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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각 사람에게 주신 분량 (엡 0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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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에게 주신 분량 (엡 4:7-12)

지난번에 살펴본 4장 1-6절까지는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이 교회 외에 다른 교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이 교회가 하나됨을 위하여 부단히 애써야 합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평안이라는 줄로 힘써 지키라고 했지요? 성령께서 교회를 하나되게 하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깨지거나 부서진다면 우리 잘못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이고, 우리는 그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1. 교회 안의 직분

그렇지만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모든 교회가 같은 공장에서 나온 제품들처럼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서 있어서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교회의 다양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는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와 침례교회가 다르고, 감리교회와 성공회도 다릅니다. 교회가 하나되어야 한다고 해서 장로교가 침례교에서처럼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거나, 감리교가 성공회처럼 캔터베리 대주교를 수장으로 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각자 다르고 교회 안에서도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서로 다른 분량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성격이 다르고 기호가 다른 것처럼, 각자 받은 교회 안에서의 직분이 다릅니다. 이렇게 각 사람에게 주신 것이 다르기 때문에 교회의 다양성은 필연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에서 예외가 된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 속하게 된 성도라면 모두가 다 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구원해 주신 은혜 위에 각 사람에게 주신 직분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다른 분량의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직분이 다르다 보니까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되겠습니까? 내가 받은 직분이 더 좋은 직분이라고 서로 우기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좋은 직분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이 일어나게 되겠지요. 그리스도의 교회가 여기저기에 세워지면서 어디에서나 이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다양한 은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했지요? 이 에베소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 같은 교회 안에서 누구는 장로 시켜주고 누구는 집사밖에 안 시켜주나 하고 따지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왜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다른 분량의 선물을 주셔가지고 다툼이 일어나게 하십니까? 그 선물과 또 그것을 주신 분이 어떤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봅시다. 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위로 올라가실 때라고 했는데, 즉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구속이라는 사명을 다 이루시고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셨을 때지요. 그리고 사로잡힌 자들이란 구원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포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여러 차례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갇힌 자, 즉 그리스도의 포로라고 말했지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이루신 다음에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덤으로 선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물을 주신 분은 땅에 내려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분, 즉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습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인데, 그 선물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다르다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그저 그 선물 주신 것을 감사하고 그 선물을 잘 활용해서 충성을 다하는 것도 부족할 처지인데, 선물이 다른 사람과 다르니, 내 것이 더 나은 것이니 하고 왈가왈부한다는 게 있을 수나 있는 일인가요? 우리에게 주신 직분이 어떤 것이든, 그것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 그 직분을 주신 주님의 뜻에 따르는 일입니다.

2. 어떤 직분들을 주셨는가?

여기서 언급되어 있는 직분들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사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입니다. 이 사도들은 예수님의 대리인으로 주님의 사역을 이어받아서 수행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교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그 누구도 사도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증거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반복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도의 직책도 반복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사도직은 교회시대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직은 비상직분이라고 하는데, 즉 항상 있는 직분이 아니라 당시에만 있었던 직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 사역의 계속성은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 바로 사도의 사역을 계승하는 일인 것입니다.

다음에 언급된 것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도 사도와 마찬가지로 비상직분입니다. 지금은 선지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물론 선지자의 역할은 지금도 교회에 의해서 수행되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소위 예언기도를 한다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래에 될 일을 특별한 목적 때문에 미리 알려 주실 수는 있지만, 이처럼 예언기도하고 투시한다는 것은 자칫 기독교의 수준을 무속신앙의 수준으로 떨어뜨릴 염려가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겠는지 알아봐 달라고 기도부탁을 하기 위해 예언기도하는 분을 찾아다닌다면 점쟁이 찾아가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예언한다는 사람들이 선지자의 사역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해지요. 선지자들은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권력층과 부패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범죄에 대하여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느라 장래 일을 예언한 것이지, 미래를 예언하고 알아맞추는 것이 선지자의 본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불의와 죄악에 대하여 항거하고 소리를 높혀 싸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지금 선지자는 없지만 선지자적 사역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으로 복음 전하는 자가 언급되었습니다. 사도도 그렇고 선지자도 그렇고 결국을 복음을 전하는 자이겠지만, 특별히 복음 전하는 자가 따로 언급된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긴급하게 필요한 직책이 바로 이처럼 복음 전하는 일에 발벗고 나서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은 대표적인 전도자였고, 사도 바울 역시 풀타임 전도자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한가하게 교리논쟁을 할 단계가 아니라 긴급하게 복음을 들고 사방으로 나가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특별한 전도자들이 나타났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 복음 전하는 자라는 직분 역시 사도나 선지자처럼 비상직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고 풀타임으로 복음 전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선교사를 이 직분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꼭 선교사뿐만 아니라 온 교회가 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급된 직분이 목사와 교사입니다. 이것은 목사와 교사의 두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와 교사라는 하나의 직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어 배울 때도 이와 같은 문법이 있는 것을 보는데, the pastor and the teacher라고 하면 두 사람을 말하지만, the pastor and teacher라고 하면 한 사람이 목사와 교사인 경우를 말합니다. 그래서 목사와 교사는 하나의 직책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목사는 지금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를 항존직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헌법에서 목사와 장로를 항존직이라고 명시해 놓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오해가 종종 있는 것을 봅니다. 요즘 목사와 장로의 임기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만만치 않게 거론됩니다. 그럴 때마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뭔가 하면 목사와 장로는 항존직인데 어떻게 임기를 정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항존직이란 항상 있는 직책, 즉 주님이 오실 때가지 존재하게 될 직책이라는 뜻이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하는 식으로 한번 목사나 장로는 영원한 목사나 장로를 의미하는 평생직이 아니거든요. 목사가 시무하다가 사정이 생기면 그만 둘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목사가 적성에 맞지 않다. 하나님이 다른 일로 부르신 것 같다.' 이렇게 생각되면 목사 그만 할 수 있는 거예요. 학교 선생님 하다가 자기 적성에 맞지 않거나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선생님 그만 두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분위기는 목사가 그만 둔다면 사명을 저버렸다는 식으로, 마치 파계승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목사로서 하나님이 부르셨다면 소명감을 가지고 일하지만, 아무리 해도 나는 목회에 소질이 없다, 내가 목회하면서 양들을 잘 인도하기는커녕 상처만 주고 문제만 일으켰다, 혹은 목회하는 것이 내 체질이 맞지 않다, 이렇게 확신이 되면 두말 없이 그만 둘 것입니다. 그리고 장사를 하든지 학교 선생이 되든지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야겠지요. 그리고 교회에서는 집사로 주님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3. 직분의 목적

이처럼 여러 가지 다양한 직분들이 주어졌는데, 이것들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케 한다는 말은 의학적 의미로 외과의사들이 골절된 수족을 다시 맞추고 어긋난 관절을 다시 제자리에 맞추는 경우에 사용된 말입니다. 또 정치적 의미로는 정치적으로 대립된 당파들이 화합하고 서로 합칠 때 사용된 말입니다. 교회 직분을 주신 목적은 신자들을 잘 가르치고 인도해서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직분은 이처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섬기기 위한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직분의 두 번째 목적은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섬김을 받으려 할 때 교회는 병들게 됩니다. '내가 목사인데 사람들이 목사를 뭘로 아는 거야? 사람들이 장로 대우할 줄을 몰라.'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직분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봉사하며 섬기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그것을 주신 주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서 직분을 주셨습니다. 교회 안의 여러 가지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각 지체로서 자기 맡은 일의 책임을 알고 서로를 인정하고 도울 때에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직분을 가지고 교만히 행하거나 화합하지 못하면 오히려 직분자들 때문에 교회가 무너집니다. 교회의 직분은 교회의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위해서 주신 것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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