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께 하듯 (엡 06:5-9)

첨부 1



그리스도께 하듯 (엡 6:5-9)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변화되어야 할 모습 중 다양한 인간관계,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는데, 부부간의 관계,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 대해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하더라도 이 부부의 관계나 부자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변할 수 없고, 여기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원리와 지침을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될 세 번째의 인간관계는 종과 주인과의 관계인데, 이것은 바울의 시대상황과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 매우 다릅니다. 이러한 배경에 관한 고려를 하지 않고 무작정 이것을 우리 상황의 직업윤리로 채용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종들은 헬라어로 둘로스인데, 노예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한 마디로 말해서 노예의 노동력에 의해 건설된 사회였습니다. 로마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정복민들을 포로로 잡아와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노예들에게 일을 시키고 자기들은 편안히 놀면서 먹고살았습니다. 이 노예들의 노동력으로 로마는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문화를 이룰 수도 있었던 것이지요. 또 먹고 즐기는 일을 추구하다 보니 오락, 스포츠, 문학 등이 발달하게 되었구요. 그래서 로마의 문화는 노예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노예들의 지위는 아무런 법적인 권리도 없는 그야말로 주인의 물건처럼 취급되었습니다. 한 로마의 작가는 농사짓는 도구를 세 가지로 분류해서 말했는데, 말을 할 줄 아는 것, 말을 하지 못하는 것, 아예 소리도 없는 것으로 나누었습니다. 노예, 짐승, 그리고 기구, 이렇게 나눈 것이지요. 노예가 소나 말과 다른 점은 말을 할 줄 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로마의 정치가 카토는 말하기를, 노예가 늙으면 쓰레기더미에 던져야 하고, 노예가 병들면 먹을 것을 주지 말고 그냥 갖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실수로 자기 애완동물 메추라기를 죽인 노예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또 폴리오라는 사람은 노예가 크리스탈 잔을 깨트렸다고 칠성장어들이 우글거리는 못에 던져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예를 채찍질하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을 가장 즐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노예들이여, 그대들의 목에 있는 멍에를 벗어버리고 투쟁의 전선에 가담해라. 그대들이 힘을 합치면 이 로마제국도 손에 넣을 수 있다. 찬란한 로마제국은 그대들의 목숨으로 건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선동이 아니라, '노예들이여, 두려워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디서나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쳤는데 바울을 만나서 회심하고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너는 자유를 찾아 탈출했으니 다시는 이 자유를 빼앗기지 말고 잘 살아라'고 하지 않고, '내가 편지를 잘 써줄 터이니 주인에게로 돌아가서 성실하게 다시 주인을 섬기도록 하라'면서 주인에게 보냅니다.

고대사회는 노예제도가 용인될 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근간이 되는 제도였기 때문에, 그 배경에서 발생한 기독교 역시 노예제도를 묵과하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공동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태동하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동족을 노예로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수한 자존심이 노예가 됨으로써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외부인을 노예로 부리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민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만인에게 해당된다고 믿게 된 신약에 와서도 기독교가 이 불합리하고 비성경적인 노예제도에 정면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문화적인 뿌리가 워낙 강해서 폐지된다는 것이 불가능할지언정, 바울같은 혜안을 가진 신학자라면 최소한 이것이 장래에는 없어져야 할 죄악이라는 암시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천국에 가면 제가 바울 사도에게 꼭 한번 물어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입니다.

역사를 두고 이 노예제도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 정당성을 주장해 왔습니다. 성경에 아무런 금지나 반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흑인노예들의 비참상을 그린 영화가 있었는데, 흑인들은 예배당 뒷구석에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한편, 백인 목사는 '노예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셔서 노예를 주신 것처럼, 우리 미국을 축복하셔서 노예를 주셨습니다'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노예제도는 분명히 반기독교적이지요. 그래서 기독교가 성숙하게 되었을 때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해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비단 노예제도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모든 역사적인 상황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군사독재정권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철권통치에 대항했고 많은 목사들이 감옥을 드나든 반면, 많은 교회들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로마서 13:1 말씀을 들이대며 독재자를 축복하고 운동권을 정죄하면서 권력과 한편이 되는 유익을 향유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바뀌니까 유명한 목사님들이 전에 한 잘못을 회개하노라고 크게 성명을 발표하고 광고를 냅니다. 그러면 저 같은 사람은 '역시 큰 지도자는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구나' 하고 더 존경을 해야 할 터인데, 내 속에 무슨 못된 심보가 들어있는지 그 사람들이 회개하고 있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들더군요. 글쎄요, 잘못했노라고 하면서 현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유명세와 권력을 모두 내놓고 산속으로 들어간다고나 하면 모를까...

어쨌든 이런 것은 구체적인 역사적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이 노예제도의 폐단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폐지하는 것이 역사적 요청이었다면, 바울의 메시지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겠지요. 그러나 바울이 접하고 있는 상황은 복음이 편만하게 증거되는 가운데 노예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노예주인도 그리스도인이 된 현실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이해집단이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이것은 매우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지배자의 종교가 되거나 노예의 종교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로서는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이 다른 두 집단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지요.

노예와 주인의 관계에서도 바울은 이전의 관계들, 즉 부부간의 관계나 부자간의 관계에 해당되었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합니다. 그것은 권위와 복종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관계는 권위와 복종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모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입니다. 부부의 관계에서도 그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그랬지요?

지금 바울은 새로운 노예의 윤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기대되는 노예들의 덕목을 열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 한 노예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다시 말해서 최고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당장 노예라는 신분을 벗어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예제도 자체가 시비거리가 아닌 이상, 노예라면 노예로서 자기 일을 더 잘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의 변화된 모습이어야 하겠지요? 가령 화장실 청소하는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합시다. 예수를 믿고 나서 눈에 띄게 바뀐 것은 화장실이 더 깨끗해진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신문배달하는 소년이 예수를 믿었다면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빠지는 일이 없이 제 시간에 신문을 배달해서 사람들에게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주는 모습이지 않겠어요?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술자라면 더 정확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입니까? 사장 좋은 일 시키기 위해서입니까? 바울이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이 말씀에 찔리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저부터도 사람이 볼 때와 보지 않을 때의 행동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이것입니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화장실 청소하는 사람이 만약 주님이 쓰시는 화장실을 청소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면 화장실이 얼마나 깨끗해질까요? 내가 만든 자전거를 주님이 타실 거라면 대충 만들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어떻겠어요? 예수님이 물건을 사러 오셨습니다. 불친절할 수 있나요? 바가지를 씌울 수 있나요? 학교 선생님이다. 어떻게 해야죠? 제자들 가르칠 때 마치 예수님께 강의를 하는 것처럼 성실하고 열심히 한다면, 예수믿는 선생님은 확실히 다르다는 말을 듣겠지요? 콩나물 길러 파는 분이라면 '이 콩나물 우리 주님이 잡수신다면...' 하는 생각으로 콩나물 길러야겠지요. 임집사님처럼 자동차를 고치는 분은 예수님의 자동차가 고장나서 고치러 온 것처럼 일을 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모든 인간관계는 상호관계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쪽 당사자에게만 일방적인 의무를 지우지 않습니다. 한쪽만 잘해가지고는 인간관계가 될 수 없지요. 여기서 노예가 주인에게 마치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을 했다면, 주인 역시 종 대하기를 그렇게 해야 합니다.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했는데,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종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다 주인을 섬기는 것에 관한 것인데, 그렇게 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바탕이 될 수 있는 지침은 6절 뒷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주인이 종을 대할 때는 내가 지금 내 소나 말과 같은 소유물을 부린다는 생각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이 종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이 마치 그리스도께 하듯 주인을 섬긴다면, 주인은 당연히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하신 것처럼 종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공갈을 그치라는 것이지요. 주인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일 못한다고 해고해 버릴 수도 있고, 월급을 떼어먹기도 합니다. '구로아리랑'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얼마나 억울하게 착취당하는가를 그린 영화였습니다. 이제는 '네팔아리랑'이 나와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이 네팔에 갔더니 현지인 한 사람이 와서 한국사람이냐고 한국말로 물어보더랍니다. 너무 반가워서 그렇다고 했더니 있는 욕 없는 욕, 한국 욕 네팔 욕을 다 동원해서 욕을 하드래요. 한국에 가서 불법 취업해 일하다가 손가락까지 잘렸는데 치료비는커녕 임금도 못받고 쫓겨왔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뭐라고 말합니까? '공갈을 그치라.' 이와 같은 종에 대한 모든 비인격적인 처사와 착취, 탄압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근본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들이 정말 정신차리고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네가 이 종의 주인인 줄 아느냐? 이 종이나 너의 진짜 주인은 하늘에 계시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종이나 주인이나, 일을 시키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행하고, 마치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나님을 대하듯이 서로를 대하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