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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엡 04: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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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엡 4:17-24)

1. 엄청난 변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달라진 것, 혹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일요일에 놀러 가는 대신 교회 가는 것입니까? 그렇지요. 남들은 일요일에 늦잠을 자거나 등산을 가든지 낚시를 가든지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교회로 가야 합니다. 한번은 토요일 아침에 한글학교 가라고 우리 한솔이를 깨웠더니 이 녀석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학교 가느라 일찍 일어나야지, 토요일에는 한글학교 가야지, 일요일에는 교회 가야지, 도대체 아빠가 자기 쉬는 시간을 다 뺏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 안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남들 일할 때 같이 일하고, 남들 쉴 때는 교회에 가서 또 일하느라 일주일 내내 쉴 날이 없으니까요.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남들과 다른 것이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는 것, 그나마 성실하고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이 된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그만한 일은 굳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교회 안으로 부르셨는가 말한 다음에,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방인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말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가 중생(重生, born again)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다시 태어났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과거에 가지고 있던 모습에다가 새로운 요소를 첨가해서 새 것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라는 말에서처럼 옛날의 것이 완전히 없어지고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근거는 갈라디아서 2장에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내 자아가 그렇게 죽어버린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나의 성품과 모습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첨가된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으로 완전히 대체된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뭔가 하면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는데도 아직 옛날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순이지요. 네모난 동그라미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동그라미는 절대로 네모의 형태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다시 태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기 이전의 성향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동그라미가 네모 형태를 가진 것과 같습니다. 동그라미가 동그라미 되기 위해서는 네모의 모습을 완전히 청산해야지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옛사람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네모난 동그라미처럼 옛사람을 포함한 새사람, 이전 것이 남아 있는 새로운 피조물, 이런 식으로 어정쩡한 모습을 갖게 되겠지요.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벗어버려야 할 옛사람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방인의 모습, 그리스도인들이 벗어버려야 할 옛사람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세요.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허망하다는 것은 생각이 허망하다는 것이고, 허망하다는 것은 텅 비었다는 뜻인데, 철학에서 말하는 허무주의를 의미하는 것보다는 쓸데없는 것, 부패한 것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의미없는 것을 추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데, 거듭난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세속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일들을 한마디로 의미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라든지, 화해와 용서를 주장하는 사람들, 고통과 좌절이 있는 곳에 찾아가 치유와 희망을 전하는 일들... 이처럼 예수 안믿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 중에도 고귀하고 의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타락하고 부패한 생활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서 자기 아들 손가락도 자르고 자신의 발목도 잘라버리는 세상입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래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위해서라면 지역감정을 유발한다거나 색깔론을 들고 나온다거나 무책임한 폭로주의, 근거없는 비방과 모략 등등... 못할 짓이 없습니다. 마음이 허망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번에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신당이 부산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다 영도다리 아래 빠져 죽자.' '김대중 대통령이야말로 지역감정의 괴수 중의 괴수' 이런 식으로 막가파식의 발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고 연일 신문에서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면 부산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부산중앙교회의 열심있고 믿음 좋기로 유명한 장로님이에요. 그것을 보면서 옛사람을 벗는다는 것이 참 쉬운 일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더 하게 되더군요.

이방인들은 또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무지, 즉 진리에 관한 한 무식쟁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그리스 사회의 학문이 얼마나 발달했었습니까? 최고의 철학자들을 배출했고,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외에는 다른 것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을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했던 사회였습니다.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그처럼 애쓰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들은 진리에 관한 한 무식쟁이였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서 진짜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역사상 최고의 지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의학, 인문학, 사회학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 있어서는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요. 버틀란드 러셀이라는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기독교 반박서를 썼고,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던 볼테르도 '100년 후에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인터넷의 종교 관련 싸이트의 게시판을 보면 기독교를 비방하는 글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학문이 발달하고 지성은 최고도에 이르렀지만, 진리를 아는 지혜, 하나님의 생명을 깨닫고 발견하는 데는 그 이상의 무식쟁이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 이런 사람들의 형편이 어떤 것입니까? 감각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감각 없는 것이 필요하고 좋을 때도 있습니다. 수술할 때 마취를 하지요. 저도 치과에 가서 몇 번 마취주사를 맞아 보았는데 입이 내 입이 아니더군요. 한하운이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문둥이였어요. 그래서 문둥이의 슬픔과 분노를 시로 썼습니다. 그 시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북간도 땅을 걸어갑니다
보리가 패는 밭고랑에 앉아 다리 쉼을 합니다
땀에 절은 양말을 벗습니다
탈탈 털어내니 잘리운 발가락 하나가 툭 털려 나옵니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발가락을 보면서 남아 있는 발가락 형제를 만지작거립니다
언제 또 잘려 나갈지 모를 형제들입니다
발가락이 잘려 나가도 아픔을 모르는 문둥이입니다

감각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죄와 운명에 대하여 아무런 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살을 꼬집으면 아프니까 그만두지요. 그러나 꼬집어도 아프지 않으면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자꾸 꼬집게 됩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죄악과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당장 돌이켜서 회개와 생명의 길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악 가운데 행하며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지요. 감각 없는 자들의 운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감각을 잃게 합니다. 한번 빠지고 두 번 빠지면서 그 심각성을 더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서 나중에는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계속 행하게 만듭니다. 혹시라도 우리에게 아직 그런 감각없는 자 같은 삶의 모습이 남아 있지는 않는가 늘 경각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새사람을 입으라

만약 우리에게 아직도 이러한 옛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다면 보통 일이 아니겠지요?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그렇게 살았을지언정,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로 온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죄악과 멸망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한 옛 생활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예수를 만나면서 중생, 즉 거듭나게 되었고,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바뀐 우리의 신분, 우리의 운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당연히 거기에 맞는 삶이 이어져야 할 것인데, 자칫 한눈을 팔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그 옛날 습관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면 옛사람의 모습이 불끈 솟아납니다. 우리가 늘 절제하고 자신을 쳐 복종하는 훈련에 게으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과거에 다 버린 줄 알았던 옛날의 습관들, 옛날에 좋아하던 잘못된 행동들이 막 나오게 되지요.

그리스도 안에 진리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그 놀라운 일들, 그 사랑과 구원에 대해 우리가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어찌 다시 그 옛날의 추하고 저주스러운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신분이 새롭게 되었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니,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이 말은 '새로운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각오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옛사람이 우리를 주관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새로운 마음을 단단히 품고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받은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실제로 우리 삶에서 일어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분노와 시기, 탐욕 같은 옛사람의 모습을 뿌리뽑고, 마음을 새롭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새롭게 다시 지으신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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