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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엡 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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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엡 6:4)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데, 그거야 한국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여기서는 겨울이 시작되는 곳, 레퀴엠의 서곡같은 그런 계절이군요. 그러나 어쨌든 오월에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어서 가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가정은 이 땅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 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우선 자녀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우리 가정에 자녀들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9개월간 뱃속에 품고 있다가 마침내 새생명을 이 세상에 내놓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말로 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을 수반하게 되지요. 그래서 이 아이들은 부모의 분신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온갖 사랑을 쏟아 아이를 양육하게 되고, 또한 아이도 자라는 데 있어서 부모의 사랑을 절대로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내 아이라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아이는 남의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가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사랑하고 내가 양육하고 내가 가르치고 내가 바라는 대로 성장해야 하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자녀들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각 가정에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누구의 아이들입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소유권을 주장하기 이전에 먼저 소유권을 주장하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 자신은 누구의 자녀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니지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끼리 보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지만, 우리가 다같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이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의 가정에 있는 자녀들은 여러분의 자녀이기 이전에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인식을 갖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자녀들을 올바로 양육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러분은 부모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없고 부모의 자격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자기 백성들, 자신의 자녀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어느 곳에 어느 시대에 살게 될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라는 무대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 태어나 살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지요? 오늘 이 시대에 이 땅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어나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고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사막이나 험한 산골짜기에 홀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 가운데 태어나게 하셔서 우리 가정의 보호를 받으며 우리 가정에서 양육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정의 자녀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놓은 존재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우리에게 위탁교육을 시키고 계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비록 어린 아이들이지만 우리가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대로 이 아이들의 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아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 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직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인 유교문화에서 유래한 자녀관이 상당히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유교문화, 소위 양반문화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은 사람취급을 못받았어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거든요. 부모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는 것이 도리이지만, 자식 자랑을 하면 팔푼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애들은 가라. 가서 놀아라.' 어른들 하는 일에 끼여들면 안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이 하는 일이나 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어른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먼저 예배를 마친 아이들이 떠들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성경공부하던 한 분이 나가서 소리를 쳤습니다. '어른들 성경공부하고 있는데 시끄럽게 하지 말고 저리 가!' 그래서 아이들은 할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어른들이 성경공부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아이들이 떠들면서 노는 일이 더 중요합니까? 당연히 어른들 성경공부하는 일이 더 중요하지요? 그렇지만 그 아이들에게 물어보세요? 그 아이들에게는 자기들 노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거예요. '왜 어른들은 재미도 없는 성경공부 한다면서 우리들 놀지도 못하게 하는지 몰라.' 아이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힘이 없으니까 어른들이 쫓아내면 할 수 없이 쫓겨가는 거지요.

여러분,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 많이 들어 보셨지요? 우리 집에 이제 15개월이 지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행동특성을 가만히 보니까 발끝으로 서서 책상이나 싱크대 위에 있는 것을 만지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뭔가 발판이 될 만한 것이 있기만 하면 올라갑니다. 의자 위로 올라가고, 거기서 또 식탁으로도 올라갑니다. 하여튼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것이 특성이에요. 그러니까 이 녀석의 행동특성이 상향지향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가 이 아이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한번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서서 걸어다닐 때는 책상에 무엇이 있고, 싱크대 위에는 무엇이 있는지 다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도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쭈그리고 앉아서 세상을 보니까 책상 위에 뭐가 있는지, 싱크대 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분명히 뭔가 있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얼마나 궁금해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더 잘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발끝으로 걸어다니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올라갈 물건만 있으면 무작정 올라가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아이들이 보는 세계와 어른들이 보는 세계가 많이 다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자기들 생각만을 강요하고 주입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칠 때 아이들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눈높이 교육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농구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아이가 번번이 골인을 시키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시범을 보입니다. '얘야 공을 이렇게 잡고 골대를 향해서 이렇게 던지면 골인이 되잖아! 아빠처럼 해 봐.' 그러니 아이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아빠, 나도 아빠처럼 높은 곳에서는 쉽게 골인시킬 수 있어요.'

아이들 입장에서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어른 생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해 보세요. 아이들은 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할 지는 모르지만 그런 어른들에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그 아이들에게 힘이 생겼을 때는 더 이상 복종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결과입니까? 요즘 패륜아들에 대한 기사들을 많이 접하게 되지요? 부모를 때린다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나지 않습니까? 왜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기겠어요? 다 부모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에게 이해를 시키지 못하고 부모라는 권위와 어른의 힘으로 아이들을 다루게 될 때 이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벌을 주는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어른들 보기에 아이가 잘못했을 수도 있지만, 아이들 생각에는 잘못이 아닐 경우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부모가 아이에게 매를 때린다거나 벌을 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이 입장에서는 억울한 거예요. 여러분, 아이들에게 벌을 줄 때는 반드시 먼저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확인하세요. 만약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먼저 설득해야 합니다. 아이를 이해시켜야 돼요. 그것이 왜 어떻게 잘못이 되는지를 설득해서 아이가 인정하면 그때 벌을 주세요.

물론 아이가 벌받을 것이 두려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벌을 줄 때 화를 내면서 벌을 주면 아이로 하여금 잘못을 인정하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벌을 주기 전에 먼저 안아줘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먼저 안아 준 다음에 무릎꿇고 손들기 벌을 주었어요.

오늘 본문말씀에 보니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 자체가 전통적인 유교문화권에서는 생소한 말입니다. 아이들이 잘못해서 어른을 노엽게 하는 경우는 있어도 어른이 아이를 노엽게 한다는 개념 자체가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없었어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 어른들이 그런 전통문화의 보호막 속에서 마음껏 저지르고 있는 잘못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매를 맞거나 벌을 받는 아이는 얼마나 노엽겠어요?

아이들이 그렇게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게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거절당해 보신 적이 한두 번은 있으시지요? 거절당했을 때의 비애가 얼마나 고통스럽던가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단지 아이라는 이유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번씩 거절을 당합니다. 제가 정말 잊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딸이 장성해서 아버지를 회고하는데, 그 아버지는 매우 바쁜 설교자였지만, 그 딸이 언제라도 자기 서재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딸이 조용히 들어가 아버지 책상 곁에 서면 아버지는 얼른 일에서 손을 떼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캐더린, 무슨 일이지?' 저는 이 이야기를 읽은 이후로 지금까지 제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쉽지가 않아요. 그냥 쉽게 나오는 말은 이렇지요 '아빠 방해하지 말고 빨리 나가! 문닫고!'

그러나 아이가 정말 아버지를 필요로 해서 아버지를 찾아왔는데 아버지는 바쁘다면서 아이를 거절할 때, 아이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대수롭지 않게 범하는 실수이지만, 때때로 어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합니까? '조용히 해, 어른들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시키지 마.' 그렇지만 아이로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엄마나 아빠의 도움이 필요한 그런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시끄러, 저리 가!' 했단 말이죠. 아이는 거절감으로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 상처가 쌓이면서 아이의 성격형성에 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무의식 속에 엄마나 아빠에 대한 분노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가 자라서도 자기도 모르게 그에 대한 복수를 하면서 살게 됩니다. 아버지에게 많은 상처를 입은 아이는 그래서 남편이나 혹은 직장의 상사에게 그런 복수심을 갖게 되는 것이죠. 엄마에서 상처를 입은 아이는 나중에 아내에게 복수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이들을 노엽게 함으로써 얼마나 크나큰 불행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수준을 보면 그 나라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여기서는 어린이 학대에 대한 기사가 종종 나옵니다. 아주 큰 사건으로 보도가 되고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마치 나라의 큰 수치를 드러낸 것처럼 생각들 하지요.

그런데 제가 아프리카에서 보니까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고 사는지 몰라요. 우선 생활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아이들을 위한다는 개념이 별로 없더군요. 탄자니아의 전래 동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가뭄이 심하게 들어서 먹을 것이 없어 모두들 굶고 있는데, 아버지가 어디서 먹을 것을 좀 구해 왔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먹는데, 그 소리에 아이들이 깨서 물었어요. '아빠 뭐 먹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배가 고파서 그냥 먹는 시늉을 하는 거란다. 너희들도 이렇게 먹는 시늉을 하렴.' 그래서 아이들은 거짓으로 먹는 시늉을 하고 아버지도 먹는 시늉하는 것처럼 하면서 진짜로 먹었다는 거예요. 물론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지만 그 사회의 분위기를 말해주는 것이거든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가 이웃집 아저씨에게 성폭행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래도 그게 큰 사건으로 취급되지 않아요. 제가 맨 처음 방문한 아프리카의 나라가 이디오피아였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니까 거리에서 경찰이 어떤 아이를 회초리로 막 패는 거예요. 그런 아이들에게서 어떤 국가의 밝은 미래를 볼 수 있겠어요?

우리 가정에서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수준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부모에 대한 우리 아이들의 분노지수는 얼마나 될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 아이들이 부모에 대해서 얼마나 불신하고 얼마나 분노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 없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들킨 적은 없었나요? 아이들에게 부도덕한 것을 요구한 적은 없었나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 몇 명을 우리 가정에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맡기면 잘못 기를까 봐서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해서 맡기셨어요. 누구에게나 자기 자식은 귀하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한번은 토끼가 도시락을 깜빡 잊어버리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래서 토끼 엄마가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가다가 길에서 고슴도치 엄마를 만났습니다. 토끼 엄마가 물었어요. '어머, 고슴도치 엄마, 어디 가세요?' '우리 고슴도치가 숙제를 안 가져가서 갖다주러 가는 길이에요.' 그러니까 토끼 엄마가 말했습니다. '마침 잘됐군요. 이 도시락 학교에 가지고 가서 제일 예쁜 아이에게 주세요.' '네, 걱정 마세요.' 그리고 고슴도치 엄마는 그 도시락을 가지고 가서 고슴도치에게 주었답니다.

제가 한 두어 달 가량 남의 집 아이를 데리고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딸아이와 나이가 같은 아이인데, 우리 아이는 얼굴이 까무잡잡한데 비해서 아 아이는 얼굴이 얼마나 하얀지 몰라요. 한번은 이 아이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학교에 데려다 주는데, 백미러에 두 아이들의 얼굴이 보였어요. 그게 어떻게 보였는지 아세요? 까만 조각품과 하얀 찐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누가 남의 자식 맡아서 잘 기르겠어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우리 가정에 하숙생이나 손님으로 보내서는 제대로 양육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고, 부모와 자녀라는 특별관계 속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오늘부터 여러분의 자녀들을 볼 때 내 아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를 내가 맡아서 기르고 있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세요. 그러면 그 아이들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을 노엽게 해서 그 인생을 그르치게 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거나, 아이들을 실망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그 아이들을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께 얼마나 큰 벌을 받겠어요? 오직 우리가 할 일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해서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로 키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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