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디모데 구하기 (딤후 01:6)

첨부 1


바울은 지금 쇠사슬에 매여 춥고 어두운 로마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지만,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의 형편이라고 해서 편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로서는 이미 죽음을 앞둔 자신보다 에베소에 남아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가 훨씬 걱정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당했고, 헬라인들 역시 자기들의 신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되어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 틈새에서 여러 이단이 생겨나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거기다가 이제는 로마의 공권력이 공식적으로 교회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옥죄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신실하던 동역자들이 믿음을 버리고 떠나는 일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내던져진 디모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가 과연 에베소 교회의 목사로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요?

한번 가정을 해 봅시다. 우리 교회가 해밀턴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발전하여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지을 땅을 사기로 했다고 합시다. 계약을 하고 돈을 다 지불했는데 나중에 보니 사기를 당했습니다. 교인들이 힘들게 헌금해서 모은 돈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충격을 받고 열심있던 분들이 다 교회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목사가 책임을 지고 원상복구를 해 놓으라고 닦달을 합니다. 한인사회에서는 목사가 업자와 짜고 사기극을 벌였다고 이상하게 소문이 났습니다. 또 그 사건이 재판에 회부되어 법정에서는 목사에게 늘 오라 가라 정신없이 불러댑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목사인 제가 사명과 열심을 가지고 교회 섬기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누구를 탓할 것도 없고 그저 보따리 싸 가지고 멀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버리는 것이 아마 최상책일 것입니다. 내가 왜 목사가 되었던고? 하면서 말이지요.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욥 3:11) 하던 욥의 탄식처럼 '어찌하여 그 노회 고시부원들이 나를 불합격시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교인들이 나를 목사로 청빙하기를 거부하지 아니하였던가?' 이런 탄식과 후회 속에서 말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무슨 사명과 열심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디모데의 형편이 그랬습니다. 디모데는 그랬겠지요. '어찌하여 바울 선생님이 우리 동네에 왔을 때 내가 그의 눈에 띠었던가? 내가 왜 진즉 이 에베소를 떠나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가 차라리 바울 선생님과 함께 로마의 감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던가?' 이렇게 연약해진 디모데의 믿음을 회복시키고 식어버린 그의 소명의식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이 바울의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이 개역 성경의 문장은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애매하게 되어 있는데, 6절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내가 너에게 안수함으로써 네 속에 있게 된 하나님의 은사가 다시 불타오르도록 너를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했다는 것은 어떤 케이스인지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목사로 임직하는 안수를 말하는 것인지, 혹은 디모데에게 특별한 하나님의 은사가 임하도록 특별히 안수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할 때 놀라운 은사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로서는 자신을 대신해서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게 될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의 모든 권위와 재능, 은사까지도 다 물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치 엘리사가 승천하려고 하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했던 것처럼, 디모데로서도 바울의 영적인 능력을 물려받고 싶었겠지요.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를 했고, 그렇게 해서 받게 된 은사에 힘입어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지도하고 섬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 받은 은사가 잊혀지고 힘을 잃었습니다. 끊임없는 환란과 핍박, 불리한 상황 등에 의해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이에, 디모데로 하여금 바울의 대리인으로서 교회를 섬기고 지도하도록 했던 원동력이었던 그 은사가 힘을 잃은 것입니다. 마치 건전지 수명이 다해 멈춰버린 장난감처럼, 디모데는 기진맥진해 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 뿐만 아닙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지요. 특히 사명으로 사역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이 은사의 상실은 사역의 중단이라는 원치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던 하나님은 그래서 그분의 창조질서 속에 안식을 심어놓으셨어요.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는 안식하도록 하신 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창조의 질서가 그렇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거기에 맞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땅도 6년 동안 열심히 경작해서 농작물을 산출했으면 1년은 쉬도록 했습니다. 지금이야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경제원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농토에 비료를 뿌려가면서 쉬지 않고 경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는 땅까지 쉬도록 하셨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물며 인간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쉰다는 것은 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이 1년 동안 쉬었던 것은 그 다음 6년의 경작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의 목적은 우선 소극적으로 그동안의 사역으로 인한 피로를 일단 해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다음 사역을 위해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이 한 텀 사역을 마치고 안식년을 맞아 돌아오면 선교지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힘든 경우가 많아요. 우선 당장 머물 곳도 마땅치 않고, 또 안식년을 쉬러 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눈치도 보이고 말이지요. 쉬러 온다면 굳이 고국으로 돌아갈 것도 없지요. 차라리 선교지에서 잠깐 사역을 내려놓고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의 경우는 안식년을 통해서 지난 사역에서 미비했던 점을 보완하여 다음 사역을 보다 잘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필요하면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자료도 수집하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역지에 있을 때는 선교헌금을 하는 분들도 안식년에 공부한다고 하면 선교헌금의 용도에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약 안식년이 없다면 사역 자체는 어떻게 진행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품질에 있어서는 많은 기대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디모데로서는 그야말로 안식년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선 지쳐있는 심신의 피로를 풀기 위해 지중해의 한적한 휴양지에 가서 기력을 회복한 다음, 좋은 교수가 있는 미국의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다시 사명감을 북돋우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사정만 허락한다면 최고의 스승인 바울에게 가서 좀더 배우고 안수를 다시 받고 오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식년을 가질 한가한 상황이 아니지요. 당장 탈진이 되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떠날 수는 없는 형편입니다. 모두들 기진맥진해 있는데, 그나마 목사를 바라보면서 버티고 있는데, 목사가 쓰러지거나 떠나버리면 그 에베소 교회는 무엇이 되겠어요? 그렇다고 감옥에 갇혀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바울을 모셔올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의 안식년을 대체할 수 있는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그의 식어버린 소명의식, 잃어버린 열정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가 안수했을 때 받았던 그 특별한 은사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 기억을 되살려서 다시 기력을 회복하고 열정을 되찾으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은혜받았던 경험 없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도 목사 안수를 받을 때의 감동과 헌신의 다짐이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 모릅니다. 때때로 우리의 소명의식과 열정이 식을 때 과거에 경험했던 은혜를 되새기며 소명을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고 사역도 힘있게 진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힘이 들고 사역에 대한 소명의식이 희미해질 때, 목사 안수받던 현장을 되새겨보면 지금 이렇게 힘없고 나약한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지겠지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했었는데, 좀 힘들다고, 좀 일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고 쉽게 낙심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 경험했던 은혜를 되새기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과거를 되새기는 것은 멜랑꼴리한 자기 감상에 빠지는 것으로 끝나는 수가 많아요. 내가 지금은 알아주는 사람이 없지만 왕년에는 한가락 날렸다 이거야. 비록 지금은 믿음도 적고 열심도 없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교회 일이라면 혼자서 다 했었는데 말이야...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그런 식의 과거 회상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지 않거나 부족함을 정당화시키는 자기기만이 될 뿐입니다. 슬럼프에 빠진 디모데를 다시 복음의 열정으로 타오르는 전사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과거에, 특히 바울에게 안수를 받을 때 그에게 주어졌던 특별한 은사를 기억하도록 상기시키는 것이 필요했다면, 오늘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고 소명을 회복시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누구나 슬럼프에 빠질 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언제 슬럼프에 빠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울의 기록에 그런 얘기는 거의 없으니까요. 그러나 바울은 예외로 친다 하더라도 디모데가 이처럼 슬럼프에 빠져서 바울이 그의 믿음과 소명을 회복시키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슬럼프에 빠졌다면 이정선이가 슬럼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심지어는 450명 바알의 선지자들과 단신으로 대결하여 대승리를 거둔 엘리야도 슬럼프에 빠져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하나님께 불평했지 않아요?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그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여러분, 만약 제가 영적으로 침체되고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저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목사가 돼 가지고 소명을 잃어버렸다고 비난하시겠습니까? 물론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실수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목사에게는 높은 수준의 기대치가 할당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목사를 마치 수퍼맨처럼 생각하는 수도 있어요. 그러다가 목사가 조금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무슨 목사가 그래?' '그건 목사도 아니야.' 이렇게 욕을 하지요. 너무 높은 기대치를 설정하는 것은 기대하는 사람이나 그 기대의 대상이 되는 사람 모두에게 재앙을 가져옵니다. 기대했던 사람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게 될 것이고, 기대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실수할 수 있다면, 장로도 집사도 모두 실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실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한번 범죄하거나 잘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도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실망도 많이 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더군요. 여러분, 얼마든지 저를 실망시키십시오. 그렇다고 일부러 목사 실망시킬 필요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우리 교인들은 절대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목사가 이렇게 믿었다가는 절대로 목회에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실수하고 슬럼프에 빠질지라도 다시 일어서고 다시 믿음과 소명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길을 가다가 진흙탕에 주저앉은 사람이 이제 인생이 끝났다고 그대로 앉아 있으면 그야말로 인생이 그렇게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흙탕을 털고 일어나 다시 길을 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항상 새롭게 유지하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지고 시험에 드는 때가 있을지라도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일어서면 그것이 바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슬럼프에 빠진 것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해서 일어서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졌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비난하고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가 다시 일어서서 소명을 회복하고 복음의 열정으로 무장한 전사가 되기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슬럼프에 빠진 사람이 있나요? 우리의 역할은 바울처럼 그를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혹시 목사가 슬럼프에 빠졌습니까? 목사가 힘을 잃고 소명을 상실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온 교회가 일어나 목사 구하기에 나서야 하지 않겠어요? 교인 중에 누가 슬럼프에 빠졌으면 어떻게 합니까? 목사를 비롯해서 누구나 그 형제 구하기에 앞장서야지요. 이것이 바로 교회 아닙니까?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지요. 우리가 슬럼프에 빠진 형제 구하는 교회, 믿음과 사명을 회복시켜주는 데 앞장서는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