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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단 많은 에베소에서 (딤전 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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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많은 에베소에서 (딤전 1:3-11)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 이래 사탄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교회를 흔들어댔습니다. 스데반을 시작으로 해서 수많은 성도들을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온 삶을 바쳐 복음을 전했던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교회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얼마나 사탄의 공격이 집요했었는지를 알 수 있는 현장입니다. 사도시대 이후, 소위 속사도시대를 거치면서 교회의 황금기를 일구었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사탄의 교회 흔들기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거기서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또 감히 그 이름을 전하려고 하지도 못합니다. 사탄이 휘두르는 창과 칼 앞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맥없이 쓰러져 왔을 뿐입니다. 교회에 대한 사탄의 위협은 이처럼 엄청난 파괴력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또 다른 전략은 거짓말입니다. 이 방법은 무력을 사용한 핍박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교회에 입혀 왔습니다. 교회 안에서 거짓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현혹하고, 또 마치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처럼 위장하고서 성도들을 파멸로 데려가는 일을 사탄은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사탄의 이런 작전을 우리는 이단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다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지 한두 세대가 지나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이 문제가 에베소에서 심각했던 것은, 그곳이 소아시아의 수도로서 헬라종교의 중심지였고 또한 학문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해밀턴이라는 도시에 유난히 이단의 세력이 강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아직 저는 잘 모르겠지만, 썩 기분좋은 일은 아니지요? 어떤 분은 해밀턴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곳이 그렇다고 하기도 하고, 또 안개가 많이 끼는 지역에 악한 영들의 활동이 왕성하다는 얘기도 하는데, 글쎄 그런 건 잘 모르겠고, 확실한 것은 이곳에 이단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단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친다면 이단이라고 할 것도 없고 위험하지도 않지만,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처럼, 마치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가장하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거기에 현혹되어 넘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단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에베소 교회를 바로잡기 위해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남으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아마도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단과 맞서 싸우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많지 않습니다. 우선 그들은 비이성적인 집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자신들만의 논리로 철저하게 무장이 되어 있어서 다른 말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은 무조건 틀렸고 자신들이 확실히 옳다고 믿기 때문에 얼마나 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달라붙는지, 정말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요. 이처럼 비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는 폭력과 테러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보아왔던 일 아닙니까? 평생 이단과의 전쟁을 해 왔던 탁명환 씨가 수십번 테러를 당했고, 결국은 그렇게 목숨을 잃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안고 있는 에베소 교회를 누가 기꺼이 맡겠다고 나서겠습니까? 그래서 내켜하지 않는 디모데에게 바울은 억지로 떠밀다시피 에베소 교회를 맡겼습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권한 것은' 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도록 한 것은 거기 있는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 안에 이단적인 주장을 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는 것이지요. 온 교회가 이단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이 몇몇 사람의 거짓 선생들의 위험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머지 않아 온 교회를 완전히 잘못된 길로 끌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아주 단호합니다. 그들을 잘 타일러서 설득하는 것도 아니고, 다시 잘 가르쳐서 깨닫도록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명하여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이단을 단호히 금지시키고 뿌리를 뽑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이 거짓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흔들어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공작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거짓말을 하고 이단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속성상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마귀를 가리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하셨습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린 곳에 원수가 몰래 와서 가라지를 뿌린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심긴 곳에 와서 거짓 진리를 심고 그 거짓말로 진리를 왜곡해서 하나님의 성도들을 빼앗아가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나는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지요. 그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저주와 형벌이 그대로 오늘날의 이단들에게 해당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고 넘어가는 것은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는 교회는 부패하고 교만한데 비해서 이단이라고 정죄를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사랑이 넘치고 겸손하며 진실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이단보다 사랑이 넘치고 진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우리에게 입이 백 개가 있더라도 할 말이 없고, 우리가 반성해야 될 일이지요. 그렇지만 한편 이단들이 그렇게 보여지는 것은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일꾼들도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큰 일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지적했습니다(고후 11:14).

또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라고 하지요? 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근거가 없는 전설들,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각색해서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런 현상은 중세시대에 와서 전성기를 맞게 되었는데, 교회와 신앙의 이름을 빌린 미신과 무속신앙이 창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에베소에서는 고대의 그리스 로마 신화와 기독교나 유대교 사상이 적당히 혼합되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거나, 혹은 그리스 철학과 종교의 방법론으로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여 전혀 엉뚱한 결과를 도출해 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언뜻 보기에 매우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접해보지 못했던 사상, 남들은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진리의 발견인 양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길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학문의 발전은 다른 사람들이 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발견해 냄으로써 성취됩니다. 그렇지만 뭔가 새롭고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다 진리가 아니고 진보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구세군 사관 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저를 앉혀놓고 성경을 읽은 다음 나름대로 심오한 해석을 하는데, 얼마나 새롭고 신기한지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목사님들에게서 들어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말씀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분은 천재 아니면 완전히 엉터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엉터리에 가까운 해석이었어요.

때로는 전혀 엉터리 같은 말에도 우리가 홀릴 수가 있습니다. 이단들의 주장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그런 엉터리도 없는데, 당시에는 어쩌면 그렇게 신기하고 진리처럼 들렸는지, 그렇게 속아넘어가는 데는 공부 많이 한 박사도 소용없고, 수십 년 쌓아온 믿음의 연륜도 소용없습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가장 비이성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일교에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교수들이 그렇게 많이 참여했었다는 것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수십 년 복음을 증거하던 목사가 어느 날 갑자기 이단에 넘어가는 것도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쨌든 이단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사실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데 도움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가령 안식일 논쟁도 그렇고, 144,000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도 그렇고... 사도의 말처럼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말다툼만 만들어낼 뿐입니다. 그래서 이단은 일단 할 수만 있으면 상대를 안 하는 것이 편합니다. 물론 그분들을 변화시켜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도 우리의 사명이기는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제대로 반박을 할 수도 없고, 지식이 충분하지 않으면서 섣불리 논쟁을 할 수도 없고, 또 자칫 잘못하면 그들의 논리에 말려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피하고 안 만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또 그런다고 기독교인들이 사랑이 없다는 둥, 무정하다는 둥, 이런 비난을 받기도 해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네요. 제일 좋은 방법은 이단에 대해 대비를 잘 해 두고, 또 그들을 대할 때 그 사람들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으로 사랑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겠지요. 너무 어렵습니까? 하지만 이단 많은 해밀턴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일종의 교권 다툼이지요. 그러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서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선생이라고 사람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엉터리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이 이단을 만드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런 일이 많습니다. 신도들로부터 신처럼 받들어지는 교주의 주변을 보세요. 신도들의 열심이나 순진함과는 대조적으로 얼마나 거짓과 탐욕으로 물들어 있던가요? 이것은 하나님께 반역해서 심판을 당하게 된 사탄이 무지한 사람들을 꾀어서 함께 멸망으로 가려는 것과 똑같은 패턴이지 않습니까?

에베소 교회에서 이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은 교회에 상당한 해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지만 내용은 율법에 대한 것인데, 율법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바울 아닙니까? 또 그 율법이 복음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가장 정확히 파악한 사람도 바울입니다.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가 대장 노릇을 하다가도, 호랑이가 다시 나타나면 여우는 물러가야지요.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참된 선생 바울 앞에서 이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진리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진리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단 많은 이 해밀턴에서 살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수호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이단이 발붙일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단에 속아 거짓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일도 필요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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