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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잘 배워서 확신 가운데 거하라 (딤후 0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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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번역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여기 10절은 ‘그러나 너는’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던 내용과 대비시켜 얘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바울이 앞에서 말했던 내용은 얀네와 얌브레가 그랬던 것처럼 거짓 교사들은 그 어리석음이 드러나 더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 너는 보고 알았지 않느냐(11절)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보고 따랐던 것은 바로 바울의 믿음과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좋은 스승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또 누구에게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배웠는가 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의미있는 부분 아니겠어요? 그리고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아주 큰 축복이지요. 좋은 스승 밑에서 좋은 제자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좋은 스승을 만났을 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좋은 스승이라고 만났는데 이단에 속한 경우랄지, 또는 신실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사람을 만나 믿음에 큰 손상을 입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스승으로 둔 행운과 축복을 누린 사람입니다. 지금 바울이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의 교훈을 잘 배웠지 않느냐?” 바울의 교훈은 올바른 교리입니다. 이단이 횡행하고 거짓 교사들이 미혹하는 가운데 올바른 교리를 붙잡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바로 그 올바를 교리를 너는 나에게서 잘 배우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계속해서 바울이 하는 말을 보세요. “또 너는 나의 행실을 잘 보지 않았느냐?” 이것은 바울이 살았던 삶을 말합니다. 자신이 믿는 대로 실천하며 살았던 경건한 삶이지요. 바울은 입으로만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행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과 행실이 달라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없고 감동을 줄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올바른 교리와 그것을 따라 실천하는 삶으로 완벽한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차례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바울은 효과적인 선생이었고 좋은 선생이었단 말이지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네가 보지 않았느냐?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지금 디모데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디모데가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체험했던 것들이란 말이죠. 우리는 유명한 사람들의 전기나 위인전을 통해서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종종 그러한 교훈들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유는 그 위인들이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공간적으로 또는 시간적으로 나와 상관이 없는 세계에 있기 때문에 그 교훈들을 체험적으로 습득할 수는 없단 말이지요. 그러나 나와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교훈은 살아 있는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얼마나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는 자녀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는 수가 많습니다. ‘너는 나처럼 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는 수가 많단 말이지요. 그래서 자기가 못하는 것을 시키려고 하니까 잘 안 돼요. 오히려 반발만 커지지요. ‘엄마도 못하면서 나한테 하라고 해.’ 이런 식이지요. 물론 우리가 누구를 가르치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요. 자신의 실패로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 아니에요?

디모데가 바울에게서 또 보았던 것은 핍박과 고난이었습니다. 바울이 당했던 고난들은 셀 수도 없고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단지 디모데가 목격했던 몇 가지 일들만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바울처럼 그렇게 완벽한 선생이 그토록 모진 핍박과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로서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잘 가르치는데 왜 거짓 교사들이 저렇게 인기가 좋고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거스르는지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지 않겠어요? 그리고 오히려 진리를 가르치는 자기를 향해서 대적하고 핍박하는 억울하지 않아요?

여기에 대해서 바울이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사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이 편지의 핵심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가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네가 잘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더 많은 고난과 핍박이 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1장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직접 몸으로 체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원래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할 시간이 다가왔을 때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마지막으로 긴 설교를 하시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20). 진리이신 예수님 자신이 핍박을 당했다면 그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럼 누가 핍박을 한다는 것입니까? 핍박을 한다는 것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아닌 것이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와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한다는 말이 되겠군요. 기독교가 처음 세상에 전파될 때 그저 기독교라는 이름만으로 무조건 핍박을 당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힘이 없었고 기독교를 대적하는 이방종교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핍박은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기독교가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를 점령하고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게 되었어요. 핍박을 받던 기독교가 이제는 핍박을 하는 기독교가 되었단 말이지요. 과거에 핍박을 받으며 설움을 당하다가 이제 핍박을 받지 않게 되었고 마음껏 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꽃피우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힘을 갖게 되고 핍박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서 기독교가 올바른 기독교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주님은 세상이 나를 미워한 것처럼 너희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고, 바울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는데,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단 말이지요. 그것을 기독교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독교의 승리가 아니라 나태와 타락으로 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중세 암흑기의 수준 낮고 생명력 없는 기독교가 그래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 진짜 신앙의 열매가 열리게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들이 증거하고 있잖아요? 물론 지금도 믿음 때문에 탄압받고 고초를 겪어야 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그분들에게 대단히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그분들이야말로 참된 믿음을 가꾸어 지켜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박해를 당하면서도 이 믿음 지키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교회를 가든지 말든지 누가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이 오히려 교회에 잘 좀 다니라는 잔소리를 들어가며 신앙생활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경우가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나타날 수 있겠어요? 사람의 심리는 참 이상해요. 하지 말라고 하면 기어이 하려고 하던 것도 하라고 하면 안 해요. 믿음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지 말라고 핍박하고 못살게 굴면 믿음이 좋아지는데, 예수 잘 믿으라고 하면 잘 안 믿는단 말이죠. 주기철 목사님은 일사각오의 신앙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믿는다는 거지요. 왜요? 그만큼 박해가 심했으니까요. 그랬기 때문에 그분들의 믿음이 별처럼 빛날 수 있었고 역사하는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은 그런 총이나 칼의 형태로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우리의 삶 속에서도 참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도전과 방해가 있는지 몰라요. 우리에게 핍박이 없고 예수 믿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주위에 얼마나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것들이 많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그런 얘기를 해요. 나이 사십이면 불혹이라고 했는데, 정작 사십이 되고 보니 무슨 유혹이 그리 많은지 늘 이리 휩쓸리고 저리 혹하면서 살게 된다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오는 유혹과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과 싸운다는 것은 그만큼 불이익을 당해야 하고 손해도 보고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거든요.

아직도 이 세상에는 악한 질서가 큰 세력을 떨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속이고 또 속기도 하지요.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그러한 악에 휩쓸리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유형무형의 핍박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디모데가 신실하게 진리를 선포하면서 경건하고 살고자 할 때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 핍박 속에서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는 줄을 알라고 하셨거든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과 같은 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편인데 겁날 게 뭐예요?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당한 몇 가지 핍박을 말하면서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서 당하는 핍박 속에 주님이 거기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해서 확인합니다. 그러니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내가 너를 가르쳤지 않느냐? 내가 너에게 모범을 보이지 않았느냐? 절대로 이단과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고 진리 안에 굳게 서서 교회를 지켜라.

오늘날 교회를 섬기는 모든 청지기들과 성도들이 귀담아 듣고 실행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제대로 배웠으면 제대로 살아야지요. 디모데가 바울처럼 훌륭한 선생에게 잘 배웠으면서도 이리저리 휩쓸리고 헤맨다면 제대로 가르친 보람이 없지 않겠어요? 형제 자매 여러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이 사도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중심을 사로잡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파도에 나뭇잎 흔들리듯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배우고 진리에 바로 서서 흔들리지 않는, 참으로 확신한 일에 거하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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