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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제라고 경히 여기면 (딤전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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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라고 경히 여기면 (딤전 6:1-2)

지상에 교회가 존재하면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사랑이 넘치고, 어떤 교회는 파가 나뉘어서 서로 으르렁거립니다. 어떤 교회는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어떤 교회는 1년이 멀다하고 큰 문제들이 터집니다. 이처럼 교회마다 각기 특징이 있습니다. 이러한 각 교회의 특징과 모습에 따라서 우리는 '그 교회는 참 좋은 교회다' 또는 '저 교회는 아주 좋지 않아'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이처럼 교회가 좋은 교회나 좋지 않은 교회가 되는 것은 무엇에 달렸을까요? 교회의 예배당 건물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교회가 됩니까? 프로그램이 좋으면 좋은 교회가 됩니까? 목사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면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교회는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으로 평가됩니다.

교회는 구성원 각 개인의 삶과 상관없이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각 사람 하나 하나의 모습이 연합되어서 교회라는 공동체의 모습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각 개인의 삶이 아름답게 변화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건물이나 프로그램의 내용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에 의해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교회를 좋은 교회, 아름다운 교회로 가꾸어가기 위해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이겠어요? 교인들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해야 할 일은 성경말씀을 잘 가르쳐서 지식에 통달한 교인들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 말씀이 각 개인의 삶 구석구석에서 실천되고 그래서 사람이 변화되도록 도전을 주고 자극을 하는 것도 목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목사가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목사가 별 걸 다 간섭이야, 목사가 교회 일이나 잘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남의 사생활까지 간섭하는 거야? 아무리 목사라고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나도 어른인데, 나도 체면이 있고 내 가치관이 있는 것 아니야?' 목사는 이런 불만들이 나오는 것을 각오하고라도 성도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목사라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요즘 저 자신에 대해서 많이 반성하게 되는 것 하나가 이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몰라요.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의 인생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전혀 모른단 말이지요. 저는 사실 며칠 전에 장로님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신 것에 대해 충격이 상당히 컸어요. 장로님 나름대로는 많은 생각과 계획이 있으셨겠지만, 저는 전혀 알지 못했단 말이죠. 늘 가까이 있고 날마다 얼굴을 대하면서도 말이지요. 이걸 보고 동상이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도대체 어떻게 사세요?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우선 제가 너무 조심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저도 여러분의 사생활 침해 같은 것은 하고 싶지도 않구요. 그래도 어떻게 사는지, 말못할 어려움이나 고민은 없는지 관심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에요. 그렇지만 조심하다 보니까 무관심한 것처럼 되어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목사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상담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쓰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런 상담 요청하는 분이 하나도 없어요. 문제가 없어서 상담할 것도 없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문제가 많으면서도 목사한테는 비밀처럼 감추는 것 같아요. 혼자서 고민할 것 다 하고, 괴로워할 것 혼자서 다 괴로워하고, 그리고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그런 일이 있었노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도움이 되는 목사가 아니에요. 또 필요한 목사도 아니지요. 그렇게 되면 결국 목사와 교인들간에 온전한 신뢰관계가 형성될 수 없지 않겠어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로 그 선을 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현상유지를 해 나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목사가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교인들의 삶을 권면하고 가르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목회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이 편지에서 교인들의 삶을 간섭하라고 말합니다. 2절 마지막에서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고 하지요? 이것들이 뭔가 보세요. 우선 1절에서는 종이 상전을 섬기는 태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종이 상전을 잘 섬기든지 아니면 삐딱하게 반항하든지, 목사가 무슨 상관입니까? 목사는 이 종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헌금 많이 하고 교회 일에 부지런한 것만 챙기면 되지, 왜 주인을 섬기는 태도까지 간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 구절의 배경은 노예제도입니다. 당시 노예는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사회를 떠받치는 하부구조였습니다. 이 노예들이 경제, 사회, 문화, 학문,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활동함으로써 로마라는 특수사회가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고대의 이 노예제도는 근대의 노예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근대의 노예는 인종차별에 근거한 것으로서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것이었지만, 고대의 노예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당시의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한 성경의 가르침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의 통상적인 사회생활, 특히 직장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상급자를 섬기거나 대하는 경우라면, 이 구절의 의미가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지요.

성경은 노예제도의 부당성과 그 폐해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그 제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에 동구권이 붕괴되고 공산주의가 몰락했을 때, 서구권에서는 악한 제도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위대한 승리라고 자화자찬을 했겠지요. 그러나 공산주의가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인간을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이 없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를 맡겨보십시오. 그야말로 지상낙원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탐욕과 지배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를 맡겨 보십시오. 생지옥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제도가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도를 악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선할 때 제도가 선하게 운용될 수 있는 것이지요. 성경이 관심을 가진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제도에 따라 좀더 선하고 좀더 악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의 선함과 악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결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최선의 제도를 만들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완벽한 제도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여러 제도와 규범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불편한 것도 많고 내 가치관에 거스리는 것도 많아요. 그러나 그 제도와 규범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의 논의는 두 번째 문제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로마 제국 안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생겨나면서 많은 노예들이 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어쨌거나 노예는 노예제도라는 현실적인 제도 안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집단입니다. 즉 제도에 대한 불만계급일 수 있지요. 그러던 노예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참된 인간의 회복과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나 자유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 없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언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자기의 소유로 그렇게 부르신 노예들에게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 제도를 거부하고 봉기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그 제도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현실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더 잘 믿는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회생활을 희생해야 교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지요. 이 세상과 결별해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다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적어도 오늘 이 말씀에 의하면, 사회생활에 충실하지 않고는 결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에서나 학교에서, 즉 교회 밖에서 그 제도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충실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충실하지 않을 때,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규제하는 원칙이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제도나 법이 금지하는 것을 행했을 때, 문제는 하나님의 교훈이 훼방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은 불법을 행해도 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밝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행동을 제약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집사님은 자동차 뒤에다가 기독교인이라는 물고기 표지를 붙였는데, 그 이유는 운전을 하면서 난폭운전과 법규위반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2절의 말씀은 이 세상의 제도에 의해 형성된 관계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경우입니다. 노예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주인도 예수를 믿는 경우입니다. 상당히 미묘한 문제지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는 선언과 믿음을 주인과 종이 함께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예는 주인을 만만하게 보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 같이 평등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선언이 우리의 현실적인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어집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해서 한국 사람과 키위의 인종적인 구별이 없어지나요? 마찬가지로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더라도 노예와 주인의 구별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라는 선언이 노예들로 하여금 주인을 섬겨야 할 의무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가 회사에서 사장이지 교회에서도 사장이야?' 이런 말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사장과 종업원이 같이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해서 당장 회사에서 사장과 종업원의 역할에 변화가 생길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하게 될 때, 교회는 공동체 의식의 붕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 자동차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른 정비소에 가면 100달러가 들 것입니다. 그래서 임집사님의 정비소에 갔습니다. 같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니까 80달러에 해 줄 거라고 기대를 하고 말이죠. 그런데 임집사님도 100달러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이 상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이런 태도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친구 사이에는 돈거래를 안 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요? 친할수록 예의를 지키고 우정을 깨뜨릴 여지가 있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입니다. 교회 안이라고 해서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가 무시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니까 100달러 짜리를 80달러에 해 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물론 임집사님 편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찾아왔으니까 100달러를 다 받지 않고 80달러만 받는다면, 이것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돈 내야 할 사람이 그것을 아예 처음부터 계산하고 찾아가는 것은 안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온당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바울은 상전이 믿는 사람일 때는 안 믿는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더 잘 섬기라고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가서 물건을 살 때는 다른 데서 깎는 것처럼 악착같이 깎아서는 안 된다고 읽을 수 있겠지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 종이 섬김으로써 유익을 받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사랑을 받는 사람,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종은 상전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함께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종으로서 주인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일도 쉬운 것만 맡겨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잘 섬겨서 그 주인에게 더 큰 유익을 주는 것이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임집사님이 정비소를 열었다면,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임집사님의 정비소에 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같은 교회 다닌다고 싸게 해 주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같은 한국 사람이라서 못하는 영어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까?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집이 장사가 잘 되도록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 장사가 잘 되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결국 인간관계입니다. 그런데 보통 인간들의 관계가 아니라 특별한 인간들의 관계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인간들의 관계지요? 그런데 서로 사랑하니까 이 정도는 이해하겠지 하는 생각에 서로 실례를 범하고 각자의 위치를 망각하게 되면, 그야말로 형편없이 특별한 사람들의 관계로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가는 중요한 한 가지 방법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를 만만하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상전도 같은 형제라고 경히 여기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서로를 더 존중하고 더 아껴줄 때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 튼튼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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