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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육신과 영 (롬 08: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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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과 영(로마서 8:5-14)

오늘 본문에는 '육신'이라는 단어와 '영'이라는 단어가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본문 5절에서 '육신을 좇는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자기하고 싶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영을 좇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성령께서 아니라고 하시면 참는 것이고, 하기 싫은 일도 성령께서 하라고 하시면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육신을 좇아 사는 것이 무엇이고, 또 영을 좇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육신을 좇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본문 5절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합니다. 육신을 좇아 사는 사람의 특징은 언제나 육신에 속한 일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일에 애정과 집념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것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어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큰소리 치면서 살까?' 이렇게 하루 종일 돈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디모데전서 6장 10절은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한다고 했고, 돈을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일전에 어떤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남녀가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수명이 2-3년이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몸에서 사랑을 느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 있는데 2-3년 지나면 이 호르몬의 분비가 멈추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이 호르몬 분비가 멈춰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집에 가셔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이론이 맞는다면 결혼한 지 20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배우자를 보고 '당신을 죽도록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비정상입니다. 마땅히 정지되어야 할 호르몬 분비가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부러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어디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 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고운 정, 미운 정 주고 받으면서 서로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아무개 부부는 이렇게 산대' 하면서 부러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3년 안에 식어버리는데 돈에 대한 사랑은 식을 줄 모릅니다. 오히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사랑스러운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는 다 돈 때문에 벌어지는 죄입니다. 또한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말씀합니다. 돈을 사모하는 자는 결국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돈이 많아서 믿음에서 떠난 사람도 있고 반대로 돈이 없어서 믿음에서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돈돈 하다가 완전히 돌아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돈을 사랑하고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한 주간동안 무엇을 생각하며 사셨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까?' 이런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어서 아무개 코를 납작하게 해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살아 온 것이 사실 아닙니까?

사람은 누구나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인 것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돈을 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 받고 싶어한다면 아직은 멀었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은 육신을 좇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홍콩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 참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교회에 나이 드신 어른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가 되려면 60세 이상 나이 드신 분들이 적어도 한 25%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신앙생활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사람들이 자연히 배우게 되고 그러다 보면 교회의 전통이 서게됩니다. '나는 아무개 권사님처럼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소원이야.' '나는 아무개 장로님처럼 일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모범이 되는 분들이 많아야 합니다. 앞을 보아도 그런 장로님, 뒤를 보아도 그런 권사님, 이렇게 될 때에 교회는 아름다운 전통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나이 드신 분들이 많지 않고 젊은 사람만 많다보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아무개가 지난 주일에 목걸이를 얼마짜리를 하고 왔대.' 맨 이런 이야기만 들립니다. 그래서 나는 두 개 걸고 오고, 너는 세 개 걸고 오고, 그러다가 전부 목 디스크가 걸렸다는 것 아닙니까. 요즘에는 귀걸이도 자꾸만 커집니다. 애꿎은 귀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렇게 족쇄를 채워놓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있는 것, 세상의 물질과 세상의 돈을 가지고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육신에 속한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습성이요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본문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또한 7절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을 따라 사는 자는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열매는 세상의 물질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 때문에 이런 열매가 깨어지게 됩니다. 돈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리고, 돈 때문에 화평이 깨어집니다. 돈 때문에 급해지고, 돈 때문에 자비로운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돈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의 물질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육신의 생각이 우리를 망하게 만들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고, 둘을 가지면 셋을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욕심이 여러분을 사로잡게 될 것입니다.

안데르센이라는 사람이 지은 '빨간 구두'라는 제목의 동화가 있습니다. 어떤 마술사가 빨간 구두를 한 켤레 만들었는데 누구나 한번쯤 신어보고 싶도록 아주 예쁘게 잘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이 구두는 신기만 하면 누구든지 저절로 멋진 춤을 출 수 있는 구두입니다. 한 소녀가 있었는데 이 구두가 너무 탐이 나서 열심히 돈을 모아서 결국 구두를 사서 신었습니다. 신자마자 저절로 멋진 춤을 추게되었습니다. 너무도 신이 났습니다. 여기저기 동네를 다니면서 춤을 추었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구경을 하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춤을 추다가 피곤해져서 그만 구두를 벗으려고 하는데 구두가 벗겨지지를 않습니다. 그 구두는 한번 신으면 절대로 벗겨지지 않는 구두였습니다. 소녀는 하는 수 없이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하루 종일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자기 집 앞을 지나가다가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구두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춤을 추고 또 추다가 결국은 어느 무덤 가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인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처음에는 사람이 욕심을 부리나 결국에는 그 욕심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벗겨지지 않는 욕심의 신을 신고 욕심의 춤을 끊임없이 추고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애타게 부르시는 소리까지도 외면하게 됩니다.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게 됩니다. 끝없는 욕심의 춤을 추다가 결국 무덤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십시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으로 알고 충성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본분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영을 좇아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영을 좇는다는 것은 성령을 좇아 산다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지배 아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6절은 영에 속한 사람의 특징을 '생명과 평안' 이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생명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봅니다. 도대체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생명은 '힘'이라고 정의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시장에 가면 소금에 절인 생선을 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그 생선이 살던 곳은 소금물인 바다입니다.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소금물에 살아도 그 몸 안으로 염분이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단 생명이 떠나가면 한줌의 소금에 몸 전체가 절여집니다. 이것이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점입니다.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바다를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0장 10절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속에는 이미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와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그 분의 생명, 그 분의 능력이 이미 여러분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손가락을 칼로 베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이 피를 멈추게 하고, 다시 새 살이 나게 하여 상처를 아물게 해 줍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은 우리 몸의 건강을 유지시켜 나가는 힘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의 신앙을 유지시켜 나가는 힘이 됩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믿음을 떠날 수 있는 위기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울부짖을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다시는 교회에 나오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음의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회개하고 돌아왔다고요? 내가 마음을 다시 잡고 돌아왔다고요?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의 삶을 감싸주시고 위로하시고 상처를 치유하셔서 지금까지 믿음의 삶을 지탱해 온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에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 교회를 지탱해 온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일꾼이 많아서 입니까? 아니면 재정이 넉넉해서입니까? 그러면 일꾼들이 없고 돈이 없으면 교회는 무너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일꾼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때도 있었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든든히 서갔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으로 유지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해도 내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한은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게 하실 것이고, 결국에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다음으로는 '평안'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병들었을 때, 절망이나 슬픔가운데 빠졌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 누리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 이런 믿음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제가 늘 주장하는 말이 하나있습니다. 홍콩에 3년 이상 사신 분들은 수시로 옆 사람에게 '나 어때? 나 요즘 괜찮아?'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홍콩에 오래 살다보면 사람이 조금씩 이상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인가 제 나름대로 연구해 보았더니 이런 결론이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정든 이웃들과 헤어져 나와 살다보니 믿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를 믿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대신 해결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 자기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3년 나와 살다보면 점점 자기 스스로를 믿고 살게되는데, 문제는 자기 스스로를 믿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평안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점점 공격적이 되고 불안해지고 신경질적이 되기 쉽습니다. 자그마한 일에도 흥분을 하고 난리를 피웁니다.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홍콩에 오기 전 한국에서 사실 때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보다는 훨씬 여유 있고 부드러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당장 옆 사람에게 '나 어때?'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괜찮아. 난 물어볼 필요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분은 증세가 상당히 심각하게 진행되신 분입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고 살 때에 평안이 있습니다. 부모 밑에서 사는 아이들이 평안이 있고, 자녀들의 효도를 받으면서 사는 부모가 평안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버리지 않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평안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결코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던 그 사람도 마음이 변하여 내 곁을 떠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믿고 사랑했던 부모 형제도 세월이 흘러 다 내 곁을 떠나지만 하나님만은 결코 떠나지 아나하십니다. 사람은 힘이 부족하여 약속을 지킬 수 없지만 하나님은 어떠한 약속이든지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 언제나 변함없으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평안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잃어버려도, 내 재물과 명예와, 내 건강과 심지어 내 목숨까지 잃어버린다 해도 하나님만은 언제나 변함없이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 이것이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비밀입니다. 이것이 영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두 번째 특권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마치 빛과 어두움의 관계와 같습니다. 어두움은 오직 빛으로만 몰아낼 수 있습니다. 어두움을 몰아낸다고 부채질을 하고 선풍기를 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등불을 밝히 켤 때에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육신에 속한 것들을 죽이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머리 속에 있는 육신에 속한 생각들을 영에 속한 생각들로 밀어내십시오. 여러분의 가슴속에 있는 세상을 향한 욕망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밀어내십시오. 세상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손과 발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쁘게 사용하십시오. 그리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안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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