 때는 세상풍속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당연히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전에 따르던 세상 풍습과 다르다고 좀 완화시켜 달라거나 못지키겠다고 버티겠어요?

3. 하나됨을 지켜야 할 교회

사도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교회 안에서 평안의 줄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교회가 하나인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몸에서 한쪽에서는 이렇게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저렇게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또 그 교회를 관장하시는 분이 두 분이 계셔서 서로 의견충돌이 있거나 하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는 천국에 갈 소망를 가지고 있고 어느 교회는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가 섬기는 주님이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주님에 대한 믿음도 하나이고, 교회에 소속되는 표시인 세례도 하나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하나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만약 다른 주님을 섬기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이 하나의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통일교에서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통일교와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몰몬교에서 믿는 것과 우리의 믿음이 동일합니까? 믿음이 같지 않으면 하나의 교회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 하나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을 포함시키게 되면 그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를 병들게 하고 불순하게 만드는 일일 뿐입니다.

20세기는 교회의 일치를 위한 운동의 세기였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나누어진 교회들이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여러 노력들이 시도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된다는 것이 최고의 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다르고 소망도 다르고 섬기는 주도 다른 집단들마저 모아서 하나로 만들려는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분명한 목표지만 용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분명히 구별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 하나인 교회를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일도 너무 많습니다. 교회가 하나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평안이라는 줄로 잘 묶어야 해요. 우리의 욕심이나 질투, 어리석음 같은 것이 이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가 되게 하려고 애쓰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깨뜨린다면 우리가 무슨 낯으로 성령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 앞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오늘날에도 교회는 이 일치와 분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한 성령, 한 소망 안에서 하나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다르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는 절대로 하나의 교회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몸에 붙어 있는 거머리들을 떼어내는 일입니다. 하나되는 것을 위해서 그것을 용납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본질과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가장 부끄럽고 있어서는 안될 모습은 한 성령, 한 소망 가운데 있으면서 우리가 그 하나됨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몸을 부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직 이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를 통해서 성령께서 교회의 하나되게 하시는 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가를 깨닫고 이 하나됨을 잘 지키는 교회로 거듭남으로써 그 상처를 회복하고 주님 앞에 바로 서는 교회가 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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