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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전자전, 부자유친 (엡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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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삶을 규정하는 인간관계의 두 번째는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입니다.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가 가정인데, 가정은 부부의 결합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가정은 부부의 결합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발생하는 자녀의 출산으로 완전한 가정을 이루게 되지요. 그래서 필연적으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그 구성단위의 존립을 위한 또 하나의 필수적인 요인이 됩니다. 즉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사회의 문제인 것이고, 교회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1. 자녀의 의무

우선 사도는 자녀들의 의무에 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지요. 순종한다는 것은 부모의 말씀을 잘 듣고 긍정적으로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말씀을 잔소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순종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이 원리에 대한 조건처럼 추가되어 있는 것이 '주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어떤 것이었는가 하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부모의 명령이 명백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일 때는 순종할 수 없다는 의미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가령 부모의 뜻을 어기고 핍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그런 상황 속에 있습니다. 다른 일반적인 문제들에서는 부모의 뜻을 존중하고 순종하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하는 부모의 명령에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이 말씀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님의 뜻과 충돌되지 않는 한 순종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저항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부모를 순종하라, 부모를 순종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법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부모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다를 때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주 안에 있으면 부모를 순종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것이 옳으니라'라는 말씀이 보충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즉 주 안에 있게 되면서 변화된 모습은 바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부모에게 거역하기만 했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지요.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모의 자녀의 관계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모든 인간에게 마땅하고 옳은 규범입니다. 즉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회에서도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입니다. 특히 유교에서는 효를 가장 근본적인 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강조되지 않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강조되어서 부모에게 순종하기를 실패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또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주 안에 있다고 하면서, 즉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면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면서 군대에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총선에 입후보한 사람들 중에서 군대 안간 것이 큰 결격사유가 되어 당락에 영향을 받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큰 결격사유입니다.

계속해서 사도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조항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12에서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공동체가 출범하는 단계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규범으로 주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의 모델이 되는데, 그 공동체를 유지하고 또 그 공동체를 특징지울 수 있는 규범이 전수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것이 부모에 대한 외적인 행동이라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에 대한 내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내적인 태도에 근거해서 외적인 순종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순종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 내적인 공경의 태도가 없다면, 그 순종은 위선이요 속임수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과 공경하는 것을 굳이 나누어서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요.

사도는 특별히 이 계명이 첫 계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열 가지 계명 중에서 넷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고 나머지 여섯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인데, 그 중에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이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이 밖에 나가서 거짓말하고 도적질하는 경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가정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데, 가정에서 효도하는 자녀들이 사회에서도 훌륭한 시민이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은 또한 보상이 언급되어 있다면 점에서도 특이합니다. 다른 계명들은 모두-하지 마라로 끝나지요? 거짓말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그런데 유독 이 계명에서만은 부모를 공경해라, 그러면 이러이러한 축복을 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근작전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우리도 아이들에게 무슨 일을 꼭 하도록 할 때 사탕 사 줄께, 자전거 사 줄께, 하는 식으로 구슬리고 달래서 시키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도 이처럼 인간이 가장 좋아할 만한 선물, 즉 장수하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달래고 구슬리기까지 하시면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부모를 공경하도록 하십니다.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꼭 부모를 공경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열심을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2. 부모의 의무

사도 바울은 성도간의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결코 일방적인 규정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일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당사자가 모두 자기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그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의무가 있으면 당연히 부모의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권위주의 사회와 다른 면이지요. 과거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자녀의 복종만 과도하게 요구되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속한 것이거나 소유물 정도의 개념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의무는 상대적으로 조명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는 부모와 자녀를 똑같은 입장의 당사자로 취급하면서 둘 다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녀에게만 효도를 강요하고 부모의 의무를 망각하기 쉬운 우리 동양문화권의 사람들은 특히 이 말씀을 새겨 읽어야 합니다.

우선 부모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아버지들이라고 했으니까 어머니들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되겠지요? 물론 사도의 이 말씀은 자녀를 상전처럼 모시면서 절대로 아이들 기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일부 정신나간 부모들을 옹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잘못해서 매를 때려야 할 때는 따끔하게 때려야죠. 부모가 자녀 매 때리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이를 버리는 일입니다. 잠언에서도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잠 23:13)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것은 자녀를 동등한 인격자로 대하지 않고 부당하게 부모의 힘이나 권위를 내세운 경우가 되겠지요. 솔직하게 고백해서 우리가 부모의 입장에서 우리 자녀들을 부당하게 노엽게 만든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녀가 아직 어릴 때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불평등한 조건에서 출발하는 관계이다 보니 아이들이 몰라서 말은 못할 뿐이지 얼마나 불공평하고 부당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모릅니다.

어른들은 중요한 일로 바쁜데 아이들은 쓸데없는 일로 어른들을 귀찮게 하고 방해합니다. 그러나 아이들 생각에는 어른들이 괜히 신경질 내고 별로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혼내기만 좋아합니다. 이렇게 다른 입장이 서로 이해가 되고 조절되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어른들의 뜻대로 관철되고 맙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늘 피해자가 되고 부당하게 취급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본인이 그 잘못을 인정하고 벌받기를 동의하지 않으면 벌을 주는 것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합니다. 충분히 설명을 하고 이해가 된 다음에 매를 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벌을 받는다고 생각해서 아이들 마음에 부모에 대한 원한이 조금씩 쌓이게 됩니다. 지금은 힘이 없어서 때리면 맞는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 아이들에게 힘이 있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자녀를 노엽게 하는 부모는 자녀들로부터 순종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주어진 큰 의무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입니까? 우리 가문을 잇기 위해서입니까? 고대의 상황이라면 민족이 강성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까? 모두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겠어요? 하나님의 백성의 출생과 유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세상에 보내시는데 산으로 보내시겠어요? 바다에 태어나도록 하시겠어요? 당연히 성도의 가정을 통해서 보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부모들이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부모의 책임이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몸으로 낳은 우리 아이들이니까 우리 생각과 뜻대로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임과 동시에 이들은 각자 인격을 가진 독립체이고, 그 이전에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해서 좋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길러내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가장 큰 책임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모델로 삼고 있는 것처럼,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항상 일어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 역시 하나님을 대신해서 양육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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