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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돈이 웬수 (딤전 0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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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웬수 (딤전 6:6-10)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란 돈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입니다. 생산 요소 가운데서 자본의 비중이 가장 크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영어로 capitalism이라고 하는데, capital이 ism인 사회, 즉 자본을 이념으로 한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모든 활동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합니다. 이윤, 즉 자본이라는 가치의 추구를 위해서는 다른 가치들이 희생되기도 합니다. 이윤의 발생의 최고의 선이지요. 그래서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기업행위는 사회악으로까지 치부됩니다. 며칠 전에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이 직원회의에서 '최근 일부 기업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회사가 이익이 나지 않으면 경영은 엉망이 되고 고용안정도 기대할 수 없으며 나아가 국가경제에도 악영향을 주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윤을 발생시키지 못하는 경제활동이 사회악이라는 말 아닙니까? 가령 적자만 계속 나는 회사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회사는 존재할 가치도 없을 뿐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게 됩니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런 기업이 도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와 맞물려 도태가 되지 않고 남아 악영향을 끼치니까 구조조정이다, 워크아웃이다 하는 얘기들이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며칠 전에 정주영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도 나오는 것처럼 정주영씨 역시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것은 만고에 변할 수 없는 철칙이고, 지하철 입구의 거지에게나 재벌의 회장에게나 똑같이 공평하게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해서 거지와 재벌 회장의 삶을 똑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빈손으로 떠났지만 정주영씨는 한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커다란 역할과 공헌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가지고 누리는 부는 일시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가 일시적이라고 해서 우리가 거들떠보지도 않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일시적이고 짧은 인생이라지만, 기왕 사는 것, 없이 사는 것보다는 풍족하게 사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지만 지하철 입구의 거지처럼 비참하고 고달프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벌 회장처럼은 못돼도 잘사는 게 좋지 않아요?

자본주의라는 제도는 상당히 악한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고, 또한 수천년의 인류 역사 속에서 현재 최후로 채택되어 시행되고 있는 이 자본주의가 앞으로 폐기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될 가능성은 거의 없게 보입니다. 이러한 조건과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비록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또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하늘나라 시민으로서의 삶이 충돌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을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했던 말과 정반대의 내용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5절은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경건은 하늘나라 시민의 가치이고 이익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가치를 자본주의의 가치에 종속시키고 말았던 것이지요. 하늘나라의 가치가 자본주의의 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6절에서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자본주의의 가치를 하늘나라의 가치에 종속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건함을 추구하고 또 소유하고 있어도 그 경건이 자본주의의 가치 아래 있는 한 그 경건은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경건이라는 하늘나라의 가치가 우리에게 효력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벌어야 그것으로 부를 누리고 출세를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가치인 이 경건을 우리가 소유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는 돈과 경건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가치관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본주의의 가치를 하늘나라의 가치에 종속시키는 비결을 지족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간단히 말합니다. 만족함을 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지족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가치체계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지족한다는 것은 역사 이래 자본주의의 가치에 대항하려는 사람들의 고민이요 갈등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가치란 자본주의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가치에 대한 대항이고, 고대로부터 어느 사회든지 이 자본주의의 가치가 모든 인간활동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도 이 자본주의 가치에 대항하는 고민이었고, 이러한 고민을 과감하게 실행에 옮긴 사람이 아씨씨의 프란체스코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것은 다 끝이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더 많은 것을 얻어도 인간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욕망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망을 제거했을 때 우리가 지족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믿음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으려는 우리의 경건이 우리에게 큰 이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지만, 사는 동안이라도 풍요롭게 사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만약 이 일시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풍요로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이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이 세상에서 몇십년 사는 우리 인생, 할 수만 있다면 부자로 잘살면 좋지요. 그러나 이 몇십년 잘살려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얼마나 낭패입니까? 물론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비천하게 살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지요. 이 세상에서 부를 추구하고 소유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거나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잘살고 싶어요. 저도 가난이 싫어요. 저도 고물차보다는 새 차 타고 싶어요. 이 영원한 생명에 손해가 없을 보장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풍요로움을 위해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가치와 영원한 풍요로움을 위해 추구해야 할 하늘나라의 가치가 우리 인생에서 늘 사이좋게 공존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뭔가 하나를 다른 것에 종속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러셨지요? 한 종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구요. 또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나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족하는 마음이 동반될 때 경건이 우리 인생에 큰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장이 노동자들 월급 떼어먹으면서 지족하는 마음을 배우라고 하면 되겠어요? 미국 같은 부자나라가 도와달라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지족하는 마음이 없다고 비난한다면 합당한가요? 사실 제가 여러분에게 지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하기 전에 저 자신이 먼저 지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족하기에 완전히 도달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나도 배우면서 여러분도 같이 배웁시다,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더 있습니까?

사도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합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는 지금 얼마나 호화롭게 살고 있습니까? 그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하루를 소비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사치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족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아이구,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람이 어디 밥만 먹고 삽니까? 철마다 이사다니는 것도 지겨운데 집이라도 한 칸 마련하면 그때 가서야 지족하게 될지 모르겠네요. 정말 그렇습니까?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고 사도는 진단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의 고대사회에서 사도가 이런 말을 했다면 오늘날 돈이 근본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슨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러나 부를 추구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팔아야 할 시험이 없을까요? 자본주의의 가치를 잡으려는 길에 하늘나라의 가치를 포기하도록 하는 올무가 숨겨져 있지 않나요? 돈에 눈이 어두워져 양심도 팔고 사랑도 팔고 사람도 팔고 자신의 영혼까지 팔게 되는 어리석은 일들은 전혀 남들의 이야기뿐인가요?

바울은 급기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군요. 아, 그렇다면 정말 고민입니다. 돈을 사랑할 것인가, 미워할 것인가? 이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해 보세요. 돈이 얼마나 좋았으면 청와대의 작은 방 하나 전체를 금고로 만들었을까요? 돈이 얼마나 좋았으면 그것이 나중에 자신을 파멸로 끌고 갈 것도 모르고 덥썩 받았을까요? 아니, 우리는 사실 그 정도로 돈에 눈이 어두워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르지요, 그런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수 있는지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돈을 미워하며 살 수는 없지 않아요? 당장 돈이 있어야 헌금도 할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아이들 학교도 보낼 수 있고...

그렇습니다. 돈이 중요한 가치인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비록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일만 악의 뿌리가 될 정도로 돈을 사랑해서 미혹을 받고 믿음에서 떠나는 일은 없을지라도, 우리가 돈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사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매 순간 순간이 양립하지 못하는 두 가치 사이의 선택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이 자본주의 세상의 가치 사이에서 우리가 방황하고 갈팡질팡할 때가 많지 않아요?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기우느냐, 이것이 우리 믿음의 척도이고, 그러한 갈등은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돈은 소중합니다. 돈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소중하고 더 큰 가치에 종속되어 있을 때만 사실입니다. 만약 그 반대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되는 재앙일 뿐이지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지족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 내 형편에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공급하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 2:7). 하나님이 나를 부자가 되게 하셨으면 나에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하면서 감사하는 것, 또 하나님이 나를 가난하게 하셨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주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헛된 욕망을 갖지 않는 것이 돈을 사랑해서 낭패를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평생을 가족도 없이, 쉴 만한 집 한 채 마련하지도 못하고 먼 길을 다니며, 그것도 가는 곳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누명을 써야 했던 바울이 하는 말을 보세요.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요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알았노라'(빌 4:11-12). 가난하고 비천하게 되어도 비굴하거나 신세를 한탄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거기서 자족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부자가 되고 풍요롭게 살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더 욕심을 부리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으면서 그 형편에 적당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또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요? 물론 저는 바울이 풍요롭고 여유롭게 살았던 적이 있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지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비천에 처하거나 풍요에 처하거나 지족하며 하나님을 인정할 것입니다. 반면에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어도 돈을 사랑해서 양심과 사랑을 배반할 것이고, 부자가 되어도 돈을 사랑해서 믿음을 저버리고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부모 세대만 해도 저녁을 굶고 저녁예배에 나와야 했던 분들이 많았고, 내일 아침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지족하지 못하고 경건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추구할 수 있습니까? 정주영씨가 자본주의 사회를 위해서는 큰 일을 했고, 자신의 짧은 인생은 매우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영원한 가치는 얼마나 추구했고, 그의 영원한 미래는 얼마나 지혜롭게 준비했습니까? 우리가 비록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을 벌어야 하고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경건한 모습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형편에 두셨든지 지족하기를 배우는 것이 돈을 사랑하게 되는 일만 악의 뿌리를 미연에 방지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지족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경건으로 돈을 이기는 하늘나라의 시민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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