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 안에 굳게 서라 (살전 03:1-13)

첨부 1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바뀌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변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큰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이전에 좋던 것이 이제는 값이 없게 여겨집니다. 또한 죄에 대해 민감해집니다. 의에대한 사모함이 생깁니다. 선에 대한 열망이 강렬해집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싹틉니다.
또 다른 변화는 교제권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같이 어울려 즐길 수 있는 세상 친구가 편합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돌아와 진리의 눈이 뜨이고 거듭나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지면 이전에 즐기던 것들이 죄악의 나날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교제하는 대상,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죄 가운데 어울리던 이전의 친구가 여전히 좋고 교회 오는 것이 별로 재미가 없다면 이는 신앙이 건강하지 않은 증거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되면 예배가 기다려지고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기쁩니다. 늘 만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예수 잘 믿는 사람,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괜히 반갑습니다.
데살로니가서는 주님을 향한 바울의 열정과 마음을 잘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한 편으로 그의 간증문이라 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생각할 때 많은 업적, 사역, 일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실상은 바울이 가진 열정과 사랑이 더 소중합니다. 3장에는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절절히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장’ 지닌 참 사역자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의 대상이 바뀝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교회가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교회사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유명한 교회, 대단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로서 평가한다면 에베소교회, 고린도교회, 안디옥교회, 예루살렘교회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 당시 교회중에서 데살로니가교회는 지극히 작고 연약한 교회였습니다. 그 곳에서는 좋은 기억보다는 고생한 기억들이 많았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심지어 베뢰아, 아테네까지 쫓아와 악착같이 바울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에 대한 기억은 바울에게 썩 유쾌하지 못했습니다.
잘 되고 있는 지금 일에 몰두하기 위해서라도 고생했던 기억은 묻어 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고온 연약한 교회에 대한 더 깊은 염려와 사랑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도 지나치지 않고 관심을 두십니다. 집안에서 안전하게 있는 큰 아들보다는 집 나간 탕자를 염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울타리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는 길 잃은 한 마리에 대한 관심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을 사역자라고 부릅니다. 또는 선교사, 목회자라고 합니다.

바울은 짧은 기간에 큰 업적을 이룬 굉장한 일꾼이기에 바울을 생각할 때 사랑의 목자보다는 일중심적인 사역자 바울이 연상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랑장인 고린도 전서 13장을 기록한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이 없이 일만 해놓은 사람은 후에 열매가 좋지 않습니다. 그 사역의 열매가 오랫동안 기억되고 지속될 수 있는 비밀은 사랑입니다. 사역에 임할 때 그 사역에 마음을 담아 온전한 사랑으로 사역하는 것이 진정한 사역입니다.
만약 사역 하면서 영혼을 향한 열정과 사람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순식간에 삯군이 됩니다. 일에만 몰두하다가 영혼에 대한 가치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해 위로함으로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에 바울은 먼저 디모데를 보냅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기에 디모데를 앞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를 보낼 시기에 바울의 상황도 절대 편치 않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바울 자신도 딱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머물고 있는 아테네 전도는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일손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디모데를 보냅니다. 이 마음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할 일이 많은 바쁜 분이시기에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내게 신경쓸 겨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5억 크리스찬 속에서 ‘내 문제를 기억이나 하실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소자, 사람들이 무시하고 잊어버리기 쉬운 사람들, 심지어 목사까지도 잊어 버리기 쉬운 성도 한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환난 속에서 만나는 위로

디모데를 보내면서 바울은 디모데와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섬세한 배려를 잊지 않습니다. 디모데는 아직 어린 사람입니다. 지금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바울 대신 디모데가 가면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바울은 디모데를 추천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바울은 형제라는 표현을 쓰면서 디모데를 자신과 동등하게 세워줍니다. 또한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으로 소개합니다.
어린 디모데에게 이런 추천창은 큰 힘이 됐을 것입니다. 바울은 일시적인 체면치레가 아닌 정말 소중한 사람을 보내고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여러 환난과 시험하는 자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도 견디기 어려운 고초를 어린 신자들이 겪고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보낸 이유는 그런 시험과 위기에 있는 성도들을 굳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목회자를 주시고 성경을 주시면서 설교케 하는 목적중의 하나는 우리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심기워진 복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잘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아가서 위로의 사역을 감당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목회에 있어서 위로 사역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어린 신자들이 믿음 생활을 잘 하도록 격려해 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새벽기도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을 보면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잠시 얘기를 나눠 보면 감당키 어려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위로를 해 드려도 큰 힘을 얻고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서로를 향한 작은 위로를 아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위로를 머뭇거림 없이 전하십시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만사형통’

누구든지 여러 환난과 고난이 닥치면 요동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하고 세움으로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믿고 천국가라’는 말씀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가지 시련을 만날 때 흔들리지 말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려움 없이 쉽고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쉽습니다. 기독교 최대의 미신은 예수 안에 있으면 만사형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정도 결과도 만사형통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만사형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만사형통이지 ‘아무 고난과 어려움 없이 신앙생활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마음먹고 제자의 삶을 살려 할 때 고난은 당연히 옵니다. 손해보고 억울한 일도 당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정당한 일, 옳은 일, 선한 일인데도 기꺼이 포기합니다. 희생하고 손해를 봅니다. 따지고 싶어도 상대방을 실족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을 염려하여 기꺼이 손해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바울은 처음부터 고난에 대한 부분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고난에 대한 면제를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인간복음은 투자하면 손해없이 많은 이익을 보장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그런 보장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과 댓가가 필요하며 수고의 눈물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조금만 투자하면 엄청난 이익을 본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구조는 그렇게 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수고의 댓가를 보장하는 것이 진짜입니다. 처칠, 비스마르크가 수상이 되면서 그들의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은 평화와 안전이 아닌 땀과 수고와 눈물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장미빛 환상은 가짜입니다.
복음은 승리하게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타락한 이 세상의 구조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시험하는 자의 끊임없는 유혹이 있으며 우리의 죄성 또한 아직도 남아 있기에 고난은 당연합니다. 기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결국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은 바울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염려가 기쁨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이 모이는 숫자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으로 인해 기뻐하십니다. 바울은 이 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에 큰 염려가 있었지만 이제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을 더 기쁘게 한 것은 자신을 음해하는 많은 외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여전히 바울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비난하거나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울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바울은 도리어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과 같은 열매가 나타날 때 하나님도 우리로 인해 기뻐하시고 위로를 받으심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의 결단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택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수고와 믿음을 지키는 일이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성도들이 주 안에 굳게 설 때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살리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잘된 자식 아홉때문에 기뻐하기보다 문제가 있는 한 명의 자식 때문에 근심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만명 성도중 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아파하십니다. 연약한 지체들과 교회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기쁨은 감사로 변합니다. 좋은 소식을 접할 때 바울은 춤 출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런데 기쁨 자체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기쁨은 감사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쁨에서 감사로 가려면 사람을 향한 우리의 시야가 하나님을 보는 시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즐거움으로 끝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에만 잠겨 감사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기쁨을 유지하고 기쁨이 능력이 되는 비결은 감사입니다. 마지막으로 10-13절을 보십시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거룩’과 ‘성숙’의 푯대 향한 열망

교회를 향한 염려가 기쁨으로 변하고 기쁨은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감사는 기도로 발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감사하며 기도를 잊지 않습니다. 신앙은 현재상황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기대 이상으로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지만 바울은 더 잘 할 수 있도록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기서 기도의 핵심 두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얼굴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장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기도하십시오. 교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순예배를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만남까지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길까지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직행하기를 원하는 마음과 함께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대이상으로 잘 하고 있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개척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완전한 교회에 대한 비전을 던집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성숙하고 온전해 지도록 기도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며 하나님 마음입니다. 그 자리에 머물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푯대를 바라보며 달리십시오.
건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거룩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더 성숙하고 온전케 되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눈에 보여지는 출세와 성공이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의 목표는 온전함이며 거룩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하는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교회를 향한 사랑이 되며 우리 신앙생활이 건강한 신앙,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