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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섭섭함을 이기세요 (딤후 04: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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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마음이 맞고 또 우호적인 사람들만 만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싸울 일도 없고 마음 상하거나 괴로워할 일도 없을 테니까요. 물론 자기가 잘못해서 적을 많이 만드는 사람도 있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사람에게는 악하게 대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요. 그러나 내가 착하고 친절하게 산다고 해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만족시키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지요.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 살다 보면 우리를 적극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아니지만 섭섭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나는 상대방에게 할 만큼 했는데, 상대방이 나에게 그만큼 안 해주면 섭섭하지요. 또 당연히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일을 하지 않을 때 섭섭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능력에 따른 역할을 수행해야 할 기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에게는 목사대로 기대되는 것이 있고, 교인들에게도 그 믿음의 분량에 따라 기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게 된다는 말이지요. 오늘은 바울을 심하게 괴롭혔던 사람과 바울을 섭섭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누구인지 우리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에서 자기에게 해를 많이 보인 사람이라고 기록할 정도라면 그 사람 때문에 상당한 고통을 당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전서에도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르다가 나중에 배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단에게 내어준 바 되어 징계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큰 병이나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알렉산더는 디모데전서의 알렉산더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알렉산더는 구리 장색입니다. 구리 장색이란 구리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은 장색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온 도시를 선동해서 대규모의 바울 타도 데모를 일으킨 사건이 나옵니다. 에베소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큰 신전이 있을 뿐 아니라 집집마다 크고 작은 아르테미스 신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데메드리오가 바로 은으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대규모의 신상 공장을 차려놓고 장사를 잘 하고 있었는데, 바울이 나타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사람들을 가르쳤단 말이죠. 그래서 사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데모를 안 할 수 있겠어요?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바울에게 해를 많이 입혔던 것도 똑같은 이유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비즈니스예요. 어떤 종교든 부수적으로 비즈니스 분야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는 종교에서 그 우상을 만들어 보급하는 일은 필수적이지 않습니까?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좋은 사업입니까?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의 부흥은 곧 자기 사업의 번창입니다. 반면에 종교의 쇠퇴는 사업이 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종교의 부흥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런 종교적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신앙심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즉 이들은 자기 사업을 위해 그 종교를 이용할 뿐입니다. 종교의 부흥을 위해 열성적으로 애를 쓰지만, 사실은 자기의 비즈니스를 위해 애를 쓰는 것뿐입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바울에게 해를 많이 입혔던 것도 자신의 신앙적 열정 때문이 아니라 자기 비즈니스가 망하게 되는 것 때문일 수 있겠지요.

이처럼 종교와 비즈니스가 결합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종교의 본질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교에 관련된 비즈니스가 당연히 필요하지요. 성경책 만드는 회사들이 다 문을 닫아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비즈니스를 한다고 모두가 다 종교적 열정보다 장삿속이 앞선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럴 위험과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기독교 출판사 몇 군데에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분들은 아예 예수를 믿지도 않는 사람부터 아주 유명한 목사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어요. 그러나 한결같이 그분들은 경영과 이윤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게 되더군요. 어차피 비즈니스가 자선사업이 아닌 이상 구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면 원래 가지고 있던 종교적 열정과 순수한 믿음이 비즈니스의 열정에 밀리게 됩니다. 물론 그분들이야 최고의 종교적 열정으로 포장되어 있지요. 그러나 구리 장색 알렉산더의 종교적 열정이 의심스러운 것처럼, 그분들의 열정도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단 종교적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예요. 특히 신앙생활 오래 한 분들, 중직을 맡은 분들에게서 주로 볼 수 있는 현상이지요. 예를 들어 교회를 개척해서 크게 성장시킨 목사님이 있다고 합시다. 당연히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과로를 하고 희생을 하면서 교회가 성장하도록 애를 썼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성공한 목회자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성공, 큰 교회 목사로서의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제가 저 자신에게 먼저 묻고 싶은 내용입니다. 과연 나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이 교회의 목사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지요.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며 성도들을 믿음으로 세우기 위한 부르심에 따르는 것이 목사의 존재 의미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교회의 목사로서 얻는 개인적인 유익이나 이익에 대한 동기가 부르심을 능가할 만큼 크다거나 어떤 중요한 영향을 미칠 만큼 큰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종교적 비즈니스맨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충성하는 어떤 분의 궁극적인 목표가 장로로 선출되고 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종교적 열정으로 가장된 비즈니스일 뿐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교회를 타락시키고 영적 어두움을 가져오는 큰 원인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 안에서 담보되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가치는 순수한 신앙입니다. 다른 어떤 동기가 섞이지 않은 순수함, 즉 자기 사업 때문에 큰 소리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리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진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순수한 믿음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장로가 되기 위해 헌금 많이 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해서 헌신하는 믿음이 교회를 살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종교적 비즈니스맨들이 누구였는가 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들은 여호와종교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생명이 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종교가 그들에게 돈이 되고 권력과 명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 종교를 고수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바울을 심히 대적하고 복음의 전파를 앞장서서 방해했던 알렉산더의 진짜 동기가 그의 돈벌이 때문일 수도 있었던 것처럼, 종교적 열정을 빙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신의 비밀스러운 사설왕국을 세우는 게임, 우선 당장은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철저히 깨뜨려지고 말 것입니다.

여기 보면 또 바울이 섭섭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 변명할 때, 즉 바울이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을 때 그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 바울을 버렸다고 했어요. 로마의 법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당당히 증언하고 바울의 입장을 지지해 줄 동역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그런 믿을 만한 동역자가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지요? 여기 나오는 누가나 디도 같은 사람들은 충분히 목숨을 걸고라도 바울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설 만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그 당시에는 로마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해야겠지요.

어쨌든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을 위해 변호하고 도움을 주려고 나선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로서는 몹시 섭섭한 일 아닙니까? 이것은 비단 바울 개인에게 섭섭한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믿음과 충성심이 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약한 형제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알렉산더에 대해서는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고 했던 반면에,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 주지 않았다고 섭섭해 하고 그런 마음을 계속 품는다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비록 섭섭하고 손해가 되더라도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 아닙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자기를 찌른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셨던 주님이셨잖아요? 스데반 역시 돌에 맞아 죽으면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위해 함께 복음을 변호하지 못한 형제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모습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연약한 형제들의 믿음이 자라고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사람이 있고 또 협조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힘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하는 말을 보세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충성과 결단 여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 보세요.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더 4:14). 에스더는 동족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왕을 만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에스더가 희생하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산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데로 말미암아 유다인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 부름받았으면서 헌신하기를 거부했던 에스더에게는 그에 해당하는 보응이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사람을 보고 넘어집니다. 만약 바울이 사람을 보았다면 얼마나 낙심하고 절망했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사람에게 기대하고 믿었다가 실망하고 믿음이 흔들리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사람은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용서하고 이해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비록 바울이 사형을 선고받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는 모든 순간을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고, 그의 희생과 노력으로 복음이 방방곡곡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살다가 죽어간 사도의 삶과 그 주변 인물들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야 할 것인지 많은 교훈과 큰 도전을 받게 됩니다. 주께서 부르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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