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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떠나는 자의 안타까움 (딤후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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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요?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 모든 짐승 중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사나워서 온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호랑이가 죽어서 겨우 가죽 한 조각으로밖에 남지 않는다는 게 참 허무하군요. 사람 역시 이름을 남기는 것이 큰 영예이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그것은 한 인간에 대한 평가와 칭송에 지나지 않습니다. 호랑이든 사람이든 죽음으로써 그 능력이나 또는 그 개인으로 대변되는 어떤 가치나 운동성도 함께 소멸해 버리기 때문에 그 뒤에 가죽이 남든 이름이 남든 그것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개체가 소멸하더라도 그 운동성이 지속될 수는 없을까요? 그래서 좀 다른 관점에서 무엇을 남겨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새끼를 키워 놓는다면 여전히 호랑이가 동물의 왕으로 군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르치는 스승은 죽어서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훌륭한 스승이 죽기 전에 반드시 남겨야 하는 것은 큰 가르침이나 위대한 업적보다도 훌륭한 제자입니다. 자신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제자를 남기는 것이 스승의 가장 큰 임무입니다. 자신을 능가하는 제자를 길러내야 학문이든 사상이든 발전이 있지 않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제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은 스승은 실패한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지도자는 무엇을 남겨야 하겠습니까? 뛰어난 지도자들이 필생에 추진하던 개혁이나 사업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거나 밀려나는 수가 많습니다. 따라서 지도자라면 죽기 전에 혹은 떠나기 전에 반드시 남겨야 할 것이 자신의 비전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되겠지요.

바로 이러한 개념을 머릿속에 두고 오늘 이 본문을 읽는다면 훨씬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잘 알고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사는 것도 좋고 죽는 것도 좋다, 내가 이 두 사이에 끼였는데, 육신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더 좋은 것이지만, 너희를 위해서는 육신에 거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했거든요(빌 1:23-24). 바울이 삶과 죽음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그의 삶이 편안하지 못했음을 시사합니다. 육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거나 혹은 중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군요. 그래서 차라리 고통을 떠나 주님께로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원하는 바입니다.

바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아쉬운 게 많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첫 번째 감정이 두려움이라면, 그 다음은 아쉬움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맞는 순간 ‘여한이 없다, 매우 만족한 삶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지내놓고 보면 모두 아쉬운 게 인생 아닙니까? 바울도 자신을 위해서는 오히려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이지만, 빌립보의 교인들이 믿음 안에서 더 성장하도록 붙잡아주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많은 사람들이 못내 아쉬워하는 것들이 뭡니까?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마저 끝내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딸을 시집보내지 못한 아버지는 그것이 마음에 걸려 차마 눈을 감지 못하겠다고 하지 않겠어요? 독립운동을 하다가 전투에서 죽게 된 군인은 자기 눈으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 자기가 살아남아서 더 싸우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안타깝고 아쉬울 것입니다.

바로 바울이 지금 그 심정인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는 이 땅에서 더 사는 것이 유익하다고 했던 것처럼,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태산 같고 복음을 전해야 할 지역이 끝없이 남아 있는데, 그 많은 일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무겁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소원이 있다면 온 천하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편만하게 증거되는 것이었겠지요.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아 평생을 바쳤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은 늙고 병든 몸으로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젊은 제자 디모데가 사역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에는 온갖 이단의 무리와 거짓 가르침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널리 전파되면서 한 사람의 사역자가 아쉬운 상황인데, 자신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애가 타는 상황입니까?

이제 죽음을 앞둔 바울이 복음 전하는 사역을 더 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그 일을 맡길 수 있다면 아쉬움이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바로 그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자신이 걸어왔던 그 길을 이어가라고 부탁하는 부분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바울의 유언인 셈이지요. 유언은 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대단히 심각한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내용은 그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비중이 큰 내용일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평생을 바쳐 복음을 전했던 일이야말로 유언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복음 전하는 일은 바울의 개인적인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즈니스란 말이지요. 그 하나님의 비즈니스를 맡아서 하다가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맡기고 떠나게 되었는데, 그걸 대충 부탁하고 떠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가볍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중히 명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늙은 사도의 열정과 충성스러운 마음이 묻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인간의 구원이라는 진리를 선포하느라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바다에 표류하기도 했고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살아왔던 삶의 원동력을 충성스러운 후계자 디모데에게 물려주려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교회의 지도자로서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을 불러 모으는 일입니다. 목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되는지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람이 구원받는 과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바울이 해 왔던 일, 그리고 앞으로 디모데가 필생의 사역으로 해야 할 일이 바로 이처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디모데에게 남기는 이 바울의 부탁을 남의 얘기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디모데의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바울의 후계자로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령하셨는데, 그것은 땅 끝까지 가서 주님을 증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을 복음의 전파를 통해 구원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명령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엄숙하고 심각한 바울의 유언을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을 전하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대충대충 해도 되는 일이 아니에요. 그 일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일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그러지요?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때를 잘못 맞춘 일입니다. 요즘 뉴질랜드 같으면 주택경기가 활발하기 때문에 집을 팔기 좋은 때입니다. 때를 못 맞추면 몇 년 지나도 집이 팔리지 않는 수가 있잖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7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경제적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많은 사람들은 교회로 모여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같은 대규모 집회도 있었지요. 그러니까 그런 경우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때를 얻었다고 해도 좋겠지요.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에 전혀 관심도 없던 사람이 인생에 중요한 문제나 전환점을 만나 마음의 문을 열게 되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좋은 때가 되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그렇게 때를 얻었을 때만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얻지 못했을 때도 똑같이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바울 자신이 그렇게 했잖아요? 아테네 같은 곳에는 거리마다 우상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철학에만 관심이 많아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그 스토아 철학자들과 변론하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빌립보에 갔다가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 체포결사대까지 조직해서 바울의 전도활동을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어디를 가서도 바울이 때를 얻어서 복음을 쉽게 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시도 쉬지 않고 늘 복음을 전했던 것이 바울의 생애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을 위한 좋은 때를 얻은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큰 교회, 능력 있고 인기 많은 목사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교회도 있지만, 있던 사람들마저 떠나고 목회자를 모시지도 못하게 된 농촌교회들, 이웃의 큰 교회에 있던 교인들까지 뺏기고 일꾼이 없어 모두가 힘들어하는 작은 개척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큰 교회, 인기 많은 교회는 때를 얻었으니까 열심히 말씀을 전파해야겠지요. 사람들이 떠나는 농촌교회, 교인들을 빼앗긴 개척교회는 때를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늘 힘써야 합니까? 그것은 사람이 많아서 형성되는 세력에 의해서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상에 의해서 평가되는 일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평가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는 시대상황은 매우 좋지 못한 때입니다. 어떤 때가 이를 것이라고 합니까?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 것입니다. 기독교문화가 천년 이상 표준으로 받아들여지던 서구사회에서 오늘날 기독교는 완전히 때를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더니즘을 지나면서 기독교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의 결재를 받아야 하고 과학의 검증을 거쳐야 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세계에서는 그 이빨 빠진 호랑이를 토끼, 다람쥐, 두더지 등과 한 울타리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말하자면 힘없는 호랑이나 두더지나 똑같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바른 교훈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세대이지 않습니까?

또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는 때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얘기,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얘기만 좋아해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둡니다. 책망하고 바로잡아주는 스승은 인기가 없어요. 잘한다고 부추기고 축복을 남발하는 스승들은 인기가 많지요.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아닌가요? 또 허탄한 이야기에 쉽게 미혹되어 진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단들이 말하는 내용들은 정말 허탄한 것들입니다. 진리를 왜곡하고 인간을 속이는 말장난에다 심지어는 도덕적 파산 상태까지 나아가는 정말 허탄한 것들이에요.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 거기에 미혹되어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유언을 남긴다면 얼마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호소를 하게 될까요? 그런데 그 호소는 바울만의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신 우리 주님의 호소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말씀을 대하면서 그저 기록된 문자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피를 토하는 사도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애타게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세와 같은 세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표준이 되고 그래서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멀리하고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이 세상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로 사람을 감동시키지는 못해도 우리 행실의 열매로 믿음의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증거하는 주님의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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