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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엡 06: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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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프리카에 가면서 단파 라디오를 사가지고 갔었습니다. 보통 라디오 하나는 한 2만원이면 살 수 있는데, 이 단파 라디오는 성능이 좋은 것으로 고르다 보니까 한 20만원 줬던 것 같습니다. 무슨 라디오 하나가 이렇게 비싼가 불만이 많았는데, 탄자니아에 가서 이 라디오를 켜니까 한국방송이 나오는 거예요. 20만원 가치를 하는 거죠. 하루에 두 시간 방송이 나오는데, 어떤 날은 잡음 때문에 알아듣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잘 들으면 제법 한국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 소식통이 돼서 다른 선교사님들이 한국소식을 알고 싶으면 저에게 물어보곤 했지요. 그 라디오를 통해서 거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에서 보낸 전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어요.

그러다가 2년쯤 지났을 때 이웃 나라 케냐를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 있는 선교사님이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의 신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또 얼마나 신기한지... 라디오를 가운데 두고 몇 사람이 둘러앉아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한국뉴스를 들었던 우리가 마치 원시시대에 살다 온 사람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인터넷이 더 이상 특별하거나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어느 집에서나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귀찮아서 요즘에는 아리랑 위성방송을 신청하는 분들이 상당히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 한국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어떤 분이 그 장면 녹화한 것을 보내줘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한 달 이상이 지나서였겠지요. 아리랑 TV가 나온다면 한 달 동안 기다릴 필요없이 그날 바로 현장을 볼 수 있겠지요. 또 요즘에는 다이알패드 무료전화가 나와가지고 아무런 부담없이 아무 때나 한국에 전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에는 다이알패드 무료전화가 없었습니다. 이메일도 없었고 지직거리는 단파라디오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직접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국에 굳이 편지를 보내야 할 일이 있으면 1달러 50센트짜리 우표 한 장만 붙여서 우체통에 넣으면 며칠 후에 한국에서 우체부가 그 편지를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편지를 넣을 우체통도 없었고, 에베소 교회에 나타날 우체부도 없습니다. 바울과 에베소 교회 사이에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이 편지를 들고 직접 거기까지 가는 것뿐입니다.

바울이 이 에베소서를 썼는데, 이제 보낼 일이 큰 문제지요. 아무에게나 이 일을 맡길 수 없고, 가장 믿을 수 있고 안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일을 맡겨야 합니다.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 즉 메신저나 사자는 편지를 보낸 사람의 권위를 갖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긴장하고 놀랐던 것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왔기 때문이지요.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바울을 가장 잘 이해하고 바울과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또 편지를 전하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지요. 이 일을 위해서 선발된 사람이 바로 두기고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중요한 책임 맡을 사람을 찾아야 할 때가 많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맡을 사람이 없다고 아무에게나 일을 맡겼다가 나중에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되는 수도 종종 있습니다. 반면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싸움은 얼마나 치열합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곳이든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하고 책임있게 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인 이상,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기뻐하실 것인지 뻔한 일 아닌가요? 어느 조직이나 집단도 마찬가지겠지만, 교회에서도 보면 궂은 일을 도맡아서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잘 나타나지 않지요. 그런데 어쩌다가 그 사람이 빠지게 되면, 그 빈자리가 금방 표시 납니다. 그런 사람이 많은가 적은가에 따라서 그 조직이 건강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기고는 아시아 사람이라고만 사도행전에 소개되었는데, 이 사람은 에베소에서부터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바울의 일행에 편입된 이 두기고는 특별히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의 편지를 배달하는 특수요원으로 활약했던 것 같습니다. 이 에베소서를 전달한 것뿐만 아니라 골로새서를 전달한 것도 두기고였습니다. 또 크레테 섬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아데마나 두기고 중에서 한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바울의 신임을 얻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에베소 교회에 두기고를 보낸 이유는 금방 살펴본 것처럼 그가 에베소에서부터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참했고, 또 에베소 사람일 가능성이 많은데,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기에 두기고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었겠지요. 바울은 그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고, 특별히 바울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지요? 그런 충실한 동역자를 바울도 곁에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에베소에 보낸 이유는 바울의 사정 곧 그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두기고는 이 에베소서라는 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대신해서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중요한 역할이 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다 돌려읽고 난 성도들이 모두 두기고 주변에 몰려와서 이것저것 바울의 신상과 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물어보았겠지요? 뿐만 아니라 두기고는 이 에베소서를 해석하고 보충설명까지 해 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두기고를 만남으로 해서 에베소 교인들은 궁금하던 바울의 소식을 알게 되고 큰 위로를 얻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의도였지요.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두기고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요?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 사도와 헤어지는 아픔을 누구보다 크게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2년 동안 복음을 증거한 후 떠날 무렵에 에베소에서 바울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바울 때문에 사업이 망하게 된 우상제작자들이 선동한 것이었지요. 그것 때문에 떠난 것은 아니었지만 떠날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에베소를 떠난 바울 일행은 다른 곳을 들렀다가 지나는 길에 밀레도에 잠깐 머물면서 근처에 있는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몇 개월만에 만난 그들에게 바울은 고별설교를 하면서, 앞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곧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로마의 관할에 넘겨지게 되고 결국 로마에까지 가서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에베소 교인들과 다시 만날 기회가 영영 없어지는 것이지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에 에베소에서 온 교인들은 바울의 목을 껴안고 울었습니다.

참 슬픈 장면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이것만 보아서는 바울이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평가는 그가 떠날 때, 또는 떠난 후에 나타납니다. 대통령이 처음 취임해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개혁을 부르짖을 때는 얼마나 인기가 좋습니까? 김영삼 대통령 초기에는 톱스타 최진실을 능가하는 인기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날 때는 그를 우리의 대통령으로 뽑았다는 사실이 한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교회에서도 많은 목사님들이 불명예스럽게 교회를 떠납니다. 야반도주하듯이 떠나는 분도 있고, 억지로 쫓겨나듯이 떠나는 분도 있습니다. 떠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이 되는 수도 있고, 에베소 교회에서처럼 눈물바다를 이루는 수도 있습니다. 제가 10년이든 20년이든 지난 후에 우리 교회를 떠나게 될 때 여러분이 제 목을 껴안고 눈물을 쏟게 될지, 아니면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서로 헤어지기가 싫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좋겠지요. 저도 그런 이별을 맞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런 이별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속시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고 눈물어린 이별이 될 수도 있겠지요. 바울은 그 이별현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기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눈물과 겸손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이런 목자가 떠나게 되었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하는데 눈물 안 흘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별의 아픔을 간직한 에베소 교회에 들려온 소식은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너무너무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또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특별히 두기고를 보내어 자기 사정을 자세히 말해 주고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감옥에 갇힌 사도를 염려하고, 사도는 자기를 위해 염려하는 그 교인들을 오히려 걱정하고 위로하고... 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관계입니까?

무엇보다도 에베소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바울의 축복하는 인사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에베소의 형제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와 성도의 삶에 늘 있어야 할 것이 평안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지요. 자기를 염려하고 걱정해 주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평안을 비는 것으로 대응합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에게 믿음을 겸한 사랑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은 서로를 믿는 것에서 싹이 트고, 서로 사랑할 때 서로에 대한 믿음은 더욱 굳어집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말해온 교회, 그리고 성도의 변화된 삶이 이 인사말에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과 성도의 삶에 관한 분명한 이해를 갖게 된 에베소 교회는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에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다가 신앙을 저버리고 있었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는 점점 강도가 높아지고 예수의 이름과 목숨을 바꾸어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한번 사랑했으면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해야지, 중간에 그만두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예수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늘로서의 위로가 임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교인들이 모두 변함없이 예수를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이 말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속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속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의 소원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분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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