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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 안의 아들 (딤전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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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의 아들 (딤전 1:1-2)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베소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은 특별히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 교회가 가꾸어나가야 할 모습과 성도의 삶에 관한 지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와 관련된 바울의 또 하나의 편지가 바로 이 디모데전서입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이고 디모데전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편지의 내용이나 성격이 어떻게 다를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겠지요?

바울이 에베소서를 쓴 것은 로마의 감옥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옥에 갇힐 만한 죄가 없이 감옥에 왔기 때문에 흉악범처럼 취급되지 않고 가택연금 정도의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해서 감옥에 갇힌 것으로 끝이 나는데, 거기 보면 바울이 셋집에 살았고 군사 한 명이 보초를 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게 바울의 집을 방문할 수 있었고, 그런 방법으로 바울은 복음을 2년 동안이나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후 바울은 무죄판결을 받아서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지역들을 순회하며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했는데, 이 때 에베소 교회도 방문했을 것입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헤어졌던 에베소 교인들과 감격의 상봉을 했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생겨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 교회를 돌보도록 했습니다. 마게도냐에 도착한 바울은 그래도 에베소 교회가 걱정되어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디모데전서입니다.

우선 이 디모데전서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라는 점에서 다른 서신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편지들은 대부분 교회 앞으로 보내는 공적인 편지이지요? 더욱이 이 편지의 수신자인 디모데는 껄끄러운 대상이거나 예의와 격식을 차려야 할 사람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부를 만큼 친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속마음이 허심탄회하게 표현될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가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공식석상에서 만나는 것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 다릅니다.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많은 사람 앞에 연설하고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된다면, 이 디모데전서에서는 까페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바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아들이라고 부르는 이 디모데는 어떤 사람입니까?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따라서 두 개의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중에 한국어와 영어 둘 다 능통한 사람이 있다면 굉장히 주가가 높겠지요? 우리는 한국말에는 능통하지만, 영어가 안되니까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반면에 우리 자녀들은 앞으로 영어는 자유롭게 할 수 있겠지만 한국말에 능통하지 못해서 역시 한쪽에서밖에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잘 가르쳐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지요? 유대와 헬라의 두 문화를 모두 이어받은 디모데는 유대교라는 민족종교의 모태에서 나온 기독교 복음을 그리스 문화가 지배하고 있던 로마세계에 확산시키는 데 꼭 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고,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경건과 유대교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만난 것은 바나바와 대판 싸우고 헤어진 다음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루스드라에 이르렀는데, 그 지방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디모데를 만나고는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당장 바울의 선교팀에 합류시켰습니다. 그 후로 디모데는 바울의 선교팀에서 핵심인물이 되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사역과 삶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많은 편지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언급합니다. 로마서에서는 마지막 인사에서 나의 동역자 디모데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했고(롬 16:21), 고린도후서와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빌레몬서는 바울과 디모데가 공동으로 보내는 편지처럼 되어 있습니다. 또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서 교회를 위로하고 또 교회 안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지만, 바울이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은 디도와 더불어 이 디모데 뿐입니다. 그만큼 바울의 신임과 사랑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바울은 디모데를 이렇게 부릅니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이렇게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아들이 없었습니다. 충현교회도 결국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강원룡 목사도 아들에게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물려주었더군요. 빌리 그래함 목사도 아들에게 자기 사역을 물려주었습니다. 세습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지만, 대를 이어 주의 사역을 감당한다는 좋은 면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바울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바울의 대를 이어 훌륭하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나갔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아들이 없는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이어받아 수행할 사람을 아들로 삼습니다.

그렇지만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아들을 삼았다기보다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로 삼은 것이 아니라 낳은 것입니다. 아들로 삼았다는 것과 낳았다는 것은 차이가 있지요? 만약 디모데가 처음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면 아들로 삼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지도와 사랑에 의해 디모데가 믿음을 갖게 되었고, 또 그 믿음이 자라고 성숙했다면 낳았다고 해야겠지요. 디모데가 고향에서부터 모두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바울을 만난 후였습니다.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비단 디모데 한 사람이겠습니까? 바울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믿음의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모든 생물체는 개체가 영원하지 못하다는 제한 때문에 재생산이라는 메카니즘에 의해 종족을 보존합니다. 따라서 재생산의 능력과 속도에 따라 번성과 멸종이 결정됩니다. 개체의 소멸속도보다 재생산의 속도가 빨라야 번성할 수 있고, 만약 소멸하는 수보다 재생산의 수가 많지 못하면 멸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개체가 얼마나 재생산을 해내느냐 하는 것은 그 종족이나 집단의 존속과 번성에 얼마나 공헌을 하느냐 하는 것이 되겠지요. 재생산을 하지 못한 개체의 삶은 소모적인 생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재생산이 필요 이상으로 초과되어 그것 때문에 멸종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희귀한 품종이나 멸종을 초래할 위협에 노출된 품종에게는 재생산의 양이 절대 선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면서 그 교회가 마땅히 행해야 할 사명으로 정하신 것이 바로 재생산이었습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으니 안심하고 잘 살아라.' 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하셨지요?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자신과 똑같은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교회의 사명 자체가 재생산이기 때문에 재생산이 너무 많이 이루어져서 붕괴될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재생산이 되지 않고 있는 교회는 가동이 멈춘 공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재생산을 바울은 믿음 안의 아들이라는 말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들 하나 낳기가 쉽습니까? 가게에서 물건 하나 사오는 것처럼 간단한 일인가요? 수많은 날들을 고통과 인내로 지내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희생이 없이는 아들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의 고통을 감내하며 해산을 하게 됩니다. 믿음의 아들을 낳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명을 잉태하여 이 세상에 출산해 내는 것과 똑같이 한 생명을 구원과 거듭남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출산해 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인내와 희생이 없이는 감히 믿음의 아들을 낳겠다고 나설 수 없는 일입니다. 한 영혼 얻는 일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아들을 낳아 놓으면, 아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같습니까? 그 아들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큽니까? 무엇으로 그 기쁨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한 영혼을 얻어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바울의 말을 보면 믿음 안의 아들 디모데로 인한 큰 자부심과 기쁨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장성해서 큰 인물이 되었다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어요? 또 그 아들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세습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기 하던 일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 아닙니까? 내가 낳은 믿음의 아들이 세례를 받고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아 섬기게 되는 것을 보는 기쁨이 얼마나 클까요?

바울을 보세요. 심혈을 기울여 세우고 사랑으로 양육한 에베소 교회가 감옥에 갔다가 몇 년만에 와보니 여러 가지 문제로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바울이 다시 에베소에 남아 교회를 돌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 몸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에게는 맡길 수 없고,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고, 그럴 때 내가 한 명 더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가능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아들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특별히 디모데를 참 아들이라고 강조해서 말하는 것은 자신이 가서 해야 될 일을 맡길 만큼, 즉 바울 자신의 분량에 이르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일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것이지요.

교회는 재생산을 사명으로 부여받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나 혼자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소모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해산의 수고와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그 기쁨을 사모합시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아들 OO에게' 또는 '믿음 안의 아들 OO에게'라고 부를 수 있는 아들을 낳도록 합시다. 교회가 교회 간판만 달았다고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역할을 해야지요.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재생산을 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믿음의 아들을 낳고 재생산을 하게 될 때, 우리 교회가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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