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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엡 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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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을 본받으라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변화된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이냐 하는 얘기를 하다가, 좀더 명확하게 누구처럼 되어야 할 것이다 하고 말하면 이해하기가 쉽겠지요? 즉 샘플을 제시하고 그 샘플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바울은 변화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누구를 샘플로 제시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근거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과거에 우리의 아비 노릇을 했던 마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아무리 돌연변이가 있다 할지라도 부모의 모습은 어찌됐든 자녀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얼룩말에게서 사자 새끼가 나올 수 없고, 아무리 오리를 엄마로 알고 따라다녀도 백조 새끼는 오리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키우면서 그런 것 느끼지 않으세요? 저는 우리 아이들이 자랄수록 저를 닮아가는 것을 보면 신기해요. 좋은 것만 닮았으면 기특할텐데 안 좋은 것도 닮는단 말이죠. 저의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하나는 늦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늦잠을 잘 수밖에 없는 것이 밤에 잠이 안 오거든요. 그래서 저는 올빼미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늘 들어왔던 얘기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래에도 나오잖아요?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지금 아이들도 그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노래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어요.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하면서 나를 잠꾸러기, 나쁜 애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나 때문에 우리나라가 나쁜 나라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비난을 나에게 퍼붓는 것 같단 말이죠. 그래서 처칠 같은 훌륭한 사람도 늦잠을 잤다는 얘기에 위로를 얻기도 하고,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말로 늦잠 자는 것을 변명하기도 해 보았지만, 이 세상은 늦잠 자는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말처럼, 일찍 일어나야 약수터에도 갈 수 있고, 조기축구도 늦잠 자는 사람에게는 딴 세상입니다. 또 군대에 가면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고, 또 교회에서는 새벽기도도 해야 되고 말이죠. 그래서 저녁에 일찍 자려고 누워도 잠이 안 오는 걸 어떡합니까? 저녁에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면 인생이 힘들 수밖에 없더군요. 그런데 우리 한솔이가 저녁에 잠을 안자는 거예요. 침대에 들어가서도 한 시간 이상을 꼼지락거립니다. 참 이 녀석도 인생이 힘들겠구나 하면서, 닮아도 왜 그런 걸 닮는지 참 피는 속일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이처럼 자녀는 부모를 닮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하나님을 닮으라고 하면 지레 겁부터 날지 모르겠어요. 반에서 꼴찌하는 애한테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라고 하는 격이죠. 우리한테 이순신 장군이나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만 닮으라고 해도 부담이 될텐데 감히 하나님을 닮으라니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지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이순신 장군이나 슈바이처 박사를 닮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시고 가장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닮는다면 이 땅의 어떤 위대한 인물이나 정신을 본받는 것이 문제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으로서 우리와 같은 인생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성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보다 인성을 가지고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하지요?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의 얼굴을 닮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품을 닮는다는 것인데, 그의 성품은 뭔가 하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그리스도에게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실천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고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과 사랑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로 외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으로 얼마나 실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되겠지요? 사랑의 실천은 용서입니다. 미움과 쓴 뿌리를 사랑으로 이겨냈을 때 용서가 생겨납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에 대한 용서로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라면 우리도 우리의 형제, 우리의 이웃, 나아가 우리의 원수까지 용서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희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 즉 희생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지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손해날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에 대한 기만입니다. 사랑은 손해보다 훨씬 위대하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행할 때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구제할 수 있게 되고, 나의 손해와 희생을 기쁨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또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행할 때 자신을 버리신 주님처럼 우리도 낮아져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변화된 모습입니다.

2. 부정한 것을 멀리하라

율법에서 하나님은 음식이나 물건, 몸의 특정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부정한 것들을 규정하시고 그런 것들을 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돼지고기는 부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먹으면 안됩니다. 부정한 돼지고기를 먹으면 먹은 사람도 부정하게 됩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깨끗하지 않다는 말이지요. 왜 돼지고기를 먹으면 부정하게 됩니까? 실제로 우리가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합시다. 무엇이 더럽게 되었습니까? 아무것도 더러워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에게 그것은 똥에 빠진 것보다 더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율법으로 부정한 것들을 규정해 놓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성결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 계시가 불완전하고 수준이 낮았던 당시에는 백성들이 먹는 음식의 구별, 특정한 물건을 만지지 않는 것 등을 통해서 부정을 입지 않고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정결해질 수 있습니까? 죽은 시체를 만지지 않으면 우리가 깨끗합니까? 우리의 깨끗함,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성결은 그런 부정한 음식이나 물건을 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정결함을 지키기 위해 멀리해야 될 부정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여기서 그 부정한 것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3절 보세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돼지고기를 생각도 하기 싫어할 만큼 멀리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을 지키기 위해 이름이라도 부르지 않아야 할 만큼 멀리해야 할 것들이 바로 이것들입니다. 성도, 즉 거룩한 무리,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는 이 부정한 것들이 언급도 되지 않을 만큼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런 문제가 핫 이슈가 되어 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 인간의 이성이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되면서 인권의 발견이라는 개가를 올리게 되었고 이것은 시민사회의 형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군주의 절대권력에 대항해서 시민들이 자기 주장을 펴게 되었고, 소외되고 멸시를 당했던 집단이나 부류의 사람들이 자유와 개성을 부르짖으며 떳떳이 활보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한 부류가 동성연애자들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행위를 명백히 죄악으로 규정했고, 이스라엘은 그런 사람을 죽여 그 죄악을 백성 가운데 제거해야 했습니다. 근대 이전에 이런 사람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고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권이 신장되면서 이런 사람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목소리를 높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태어난 것이 무슨 죄냐? 그렇게 태어난 것만도 서러운데 왜 그런 학대와 손가락질을 당해야 하느냐는 것이죠. 그러다가 급기야는 그것도 자기들의 권리이며 다른 사람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신성하게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인간존중 사상, 인권사상은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권사상이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을 학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엄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분명히 죄악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근대의 교회는 이 두 가지 사상에 의해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인권을 존중해야 하느냐, 죄악을 제거해야 하느냐? 결국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죄의 개념을 변형하고 약화시켰습니다. 이처럼 부정한 것들에 조금씩 문호를 개방한 결과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세계교회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는 문제가 바로 동성연애자의 성직임명, 또는 안수 문제입니다. 이것으로 세계의 교회가 나누어져서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극단적인 예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교회 안에서 부정한 것들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졌다는 것이지요. 4절에서 바울은 부정한 것들을 계속 언급합니다. 누추함, 좀 지저분한 언행을 말합니다. 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 쓸데없는 농담이나 음담패설, 이런 것들은 다 우리가 멀리해야 할 부정한 것들입니다. 성도의 입에서 늘 감사하는 말이 나와야지요.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 자녀들이 악한 길로 가지 않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원하시겠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강조해서 말합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들이 패륜아가 되어 부정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닌다면 사랑을 쏟은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거룩하고 순결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 거해야 할 빛의 자녀들이 어떻게 어두컴컴한 곳에서 부끄럽고 부정한 것들을 만지며 그것들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사랑을 입은 자녀로, 빛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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