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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의 아들 (딤후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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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는 디모데전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써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후서 모두 디도서와 함께 목회서신으로 분류됩니다. 디모데후서 역시 로마의 감옥에서 쓰여졌다는 점에서 디모데전서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디모데후서의 전반적인 내용이나 분위기는 디모데전서와 매우 다릅니다. 그리고 디모데의 처지나 바울이 처하고 있던 상황은 무척 달라져 있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기록할 때에는 로마에서 첫 번째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가택연금 상태였고, 누구나 바울을 방문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깐 석방되었다가 다시 두 번째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중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AD 64년에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났습니다. 6일 밤낮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모든 장엄한 건축물들과 아름답고 화려한 문화유산들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이 방화의 유력한 용의자로 네로 황제가 지목되고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종말론 신앙을 빌미로 그들이 불을 질렀다고 소문을 낸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두 번째로 감옥에 갇히게 된 배경입니다.

이제 바울은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그만큼 중죄인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나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늙은 육체는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 지경입니다. 거기다가 평소에 앓고 있었던 눈병이 도져서 무척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을 수도 없고 쓸 수도 없습니다. 이 디모데후서 역시 바울 자신이 기록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대필했겠지요. 그리고 지하감옥을 엄습한 한겨울의 추위는 그렇지 않아도 죽어가는 그의 늙은 육체를 혹독하게 고문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동안 곁에서 그를 보필하며 힘이 되어주던 동역자들이 변절하거나 그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런 형편으로 바울은 곧 닥치게 될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면, 그리고 뭔가를 기록했다면 뭐라고 썼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디모데후서를 읽을 때 이러한 배경과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한 구절 한 구절을 눈물과 감동없이 읽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사도의 위대한 정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이 디모데후서에는 개인적인 내용이 많고, 특히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쓴 글이기 때문에 그의 유언의 성격도 들어 있습니다.

한편, 이 편지를 받게 될 디모데의 상황 역시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 내의 대대적인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교회들의 여러 가지로 위축된 반면에, 이상한 주장을 하는 이단들이 생겨나고, 박해를 견디지 못해 믿음을 포기해버린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와 지도력은 전에 비해 훨씬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그런 디모데를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로서 교회를 어떻게 가르치고 치리해야 할 것인지의 내용보다는 디모데 개인의 소명과 믿음에 관한 교훈과 경고가 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이 곤고하고 어려움에 처했다면, 이 디모데후서는 바로 여러분을 위한 책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배였던 바울과 디모데가 극한 어려움 속에서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았으며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섬겼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놀라운 승리의 삶을 살도록 했는지, 이 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1절에 보면 바울은 늘 하는 것처럼 편지의 서두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합니다. 그는 지금 개인적인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 형편은 추운 지하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여 가련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무기력한 늙은이지만, 사실 그의 신분은 더 이상 강조할 수가 없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으셨지만 사흘만에 무덤 문을 여시고 온 우주의 경이와 감탄 속에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죽음을 사로잡아 결박하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분의 약속에 따라 사도가 된 바울입니다.

자,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무엇이 더 큰 것입니까? 중죄인이 되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그의 현실과,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는 그의 신분, 어느 것이 그의 삶을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물론 우리가 처한 현실은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상황의 지배를 받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 따라 우리의 삶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대단한 신분에 걸맞게 그 체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어진다면 좋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지요. 그리스도의 사도였던 바울이 그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신과 체면이 땅에 떨어지도록 감옥에 갇혀서 초라한 몰골로 죽음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로 유리하고 편안한 현실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 신분과 현실 사이의 불일치와 갈등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는 바울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바울로 하여금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것이 나의 인생을 좌우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내 신분을 망각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참한 현실이 우리의 삶을 구차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우리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심을 지켜야지요. 상황 핑계를 대면서 양심을 판다거나 믿음을 배반하는 것은 맹수의 왕 사자가 마치 하이에나처럼 썩은 고기에 입을 대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사자는 굶어 죽어도 자신이 사냥하지 않는 고기, 죽은 짐승의 고기에는 입을 대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그런 자존심도 없어서야 되겠어요?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얼마나 같은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으면 아들이라고 불렀겠어요? 유비와 관우, 장비, 이 세 사람이 도원에서 의형제 결의를 합니다. 각기 성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달랐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한나라의 왕통을 수호한다는 한 마음으로 형제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 후로 이 세 사람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의지하며 살게 됩니까? 바울과 디모데 역시 성도 다르고 살아온 인생도 달랐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많은 동역자와 제자들이 있었지만 아들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는 누구보다도 바울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지요.

그런데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권위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이라고 부를 만큼 친하다고 해서 사도의 권위를 면제시켜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공과 사는 분명히 구별해야 하는 것이지요. 디모데가 바울이 사도인 것을 모르겠습니까? 언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디모데가 의문을 가졌거나 시비를 걸었습니까? 몰라서 확인시키기 위해 다시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비록 아들처럼 친한 디모데이지만 사도의 권위를 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이에는 친하다는 것과 권위가 양립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엄격하면 권위가 서지요. 그러나 친함은 없어집니다. 반면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무 친하게 대하면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친함이 없는 권위나 권위가 없는 친함은 결국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파괴시킬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친하면서도 동시에 권위가 존재해야 올바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와 교인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영적 권위와 인간관계를 혼동하게 되면 바울과 디모데와 같은 관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조직, 재정 등 모든 분야와 인간관계에서 전제군주가 될 것입니다. 그런 교회들이 많지 않습니까? 반대로 친밀함이 많다 보니 영적 권위가 인정되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늘 듣는 얘기입니다만, 존경받는 유명한 목사님들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사람들은 그 목사님을 존경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너무 친하다 보니 그들 사이에 있는 권위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로 인간적인 허물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 경우의 종말이 어떻던가요? 관계의 파괴지요. 목사와 교인 사이에 우리가 염두에 두고 지켜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여러분과 아무런 허물없이 터놓고 지내고 싶어도 그것을 억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 앞에서 늘 목에 힘주고 권위를 내세우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두 가지를 잘 조화롭게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만 추구할 수도 없고, 어느 하나를 잃어버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디모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는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 중에 루스드라에서 만나 제자로 삼고 전도여행에 데려간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기독교인 유대 여자였고,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었습니다(행 16:1). 그 후로 디모데는 바울의 분신처럼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특사로 바울 대신 여러 교회들을 방문했고, 바울과 함께 감옥에도 갔으며, 바울을 대신해서 에베소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바울의 생애 가운데 디모데를 만났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디모데가 없었더라면 바울의 인생이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요? 디모데는 바울이 가장 사랑하고 신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로서도 역시 바울을 만난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었겠지요.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정말 위대한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만남이라는 고리들로 우리의 인생을 엮어가는데, 내가 만난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얼마나 축복이 되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나를 만난 사람에게 얼마나 축복이 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지요. 내가 그 사람을 만남으로 해서 내 인생이 이렇게 축복되고 윤택하게 되었다, 혹은 내가 그 원수를 만나 이렇게 내 인생 망쳤다, 이런 말 할 수 있지 않아요? 우리가 목사와 교인으로 만나기도 하고, 같은 교회 안의 동역자로 만나기도 하고, 혹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로 만나기도 하고, 부모와 자녀로서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의 만남이 하나님의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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