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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시 골치 아픈 이단 (딤전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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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의 처음 부분에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도록 한 이유가 에베소에 창궐하고 있는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의 첫 번째 교훈은 이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다시 교훈하는 것이 이단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가 목회를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교훈과 조언을 했는데, 왜 유독 이단에 관한 이야기는 재차 강조를 하고 있을까요? 목회하는 데 필요한 것이 이단에 대처하는 것뿐입니까?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데 있어서의 지침, 교인들 사이의 인간관계, 또 대외적인 활동 등, 목사가 신경써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서 언급한 내용을 편지 말미에 다시 들고 나온 것을 보면 바울의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다스리고 목회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이단에 대처하는 것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이단에 대처하는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까?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것, 목사가 교인들을 대하는 태도, 교인들 사이의 관계, 이런 내용은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들이지요. 우리가 교회를 섬기면서 마땅히 애써야 할 것은 좋은 교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 주사랑교회는 좋은 교회입니까? 아니면 형편없는 교회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하는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는 사이인지에 따라서 좋은 교회가 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목사가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어서 세습한다는 비난을 받는 교회도 있고, 교인수를 계산해서 교회를 사고 파는 경우도 있고, 서로 싸우고 깨지는 교회, 목사를 쫓아내는 교회 등등 아주 좋지 않은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좋은 교회가 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하는 내용들, 그 교훈들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결과지요.

그러나 이단에 대한 바울의 교훈은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되느냐 교회가 안되느냐, 즉 진짜 교회냐 가짜 교회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비록 욕을 얻어먹는 교회라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비록 교회가 깨지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았을지언정, 그들 역시 동일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니게 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이지요. 교회에게 있어서 이만큼 심각한 문제가 어디 있겠어요?

다른 교훈들을 잘 지켜서 좋은 교회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목사의 능력도 뛰어나고, 교인들의 사랑과 믿음이 탁월해서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었다고 합시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이 믿는 내용에 있어서 오류가 있고 잘못된 것을 믿게 된다면, 그 아름다운 교회가 무슨 소용입니까? 어제 밤에 인터넷 어느 게시판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광주의 어느 곳에 침례교의 간판을 내건 한 교회가 있는데, 대학생만 2,3백명이 모이고, 그래서 살아있고 생동감 넘치는 교회로 소문이 나 있는데, 사실은 요즘 대학가에서 골치 아픈 JMS 이단교회이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겉모습만 본다면 얼마나 대단한가요?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세속의 악한 성격을 띤 문화들이 젊은이들의 영혼을 잠식해 가는 세상에, 그 젊은이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교회, 또 그 젊은이들에게 호소력과 설득력을 가진 힘있는 교회, 그래서 미래가 밝은 교회...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 자랑스러운 모습을 가진 교회인데, 알고 보니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잘못된 이단이라면, 그들의 아름다움과 그들이 이룬 성과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이 다른 운동이라면, 가령 민주화 운동이라거나 사회개혁을 위한 운동이라거나 또는 통일을 준비하는 운동이라면, 그들의 조직과 힘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교회인 한,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해악이 될 뿐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디모데가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가기 위해 신경써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습니까? 감독을 세우고 집사를 선임하는 문제,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과부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훈들을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디모데가 아주 튼튼한 교회, 모범적인 지도자들을 가진 교회, 교인들 사이에 신뢰와 사랑이 넘치는 교회, 어디에 내놓아도 모범적인 그런 교회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잘못된 내용을 믿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디모데의 사명은 에베소 시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이익단체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모범적인 공동체를 조직해서 사회에 선을 보이려는 것도 아닙니다. 디모데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에 장로를 세우고 집사를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고 믿을 수 있도록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사도 많이 있고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진리가 선포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그 중심에 서 있지 않다면 다른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쨌거나 우리교회가 확실하게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선 교회, 진리 편에 선 교회가 되도록 애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스운 얘기입니다. 그렇지 않을 교회가 어디 있겠어요? 교회라면,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문제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해밀턴에 많은 이단의 활동이 왕성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지켜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양보를 한다거나 자칫 실수해서 곁길로 가고 오류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 인생에, 우리 영혼에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건전한 교회가 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단이나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되고 싶어할 교회가 어디 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갑니다. 또 많은 교회 안에 거짓 가르침이 침투해 들어옵니다. 이러한 일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탄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그런 거짓 가르침과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의 정체와 속성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선 이단의 표식이 있습니다. 이마에다가 '나는 이단'이라고 써 붙여가지고 다니는 표식은 아니지만, 바울은 여기서 이단의 표식을 몇 가지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다른 교훈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뉴질랜드에 여행하고 돌아가서 뉴질랜드의 수도는 오클랜드라고 떠들고 다닌다면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자신도 진짜로 오클랜드가 뉴질랜드의 수도인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제일 큰 도시이고 비행기도 오클랜드에 내렸으니까요.

모든 이단은 그리스도와 그에 관련된 진리에 대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교훈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따질 수 있겠지요? 남대문 문턱이 박달나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남대문에는 문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는 거짓 사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요? 이단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가 틀렸다는 것이냐? 너희가 틀린 것이다. 너희가 수가 많다고 정통이냐? 아니면 역사가 오래 됐다고 정통이냐? 물론 정통과 이단은 숫자나 역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객관적 판단의 근거들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이 이단이 아니라 진리와 다르면 이단인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것은 다행히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진 성경이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르쳤던 것과 다른 내용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다른 교훈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다르면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계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기준이 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8)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새로 생겨나는 이단의 특징은 뭔가 새로운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새로운 계시를 받은 것처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가지요. 여러분,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말씀이라고 혹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런 것은 바른 말, 건전한 교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경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행위인 것입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건전한 교리, 즉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성육신 등을 전혀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이단의 표식이지요.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믿으니 얼마나 교만하겠어요? 자기와 다르게 믿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실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말이지요.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과 무지는 늘 동행합니다. 정말 무지한 사람은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만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이단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어서 이단의 특징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고 그래서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을 유발시킵니다. 정말 골치 아픈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단에 대항하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리고 그 노력을 복음 전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이익이 되겠습니까? 물론 이단에 대처하면서 교리가 확정되고 진리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긍정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단에 의해 교회가 파괴되고 많은 영혼들이 거짓에 속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입니까?

또 이들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결과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이 사람들의 관심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미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매우 경건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종과 같이 거룩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사이비 종파의 교주들은 대부분 신도들로부터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중을 받습니다. 실상은 진리를 깨닫지도 못했고 진리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경건의 모양을 위해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종교는 돈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천주교의 여러 수도회 가운데 큰 것 중 하나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입니다. 이 수도회에 내분이 생긴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돈에 관련된 것이지요. 설립자인 프란체스코는 청빈을 이념으로 수도회를 세웠는데, 수도회가 커지고 많은 지지자들이 생기다 보니까 거대한 재산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의 설립정신을 따르는 엄격파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다시 청빈과 금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온건파는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억지주장이냐고 싸웠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들의 뒷이야기는 돈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 교회마저도 돈에 관한 한 비리와 의혹으로부터 멀지 않습니다. 교회가 돈을 모으기 위한 집단이 아니지만, 신앙과 종교활동에는 헌금이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돈이 모이게 되고, 거기에 순수하지 못한 욕심이 개입되어 문제가 생겨납니다. 종교적인 열정과 모이는 돈의 액수가 비례한다는 사실이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악하게 이용되는 수도 많습니다. 에베소의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파는데, 그것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종교적 열성이었겠지만 파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좋은 돈벌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져온 새로운 종교에 의해 그의 돈벌이가 위협을 당하자 큰 시위를 벌였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도 그런 사람입니다. 마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해서 괜찮은 돈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도들의 기세 앞에서 그만 주눅이 들었습니다. 사도들이 기도하기만 하면 그 사람에게 하늘에서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술과는 게임이 안되는 것입니다. 시몬은 이제 옛날의 좋은 돈벌이였던 마술을 버리고 새로운 돈벌이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내고서라도 그 능력을 사겠다고 했던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경건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거짓된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모습이지요.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기어이 경건을 가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괜찮은 돈벌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증한 것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꼭 이단이 아니라 하더라도 정말 없어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돈을 받고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나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천국에 관해 설교하는 목사들이 그렇지요. 미국의 목사들 가운데 10%는 천국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통계조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눈에도 악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멋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이는데,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하나님의 진노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의 악한 욕심 채우는 일에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정말 혼탁한 세대입니다. 이 악하고 혼탁한 세대에서 우리 교회가 순결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진리 위에 선 교회, 진리만 선포되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가 모두 함께 힘을 모으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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