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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단과 싸워? 말어? (딤후 02: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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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던 에베소 교회는 이단과 거짓교사들의 준동으로 아주 골치가 아픈 곳이었습니다. 물론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는 기독교의 기본교리들이 확립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수많은 도전과 방해가 교회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 에베소 교회에서는 이 도전이 유난히 심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이 에베소 교회를 목회했던 사도 요한도 이단을 정죄하고 몰아내는 일에 전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개척했고 거기서 목회를 했던 바울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디모데를 격려하고 충고를 하는데, 먼저 해야 할 일은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저희는 에베소의 교인들을 말합니다. 그 중에는 착하고 신실한 교인도 있을 것이고, 이단에 빠져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중간에서 왔다갔다 헷갈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 일을 기억하게 하라고 했는데, 이 일이란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이지요. 기억하게 하라는 것은 그들이 이미 이 진리들을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몰라서 이단에 빠지는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 이단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기존의 신자들이에요. 기본 진리를 들었고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단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단이 주요 타겟으로 하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기존에 믿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지금까지 믿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이단으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넘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진리를 듣기는 들었고 알기는 알지만 분명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충고하기를 이미 가르친 그 기본 진리들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확신시키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는 일은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에요. 다들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잘 안다는 것과 확신 안에 거한다는 것은 다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늘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뭐 새로운 것을 개발해서 아주 신선한 충격으로 능력을 검증 받으려고 하는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교인들 역시 맨날 듣는 똑같은 설교가 지겹지요. 그래서 어디서 누가 새로운 얘기를 하면 혹해서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단에 접하게 되는 전형적인 패턴 아닙니까?

어떤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새로 부임했습니다. 이 교회는 사랑이 없기로 소문이 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오셔서 처음 하신 설교가 서로 사랑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에도 목사님이 똑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시는 겁니다. 교인들은 의아했지만 목사님이 새로 이사하시고 어수선한 가운데 착각을 하셨거나 아니면 바빠서 설교준비를 새로 못하셨나 보다 하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그 다음 주에도 또 똑같은 설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교인들이 참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했겠지요? “목사님, 벌써 똑같은 설교를 세 번째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그러셨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게 될 때까지 이 설교를 할 작정입니다.”

진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의미가 있는 얘기입니다. 물론 목사가 아주 고리타분하고 지겹게 해서 교인들이 새로운 것을 찾게 되고 그래서 잘못된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면 목사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진리의 불변성과 그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라는 말이죠.

바울은 진리를 명백하게 선포하고 잘못된 사상에 대해서 말다툼하는 것을 금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익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진리를 가지고 거짓된 가르침과 토론을 하면 진리가 승리하고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선택할 것 같지요? 그렇다면 왜 바울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겠어요?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이단에 대한 대처는 아주 단호합니다. 말이 필요 없이 쫓아내버리지요. 그래서 때로는 교회가 사랑이 없다,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대로 두고 교회 안에서 토론이 되면 사람들이 그 이단의 잘못된 것을 깨닫고 배척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결과는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게 됩니다.

대체로 이단의 사상이 비합리적이고 몰이성적입니다. 그러면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대체로 사고능력이 부족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식인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빠져요.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가 쓴 ‘스크류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고참 악마인 스크류테이프가 젊은 악마 웜우드에게 인간을 유혹하는 방법을 전수하는 내용인데, 거기서 스크류테이프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가 유혹하려고 하는 그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머리 속에 서로 모순되는 사고체계들이 열두 개나 뒤죽박죽 뒤엉켜 있는 데 익숙해 있다네. 그래서 교리를 생각할 때 기본적으로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따지기보다 그것이 학문적인지 실용적인지를 따지게 되지. 그러니까 그 사람을 교회에서 멀리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논리가 아니라 궤변이란 말일세.”

그래요, 그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 이단이지요. 그러니까 이단과는 얘기가 통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단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명확한 논리나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혹해서 넘어간단 말이지요. 오죽하면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닦았고 이 기독교를 세계종교가 되도록 널리 전했던 바울 사도마저 이단과의 논쟁이 아무런 유익이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한다고 했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해서 금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단의 주장을 원천봉쇄하고 그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런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만, 한국에 있으면 무슨 여호와의 증인이니, 안식일교니 하는 이단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수가 많잖아요? 주로 얘기를 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게 상책이지만, 어쩌다가 얘기라도 하게 되면 얼마나 피곤합니까? 왜냐하면 우선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이죠. 그 사람들은 우리를 설득해서 자기편으로 만들려 하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설득해서 우리 편 만들려고 하니까요. 그리고 단시간 내에 그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자꾸 만나서 얘기한다고 설득되는 것도 아니지요. 가족이나 친척 중에 그런 사람이 있는 경우, 누가 누구를 포섭하는 것이 쉬울 것 같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이단에 깊이 빠진 사람들과는 논쟁이나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말다툼을 할 필요가 없어요. 해서 유익도 없구요. 뭐 다르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저의 경험과 판단으로는 그것이 신상에 좋다고 해야겠습니다.

이단의 해악은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경건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지만 나중에 그 본색이 드러났을 때는 완전히 적그리스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점점 번져요. 마치 독한 창질이 썩어져 가면서 점점 번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바울이 여기서 지목하는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독한 창질과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도 후메내오를 언급했는데, 거기서는 그를 더 이상 교회를 훼방하지 못하도록 사탄에게 내어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디모데전서를 쓴 후 벌써 몇 년이 지났잖아요? 그런데 후메내오가 아직까지 교회 안에서 큰 해악을 끼치고 있었단 말이지요. 그 독한 창질이 몇 년 동안이나 교회 안에 있었으니 교회가 얼마나 시끄럽고 또 많은 피해를 입었을까요?

이들이 구체적으로 복음에 해악이 되었던 것은 특히 부활을 부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를 부인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시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요. 아직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었고, 또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한다면 부활을 인정하는 것도 별 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주장한 것은 부활이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고대교회에서 부활의 교리가 확립되기까지는 많은 난관에 봉착해야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의 끝없는 방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원론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악하고 소멸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 이것이 부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육체는 절대로 부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활은 영적인 부활, 즉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영적으로 연합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본 얘기 아닙니까?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몇 년 전에 한국의 한 유수한 신학교 교수님들이 이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 교수님 말은 이랬어요. ‘우리는 부활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부활을 말한다면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들의 부활은 무슨 형이상학적 부활입니까? 그러려면 부활이라는 말을 왜 써요?

이 부활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 바울이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는 말하기를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실 이유가 없고,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라면, 즉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5장). 이처럼 교리를 왜곡하고 진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이단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이단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야 했던 에베소 교회, 특히 목회자였던 디모데가 해야 했던 일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거짓에 대항하는 것은 오직 진리 안에 거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무리 이단이 날뛰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써도 하나님의 터는 견고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시온성과 같아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와 성도를 인쳐 주셨습니다. 도장을 찍었단 말이에요.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것이라고 도장을 쾅 찍었는데 누가 그것을 빼앗거나 훔쳐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도장을 찍으셨어요. 절대로 뺏기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장을 어디에다 찍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도장이 어디 찍혀 있어요? 보여줄 수 있으세요? 무엇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인친 자녀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을까요?

여기 바울 사도가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그랬잖아요?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불의를 행하고 악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잖아요? 즉 우리는 불의를 떠남으로써 하나님의 인치심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도장에는 뭐라고 새겨져 있겠습니까? ‘불의에서 떠남’이라고 새겨져 있을 법하지 않습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보호하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비록 우리 원수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넘어뜨리려고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기회를 엿보고 틈만 나면 공격해 오지만, 또 때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일도 종종 있지만, 우리가 진리의 확신 안에 거하고 불의를 떠날 때 아무런 염려와 두려움이 없고, 궁극적으로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기쁨과 축복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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