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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칭찬합시다 (빌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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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에 가면 리틀 인디아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디안 타운이지요. 거기 한번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시내버스가 커브를 돌아 리틀 인디아로 들어가는 순간 무엇이 변했는지 아세요? 공기가 변했어요. 인도 사람들은 향을 많이 사용합니다. 집집마다 가게마다 향을 피워놓으니 동네의 공기 자체가 다른 동네와는 전혀 달라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눈을 감고 있어도 거기가 인디안 타운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그 향냄새는 인도의 상징이고 표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한번 오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무엇을 느낄 수 있어야 할까요? 인디안 타운에 들어가면 향냄새가 나는 것처럼, 교회에 들어가면 뭐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이 교회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해 주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군대에 가면 군기가 있지 않아요? 군기가 빠지면 군대가 아니지요. 교회에도 그것이 빠지면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바로 형제사랑이에요.

교회의 규범이라고 할까, 교회 안에서 기본이 되는 정신이 바로 형제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즉 서로 사랑하는 것은 교회의 표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라도 교회 안에 들어오면 금방 이 형제사랑이 눈에 보이고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해요. 아, 이것이 바로 교회구나! 교회에 들어오니까 역시 다르구나! 이런 말이 나와야지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는 것,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어야 하는 거예요.

교회에 가도 재미가 없다. 문제 있는 교회지요? 교회 가면 찬바람만 쌩쌩 분다. 교회 갔더니 여편네들 둘러앉아서 다른 사람 흉이나 보고 험담만 하더라. 교회에서 무슨 회의만 하면 왜 그렇게 분위기가 살벌한지 모르겠더라… 이런 얘기가 나와서는 형제사랑이라는 교회의 기본 정신이 실천되고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없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형제사랑이 충만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교회 안에 무엇이 있어야 서로 사랑하는 교회라고 할 만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회 안에 있어야 할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이 있어야 합니다. 권면이라는 말은 영어로 encouragement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했으면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좀 못한 것이 있으면 다음부터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믿음이 연약한 지체가 있으면 믿음이 자라도록 옆에서 잘 보살펴 주어야죠. '야, 그것도 모르냐?'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 이런 말은 격려하는 말이 아니지요?

그리고 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위로가 있어야 해요. 위로는 따뜻한 말입니다. 썰렁한 말은 위로가 될 수 없어요. 큰 시련을 당했거나 좌절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 위로에 힘을 얻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 속에 무엇이 들어 있어야 하나요? 사랑이에요. 사랑의 위로라고 했지 않아요? 시험에 떨어져서 낙심해 있는 친구를 찾아가서 위로한답시고, '야, 그 시험문제 가져와 봐. 내가 답 가르쳐 줄께.' 이랬다가는 위로는커녕 싸움만 하고 돌아오게 될지 모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러 왔다가 싸움만 했지 않습니까? 또 겉으로는 위로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 '어이구 시원하다. 평소에 잘난 체하는 게 눈에 가시 같더니, 꼴 좋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위로가 될 수 없지요. 위로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에는 아가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지요? 형제를 위로할 때는 아가페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마음, 이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위로해 주어야 할 사람이 있는지 잘 살펴보세요. 위로하고 싶어도 위로할 사람이 없습니까? 늘 죽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위로의 대상이 아니에요.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해도 속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요. 그런 사람을 찾아내서 위로하세요. 여러분의 위로 한 마디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교회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것은 성령의 교제입니다. 목사가 성도들을 축복할 때 하는 말이 있지요?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것은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교통정리를 하셔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라는 말이 아니에요. 한국말이 참 어렵지요?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지요? 목사님들 축도할 때 잘 들어보세요. '성령의 감화 감동 충만하신 은사가...' 주로 그렇게 말해요. 인심이 좋은 목사님은 거기다가 더 많은 것을 추가해서, 위로하심, 축복하심 등등...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입니다. 축복해 주신다는데 나쁠 것은 없겠지요. 연세가 많으신 목사님들은 축도하는 말씀도 고정이 되어가지고 마치 불변의 공식처럼 엄숙하게 선언됩니다. 반면에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젊은 목사들은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겠지요? 한번은 친구 목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축도할 때 성령의 감화 감동 위로 축복 등등 여러 가지를 말해도 꼭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교통이다. 교통이라는 말이 꼭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것은 하지 말고 교통만 말해야 되는 것 아니야?' 우리가 축도로 사용하는 말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축복한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인데, 거기서 바울이 성령의 교통하심만 말했거든요. 다른 것을 더 덧붙인다면 왜 성령에게만 덧붙여야 합니까? 성부와 성자께서 섭섭해 하시겠네요. 그리스도의 은혜만 말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유하심도 말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에다가 공평하심과 오래 참으심 등등... 덧붙일 것이 많지 않습니까? 문제는 무엇일까요? 목사들이 예배의 마지막을 멋있게 장식하려고 미사여구를 나열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원래 있던 교통은 빠져버리고 없던 감화 감동이 들어가게 되었어요.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교제란 말이지요. 교제라는 말은 영어로 communion, 또는 fellowship입니다. 그래서 교제라는 말의 뜻은 함께 나눈다, 동료의식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교회에 성령의 교통하심, 즉 성령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이 성령의 교제입니다. 부부의 교제, 부모와 자녀의 교제, 선생님과 제자의 교제, 친구간의 교제, 다 다르지요? 사업상의 거래 역시 일종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친구간의 우정도 아니고, 동창회나 향우회 같은 친목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하는 친교, 즉 성령과 어울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의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교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가 사랑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권면이나 위로, 교제가 있게 되면, 실제적으로 무엇이 따르게 됩니까? 긍휼이나 자비, 즉 사랑의 실천이 있게 되지요. 우리 중에 누군가가 사업이 망해가지고 끼니를 잇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다들 가서 '얼마나 힘드세요? 다시 힘내서 일어나세요.' 이렇게 위로만 하고 말면 그걸 성도의 교제라고 할 수 있겠어요? 우선 당장 라면이라도 한 박스 들고 가야지요.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랑, 실천되는 믿음, 여기까지 와야 서로 사랑하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형제사랑의 구체적인 모습들이 그 원리인 사랑에서 벗어난 것이 되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의도가 불순하면 좋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는 사랑의 행위는 그 뿌리가 사랑에 놓여 있지 않고 다툼과 허영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가 없지 않겠어요? 다툼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서로 시기하느라 하는 선행, 좀 우습지 않아요? '네가 선교헌금 100불 했어? 선교의 선자도 모르는 게 무슨... 나는 200불 한다.' '아무개 집사가 유학생들 데려다가 저녁식사 대접했다며? 다음 주에 나는 학생들 다 데리고 발렌타인 간다.' 유학생들이야 좋을지 모르지만, 그런 음식 얻어먹어야 배탈만 나요. 서로 다투느라 그렇게 하지 말고 정말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해야 먹는 사람도 맛있고 베푸는 사람도 즐겁지 않겠어요? 또 허영으로 하는 일들,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선행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다툼과 허영으로 하는 권면이나 위로나 교제나 긍휼과 자비, 적어도 성도들 사이에서는 그런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럼 그런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2절에 보니까,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다 같은 얘기잖아요? 같은 마음, 같은 사랑, 한 뜻, 한 마음, 결국 무엇을 말합니까? 사랑입니다. 누구는 사랑에서 하고, 누구는 이름 내려고 하고, 누구는 남이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고, 누구는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하고, 누구는 왜 하는지도 모르고 하고... 이래서는 안되지요.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의 원리는 오직 한 가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툼과 허영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마음을 고쳐먹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절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겸손과 사랑이 만났을 때 그것이 정말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교만과 사랑은 공존이 불가능해요. 교만과 사랑이 만나면 무엇이 될까요? 소유만 있을 뿐이지요. 겸손이야말로 사랑을 만들어내는 공장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남을 미워하는 것 쉽게 상상이 됩니까? 교만한 사람이 화를 잘 내던가요? 겸손한 사람이 화를 잘 내던가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들 가운데 걸어다니는 성자라고 불리우는 분이 계셨어요. 이분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는데,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을 만나면 학생이 인사를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교수님이 자전거를 멈추고 내려서 같이 인사를 하셨어요. 얼마나 겸손하셨던지 그분 앞에서는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겸손은 한 마디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내가 더 똑똑하고 더 잘났어도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상대방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겸손하고 서로 상대방을 자기보다 낫게 여길 때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교회 안에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비결, 그 첫걸음이 뭐라구요? 겸손이에요.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칭찬에 인색한 이유는 시기심 때문입니다. 시기심은 상대방이 나보다 낫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심리적 상태입니다. 이런 것을 고치는 것이 하루아침에 될 수는 없습니다. 부단히 애쓰고 노력해야지요. 우리가 오늘 칭찬하는 연습을 해보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상대방이 얼마든지 달라보일 수 있습니다. 교만의 눈으로 보면 무엇만 보일까요? 못하는 것만 보입니다. 단점과 비난거리만 보입니다. 그러나 겸손의 눈으로 볼 때 똑같은 사람에게서 얼마나 많은 장점과 칭찬거리를 찾아낼 수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비결이 별 게 아니에요. 서로 좋은 모습을 드러내 주고 허물은 덮어주면 되요. 될 수 있는 대로 칭찬을 많이 하고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진심으로 그렇게 실천하는 거예요. 바로 겸손이지요. 겸손만 있으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주님의 제자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겸손을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했어요. 5절 이하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겸손으로써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겸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우리가 품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교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하십시다. 오늘 우리가 서로를 향해 하는 칭찬에서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묻어나오는 것을 함께 지켜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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