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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싸움이라고 다 같은 싸움이 아닙니다 (딤후 0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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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모든 가식과 거짓의 가면을 벗는다고 하지요. 그래서 죽기 전에 남기는 말이 가장 정직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 마지막 말이야말로 한 인간의 진면목을 나타내 보여주는 말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죽음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아니지만, 자신의 죽음에 관해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의 진솔한 마음이 표현되어 있기도 하겠지만, 읽는 사람으로서는 무거운 분위기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말하는 바울 자신은 매우 밝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자신이 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의식을 빌어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구약의 제사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소나 양을 잡아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가 있습니다. 또 포도주로 드리는 전제가 있지요. 여기서는 관제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만. 전제는 따로 독립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번제와 함께 드리는 제사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제사에 드려진 포도주처럼 벌써 부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번제로 말하자면 제물에 이미 불이 붙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제물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번제의 제물에 비유하지 않은 것은 소나 양과 같은 제물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연관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제사의 주요 제물이 되는 소나 양은 대속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죽음은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의 죽음이 번제의 제물에 비유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전제로 드리는 포도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제물입니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제물입니다(민 15:7). 그러나 제물이라는 점에서 이미 부어진 포도주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비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포도주를 부어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한 것처럼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음 자체가 제물이라기보다는 죽음으로 마감되는 그의 온 생애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롬 12:1).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의 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 그래서 그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롬 12:2).

결국 바울이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제물에 비유하는 것은 성도의 삶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산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셈입니다. 과연 우리도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부어드릴 포도주와 같은 삶이었다고 회고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포도주를 아무것이나 쓸 수는 없거든요. 지저분하고 찌꺼기가 섞인 하등품 포도주로는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쓸 수 없잖아요?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 없이 사는 이 세대와 하등 다를 것 없이 사는 모습으로, 그런 삶으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바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바울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모두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나의 죽음이 관제와 같이 제단 위에 부어져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지나온 생애를 돌이켜보면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생애는 그야말로 전투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전쟁과 전투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해서 교훈을 합니다. 디모데에게는 군사로 부름을 받았으니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군사는 자기 생활에 얽매어 군사 본연의 임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전투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한 것은 우리가 영적인 전투의 한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싸워야 하고 또 이기지 못하면 파멸을 당하는 매우 긴급하고 위험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 했을 때 사탄은 얼마나 그것을 방해하고 도전해 왔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도 늘 마귀와 싸우셔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우리 같은 연약한 그릇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시험과 공격이 다가오겠어요?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씀을 보세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바울은 자신의 싸움이 대단히 성공적이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했지요?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 하나님나라를 위한 싸움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홉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어떤 면에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로 아등바등 싸운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이 싸우는 것이라면 어떤 싸움을 싸웠느냐 하는 것에 따라 한 인간과 그의 삶이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싸움에도 종류가 많지 않습니까? 조폭이 되려면 싸움 잘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런 싸움이 있는가 하면 머리싸움도 있지요? 또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그러니까 사랑을 위한 싸움도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문익환 목사님 10주기인데, 그분은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싸움을 싸우다 가신 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생전에는 그렇게 핍박하고 비난하던 여론이 죽은 다음에는 왜 그렇게 칭찬 일색으로 변했는지 참 세상이 요지경이군요. 죽은 다음에 통일의 사도니 뭐니 하면서 추켜세우면 뭐해요? 살아생전에 그렇게 애쓰며 고초를 당할 때 욕이나 하지 말 것이지. 물론 세상이 변했지요. 시대가 바뀌고 정권도 바뀌었으니까요.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산 사람에게 가혹하고 죽은 사람에게 관대한 성향이 있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그분은 통일을 위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대체로 먹고 사는 문제, 자식들 키우는 일에 매달려 삽니다.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싸움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지요. 물론 생존을 위한 싸움을 싸우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또 우리가 모두 통일을 위한 싸움에 목숨 걸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생애를 회고하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 나 자신만을 위한 소아적인 싸움을 싸우며 살았는지, 아니면 좀 더 대의적인 싸움을 싸웠는지 묻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가장 요청되는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싸워야 하는 싸움이지요. 기본적으로 그 선한 싸움의 기초 위에서 통일을 위한 싸움에 헌신하든 지역사회의 발전과 이웃돕기를 위한 싸움에 헌신하든 그렇게 우리 싸움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바람직하고 건강한 삶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또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합니다. 할 일을 다 했다는 거지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바울이 수많은 과제들을 남겨두고 떠나게 된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하는 것은 비록 남은 과제가 많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바울 개인의 생애를 보면 아무런 후회나 미련이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것은 마라톤 선수가 42.195km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뜻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의 사명은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다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또 믿음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믿음에 어긋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거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신념을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잖아요? 자신을 속이고 양심을 속이며 행동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과 또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바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특별한 능력과 성품을 가진 성인군자라서 그런 위대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렇게 절규했어요. 그런 바울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1)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님께 사로잡힌 후에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율법의 행위에 목을 맸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나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어야 하고, 나의 모든 죄악과 허물이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만 내가 그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를 얻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죽은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수행하셨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사심으로써 우리가 의롭다 인정되고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 바울이 발견한 진리였어요.

그러나 그렇게 이론적으로만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셔야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이고, 내 욕심과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고 그분에게 우리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릴 때 우리의 싸움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고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그분이 내게 무슨 초능력을 주셔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을 위해서 살다 보니까 내가 굶어도 상관없고 일이 잘 풀려서 좋은 일이 생겨도 교만하지 않고 모든 일에 자족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그렇게 살아온 대가가 무엇입니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우리 주님께서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다.’ 얼마나 감사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여러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사십니까? 이런 기대를 가지고 우리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리십니까? 바울이 하는 말을 보세요.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고 계시다가 그 날에 우리 머리에 씌워주실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달려갈 길을 다 달려야지요. 마라톤 선수가 힘들다고 20킬로만 뛰고 주저앉아서는 상을 받을 수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금보다 귀한 믿음 주셨으니 그 믿음 지키며 믿음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지요. 그러고 나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머리에 의의 면류관 씌워주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 믿음과 소망으로 말미암아 오늘도 흐트러지는 우리의 모습을 바로잡고 더욱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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