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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끊을 수 없는 사랑 (롬 0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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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설명해 보라고 하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문제를 놓고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습니다.

한국에 가면 '구원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경험을 하신 분들도 계실 줄 아는데, 이 사람들은 아무리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을 만나도 대뜸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구원받았습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서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면 '당신은 지금까지 잘못 믿으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대로 따라해 보십시오.' 이렇게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목사든 장로든 가리지 않습니다. 그 누구라도 자기들 방식대로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홍콩에도 들어와서 교인들을 어지럽게 만들어놓고 있는데 동신교회 김성준목사를 제일 원수같이 생각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D. B.에 있는 골프장에 가면 매일 제 이름이 골프장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보다 정확한 개념을 갖고 계실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은 선물로 받습니다. 누구도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네가 일어나서 100미터를 달려가면 너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죽은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100미터를 달려갔고 드디어 약속대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살아난 사람입니까? 100미터를 달려가서 골인한 순간부터 살아났습니까? 이 사람이 말을 알아듣고 일어나서 달려갔다는 것은 그가 이미 그 순간에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이미 우리 속에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있는 영을 다시 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 고 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 볼 때는 맞는 말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일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창세 전'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아직 '나' 라는 존재가 이 땅에 있기도 전에 이미 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택하셨고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나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2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냥 이 말씀만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해야 살려주겠다던가 하는 조건이 없습니다. 공양미 삼 백석을 내라든가, 아니면 40일 금식기도를 세 번 하라든가, 이런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말만 있습니다. 원인이나 과정이 없이 결론만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문제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서, 내가 스스로 결단하고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거나, 내가 무슨 공로를 세워서 그 대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값없이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 없습니다. 가혹 가다가 저같이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은 다 불교 쪽으로 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가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도를 닦고 내가 고행을 하고, 내가 공로를 세워서 그 대가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매우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한창 뜨고 있는 김용옥이라는 사람처럼 머리 좋다고 하는 사람은 다 불교로 가있고 별 볼일 없는 사람만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제 말이 웃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 그 증거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린도교회에도 예수 믿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은 전부 머리 나쁜 사람, 능력 없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IQ가 세 자리 수 이상인 분들이 계시면 예수 믿게 된 것이 특별한 은혜로 알고 감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제가 합리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값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족 중에 제일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이 가장 IQ가 낮은 사람이고, 끝까지 예수를 안 믿겠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가족 중에서 가장 IQ가 높은 사람입니다. 그걸로 위안을 삼으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내가 손들고 일어나서 '오늘부터 예수 믿겠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내 죄를 대속하시고 나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7절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말씀했습니다. 이 구원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다른 말로 구속(救贖)이라고 합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대가를 주고 구출한다.' 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 노예를 주인에게서 해방시키려면 돈을 주고 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속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1장은 우리가 구속된 것이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금이나 은 같은 것을 대가로 지불하고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린 피를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잠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눈앞에 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세 번을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데 붉은 핏방울이 되어 떨어졌습니다. 온 몸의 힘을 다 짜내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침묵하셨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피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끝내 외면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외면 당한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동참하셨던 그 분이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의해 손과 발에 못박히신 채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침묵하셨습니다. 끝내 사랑하는 아들의 절규를 외면하시고 숨이 끊어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아파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아들의 간구를 외면해야 하셨던 하나님, 십자가에 달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는 아들을 보면서도 끝내 눈을 감으셔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은 더욱 아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내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숨이 끊어지게 만드셨고, 무덤에 묻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외침을 외면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시면서도 귀를 막아버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을 대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 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보다도 우리를 더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본문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분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이신데 이제 여러분에게 무엇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얼마든지 더 사랑하시고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입을 열어 기도할 때에 응답해 주실 것이고, 내가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고, 내가 위험에 빠질 때에 건져주실 것이고, 내가 넘어졌을 때에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그 사랑 가운데 살려고 하지만 우리들로 하여금 좌절하게 만들고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본문 33절의 말씀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우리를 죄인이라고 송사하고 정죄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정죄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이 나를 송사하고 정죄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때는 구원의 확신 가운데 찬송하고 기쁘게 살아가도, 또 어떤 때는 '내가 정말 구원받았나? 내가 정말 예수를 믿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왜 이 모양으로 사는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중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는 먼 나라에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는 거지꼴로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반갑게 맞아서 다시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줍니다. 집나간 자식이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 온 아들처럼 대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성경에는 거기까지만 나왔는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제가 속편을 씁니다.

집에 돌아 온 이 아들은 며칠 동안은 정말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과거의 일을 한 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매일 좋은 음식으로 영양보충을 해주었습니다. 또 매일 쇼핑을 데리고 나가서 좋은 옷을 사주었습니다. 아들은 너무나 감사해서 이제는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석 달이 지나자 점점 일하는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집에 돌아왔을 때의 감사한 마음도 사라지고, 머슴의 신분이라도 좋으니 열심히 일하겠다는 마음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옛날 아버지 집을 떠나서 마음대로 돈을 쓰며 즐겁게 살던 일이 아스라한 추억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시골구석에서 농사만 짓고 사는 것이 내 팔자인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부르더니 아무개네 집에 가서 돈 빌려준 것을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데 막상 큰돈을 손에 쥐니까 욕심이 생겼습니다. 한번 다시 멋있게 놀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포장마차에 가서 딱 한 잔만 하려고 했는데, 그만 2차로 룸살롱, 3차로 가라오케에 가서 실컷 놀다보니 그만 돈을 다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오늘도 애타게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고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이 노래를 얼마나 불렀습니까? 그런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다시 죄짓는 자리에 앉아있고, 다시 하나님을 떠나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좌절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무능력함에 좌절합니다. 작심 삼일이 아니라 작심 세 시간도 안되는 것에 스스로 실망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더 이상 나를 속이는 일을 하지 말자.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이 되지 말자. 떳떳하게 나가서 놀다가 나중에 노는 게 싫증나거든 그때 돌아와서 정말로 예수를 믿어보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아이가 있었는데 공부도 못하고 부모님 말씀도 안 듣고, 매일 말썽만 부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부모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저 같은 놈은 없어져야 합니다. 저는 오늘 부로 집을 나가겠습니다. 부모님, 오늘부터 이 불효자식은 없는 것으로 치시고 부디 행복하게 사십시오.' 부모님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 잘 생각했다. 이제야 철이 나는구나. 어서 가보아라.' 그러겠습니까? '이 웬수야, 나가긴 어딜 나가냐, 집을 나갈 바에는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 한강 물이 왜 저렇게 깊은 줄 아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한이 없는 사랑인가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얼마든지 용서해주시고 얼마든지 품에 안아주시고 다시 한번 새로운 소망과 능력으로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말씀합니다. 혹 여러분들이 죄짓는 자리에 있다 해도,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는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꼭 기억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외적인 환난입니다. 본문 36절은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환난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우리 나라가 지난 몇 해동안 경제위기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가 이런 위기를 겪게된 원인 중에 일부는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저는 몇 년 전부터 우리 나라가 못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살게 되어서 유익되는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죄지은 일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잘 살 때에는 인신매매단이 많이 설쳤습니다. 술집에 사람이 모자라서 길거리에 지나가는 여자들을 마구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경제위기가 닥치자 인신매매단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못사는 것도 유익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잘 나갈 때도 있고 때로는 어려움을 만나서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잘못될 때는 덜 사랑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감기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주사를 맞혔더니 울고불고 난리를 칩니다. 다음 날 일기장을 들추어보았더니 '우리 엄마는 계모인가보다. 그렇지 않아도 아파 죽겠는데 더 아프라고 주사를 맞히고 쓴 약까지 먹으라고 한다. 내가 조금만 더 크면 반드시 친 엄마를 찾고야 말리라.' 써놓았습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우리가 미워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우리를 포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업에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 내가 그동안 기도를 안했더니,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입니다. '내가 기도를 안했더니 사업을 실패하게 하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도하게 하시려고 사업에 실패하게 만드셨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실패한 것이 벌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작은 것이 아닙니다.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칭찬해 주시고, 못하면 못하는 그 일로 인해서 깨달음을 주시고 잘 하게 만드시는 그런 분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미혼인 총각들이 있으면 제 이야기를 잘 들어두십시오. 좋아하는 여자가 자꾸 거절을 하면 아예 그 여자가 살고있는 집을 사버리세요. 이사를 가면 아예 그 동네를 다 사버리십시오. 다른 도로 이사를 가면 대한민국을 다 사버리십시오.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면 아예 지구를 몽땅 사버리십시오. 이제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산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도망가는 것보다 더 넓은 마음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불순종하는 것보다 더 넓은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그래서 본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이 사랑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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