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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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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린도전서 15:50-58)

레이몬드 무디 (Raymond Mody)라는 미국의 의학박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을 150명이나 만났다고 합니다.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는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대부분 심장병 환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영화에서 보시는 것처럼 심장이 멈춘 사람을 심장 마사지를 한다거나 전기충격요법으로 소생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장병 환자 중에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돌아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체험담을 수집하여 '삶, 그 다음의 삶' 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어 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남자가 죽어가고 있다. 그가 가장 심한 육체적 고통에 도달했을 때, 그는 자기가 죽었다고 의사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바로 그 때 그는 갑자기 자신이 몸밖에 나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자기의 죽은 몸을 둘러싼 사람들이 슬피 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의 삶의 중요한 사건들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되풀이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되었고, 터널 끝에 이르렀을 때 이 세상의 빛과는 전혀 다른 신비한 빛이 눈부시게 비쳐오는 것이 보였다. 그곳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삶과 저 세상에서의 삶의 경계선이었다. 그는 너무도 기쁘고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아직 죽음의 때가 오지 알았다는 이유로 그는 다시 지상의 삶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다시 살아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고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그의 경험은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대체로 이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무디박사의 보고서 중에 흥미로운 것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150명 모두가 마친 입을 맞추기나 한 듯이 똑같은 경험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이 세상에서의 삶 다음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 다음의 삶이 어떤 것인가는 알지 못합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는 알 수 있지만 그 세계가 어떤 것인지, 그 세계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존재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지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법관이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직장 동료들은 한 자리가 비게 되었으니 승진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죽은 것은 그 사람이지 내가 아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어떤 사람만 우연히 죽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은 그 때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언제 우리 앞에 죽음이 닥쳐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대학이나 신학교 동창회에서 동창회 명단을 보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단에 간혹 '소천' 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옛말대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데는 순서가 있지만 세상을 떠나는데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죽음은 20년 후에, 혹은 30년 후에 다가올 수도 있고, 혹은 오늘 당장 우리 앞에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죽을 시기를 알고 인생을 정리하고, 만날 사람 만나고, 남길 말을 남기고 떠나는 사람이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죽음의 순간이 미리 예고된다면 좋으련만, 죽음은 언제 우리 앞에 다가올지 모르는 젓이기에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무디박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돌아온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죽음의 세계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 준 사람은 없습니다. 인류역사를 통해서 많은 현명한 사람들이 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해답을 얻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수많은 과학자들,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이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해답을 얻어내지는 못하였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인간은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이상하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주전 400년경에 '델피'라는 희랍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공의가 무엇이며, 선이 무엇이며, 자기를 아는 지식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는 시장 길거리에서 닥치는 대로 젊은이들을 만나 진리가 무엇이냐를 묻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70세 되던 해에 아테네정부는 그가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신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한 달을 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의 제자들이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만들어 주었지만 그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사약을 마시고 죽어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남자답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죽음의 현장을 목격한 제자 플라톤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죄로 물들고 타락한 인간의 육체로부터 그의 영혼이 자유를 얻는 구원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거룩한 것인데 더러운 육체가 영혼을 가두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육체라는 더러운 감옥으로부터 고귀한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영혼의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믿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여기 죽음을 대면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 앞에 선 예수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소크라테스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그는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붙들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 하셨습니다. 또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려서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였습니다.

여기 소크라테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겁자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죽어간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위대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서 속에는 놀라운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죽음이란 인간과 인간의 역사를 파괴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영혼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자유함을 얻게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육신 속에 있는 영혼은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장엄하게 죽어갔지만 결국 그는 죽음에 삼킨바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그의 영혼이 죽임을 당하는, 바로 첫 사람 아담이 겪었던 고통이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살리기 위해 그 분의 살이 찢겨야 했듯이,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그 분의 영혼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아야만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단순히 고통스러운 육체로부터 도피하는 죽음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령한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이 죽임을 당하고 그 분의 육신의 호흡이 완전히 끊어진 다음에 그 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새로운 육신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새로운 영혼의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치 첫 사람 아담에게 생명을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새로운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옛 사람 아담에게 속해있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으나,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있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소크라테스, 그는 비록 장엄하게 죽어갔지만 다시는 제자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에 삼키운 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그는 그렇게 고뇌하며 고통스럽게 죽어갔지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제자들 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죽음을 삼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무도 감격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외쳤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향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하셨습니다. 또한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해서도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말씀하셨습니다.

'죽었다'는 것과 '잠들었다'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눈을 감고있는 상태이며 무의식의 상태이지만, 죽었다는 것은 미래의 소망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잔다는 것은 오히려 내일을 향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잠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언어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또한 그 분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잠자는 상태로 변화된 젓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위한 휴식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살던 모든 사람은 죽음이라는 잠을 자게됩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는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활에 두 가지 형태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예수님께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4장 15절에도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말씀하였습니다. 누구나 잠을 자다가 깨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천국으로 향하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부활이 없다고 믿으며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도 역시 잠을 자게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기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지옥으로 떨어지고 난 후입니다.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부활할 것을 분명히 믿고, 믿음으로 살던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도 역시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게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눈앞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 부활을 믿지 아니하던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사는 사람, 분명한 부활의 믿음가운데 사는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생과 수고를 다 마친 후에 잠들었다가 그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순간 우리 주님의 아름답고 인자하신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죽은 영혼은 다시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영혼이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굳게 닫혀진 무덤의 문을 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담대하게 외치면서 죽음의 세력을 삼키어버리는 영광스러운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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