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전 04:9-18)

첨부 1


데살로니가서는 고난 가운데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데살로니가성도들에게 복음의 기초와 핵심을 전하여 견고히 세우기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한 핵심중의 하나는 사랑에 관한 문제입니다. 4장 9절을 보십시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 가장 강조해야 할 것이 사랑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고린도교인들에게 강조했던 것도 사랑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하고 지식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소용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제일 먼저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할 열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는 형제사랑에 대해 더 쓸 말이 없다고 합니다. 온아가야와 마게도냐 일대에 사랑이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식이 있습니다. 능력도 있습니다. 재정도 있니다. 모이는 숫자도 적은 수가 아닙니다. 세미나, 프로그램, 사역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지독히 이기적이며 정욕적이며 자기 중심적입니다. 반면 참사랑은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웁니다. 자기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합니다. 오래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이런 사랑을 우리안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하기에 앞서 상황과 대상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대상이 있고 사랑을 실천할 만한 상황이 오면 근사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안에 사랑이 없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통해, 성경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참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의 실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능력을 하나님께 받아야 하고 우리의 사랑도 거듭나야 합니다. 로마서 5장 5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중의 하나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값없이 부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능력이 없는 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 욕심과 탐욕이 하나님의 사랑을 틀어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울타리’ 넘어 전하는 예수 사랑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은사중의 은사입니다. 가장 좋은 은사, 가장 좋은 길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첫번째 열매이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해 갈수록 이 사랑이 자꾸 커져야 합니다. 사랑이 깊어지고 높아지고 넓어져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우리는 자기 가족들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넓어지면 순식구들까지 사랑합니다. 그러나 더 확대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넓어져야 합니다. 생소한 사람, 처음 대하는 사람,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 힘든 사람들도 자꾸 사랑하면서 사랑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이 계속해서 넓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가족을 넘어서고 순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고 교회라는 울타리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교단도 넘어서야 합니다. 누구든지 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단도 사랑해야 합니다. 교리는 타협할 수 없고 진리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지만 그들의 영혼은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한국교회도 넘어서야 합니다. 세계를 끌어안고 품는 사람들이 되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인들의 사랑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마게도냐 모든 지경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극한 가난 속에서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교회들을 물질적으로 도왔습니다. 자기들이 희생하고 손해보면서도 도울 줄 알았습니다. 사랑은 넘칠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욱 더 많이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에베소서 3장 17-1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회개해야 할 것이 있다면 사랑이 없는 삶일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사랑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거룩과 사랑의 옷 입고 주님 맞는 성도

데살로니가서는 재림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지금 이 자리에 재림한다면 돈, 지위, 건강, 외모를 가지고 그분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거룩함과 사랑으로 주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태도는 거룩함이며 사랑입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외인들은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는 단정히 행하십시오. 책잡히거나 흠이 잡히면 안됩니다. 신앙의 이유로 우리가 핍박은 받을 수 있습니다. 지식과 논리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이 우리의 믿음과 진리에 대해서는 공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는 모를지라도 예수믿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눈에도 믿을 만하고 성실한 사람, 신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는 거룩함과 사랑이며 세상속에서 단정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재림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인 것을 믿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이 땅에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부활과 재림을 믿지 않는다면 휴머니스트에 불과합니다. 교회에 나와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을 지라도 부활에 대한 소망,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 영생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닐지 모릅니다.

부활과 재림과 영생에 대한 소망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땅에서 편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무병장수와 만사형통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다가 이 땅에서 순교할수 있고 고난당할 수도 있고 희생과 손해로 일관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전에 누리던 것, 가진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만난 후에는 누리고 있는 모든 특권을 다 내려놓습니다. 그는 만물의 찌끼처럼 여김을 받고 멸시와 천대를 당할 때도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흔적, 스티그마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알고 난 후 주어졌던 그 흔적은 세상적인 축복도 능력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흔적, 매맞은 흔적, 희생당한 흔적, 손해본 흔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상급이었습니다.
우리가 기꺼이 희생하고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나라, 영원한 삶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잠시 당하는 환난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들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능히 어떠한 희생도 치를수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부활과 재림과 영생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데살로니가성도들은 바울이 언급한 재림에 대한 소망, 부활에 대한 소망 속에서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재림에 대한 잘못된 믿음, 잘못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미선교회의 원조들이 데살로니가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광주의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내일이라도 곧 올 것처럼 떠들고 다녔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일상적인 삶과 일을 포기하고 떠들고 다니는 과격한 종말론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태도는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다미 선교회의 잘못은 종말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림에 대해 무관심하고 재림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다미선교회의 잘못은 날짜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였습니다.
열광주의자들은 일상적인 일들을 포기하고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구실로 주어진 일을 팽개쳐버리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포기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독교 세계관의 부족 때문입니다. 이들은 건강한 기독교적인 신앙관을 올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속된 것이고 교회 안에서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것만이 거룩한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은 일상적인 일까지도 포기하게 했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등지는 것이 경건이 아닙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경건의 능력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지금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을 더 성실하고 정직하고 진지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전에는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 달렸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직업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정직하게 땀흘려 일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이요 증인의 일이요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인 삶을 팽개치지 마십시오

유명한 설교가였던 죠지 휫필드에게 사람들이 ‘내일 주임이 오시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세워 놓은 계획 그대로 심방하고 설교할 것이다’라고 답변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주어진 자리에서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는 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바른 자세입니다. 이제는 우리 일터, 직장이 신앙의 실습장이 되야 합니다.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십시오. 어떤 경우에는 겸손히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가능하면 자립해야 합니다. 형제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기회를 따라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또한 적을 지라도 베풀고 돕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어렵다고 항상 궁색하게 살지 마십시오. 적은 부분이라도 떼어서 나누며 도우십시오.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처럼, 사르밧의 여인처럼 궁핍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드릴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일에 대한 태도가 바뀝니다. 그렇기에 고상한 일, 대접받는 일, 발에 먼지 묻히지 않는 일이 편하고 좋은 줄 알면서도 솔선수범하여 러빙핸드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화장실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주차장에도 뛰어 갑니다. 장로님들중에는 의사의 직업을 내려 놓고 선교사로 나가서 농부가 되기도 하고 노동자가 돼서 기쁨으로 주를 섬기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들은 손수 일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지닌 분들입니다. 13-17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인류 최대의 원수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의 세력입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것은 최악의 뉴스인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의 저주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이 머지 않아 재림하실 줄 알았습니다. 이들은 재림 때까지 살다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에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생겼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사람이 있고 담대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운명하시는 분을 접할 때 혹시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어 올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는 모습과 구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영광중에 다시 오실 주님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구원받은 성도들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래식을 어떻게 치르고 죽을 때 어떤 모습으로 죽었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 믿는 믿음이 있으면 두려워하며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와 함께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사망권세를 부수고 우리를 죽음에서 이미 해방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마지막 소망은 주님 오시는 그 날 영광중에 그 분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내 모든 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한 모든 성도들을 완전히 구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도 들림을 받은 후 주를 만나 영원히 그분과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죽음에 대한 준비, 부활에 대한 이해, 죽음의 상태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과 온전한 믿음이 있으면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축복이며 선물일 것입니다. 살아서 믿음의 본을 보이며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