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린도교회의 X 파일 (고전 05:1-8)

첨부 1


인간이 두 사람 이상 모여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사이에 규범이라는 것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강제력을 가지고 사회의 규범 역할을 하지만, 타율적으로 강제되는 법만 가지고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인간에게는 도덕이라는 자율적인 규범이 있습니다. 물론 법과 도덕은 그 지향점이 동일하고 내용이 대체로 유사하지만, 그 방법론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에 도덕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불신과 무자비한 투쟁으로 가득차게 되고, 법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딱딱하고 살벌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도덕이 위협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도덕의 위기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덕이 위협을 받는 것은 시대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사실 어느 시대이건 도덕이 위협을 받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도덕에 역류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도덕이 위기를 맞을 때일수록 교회의 역할에 주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도덕의 최후의 보루처럼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교회 안에서 도덕이 붕괴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는데, 도덕적 우위를 상실한 교회는 이미 교회의 역할과 책임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가난하고 힘이 없어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도덕적 우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도 몇몇 교회들이 부도덕한 일로 세간에 회자되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교회 전체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취급을 당하고 또 기독교인 전체가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참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고린도교회 역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분노하면서 매우 단호하게 이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부도덕이란 음행인데, 이방인 중에도 없는 아주 악한 음행이었습니다. 교인 중에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성적으로 상당히 문란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과 다른 제도와 문화에 기인한 면이 작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최소한의 금도는 있었을 터인데,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아버지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은 교회 밖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아주 엽기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아버지의 아내는 어머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어머니가 죽었거나 또는 이혼을 한 후에 아버지가 다른 아내를 얻었을 수도 있고, 또는 동시에 여러 아내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됐든 아버지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은 인륜을 짓밟는 해괴한 짓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몇 차례 예가 있습니다.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를 범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야곱은 르우벤에게서 장자의 권리를 박탈합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장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쌍둥이이면서도 조금 늦게 나왔다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걸고라도 장자의 권리를 빼앗으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랬던 야곱은 마지막 죽어가는 침상에서 르우벤에게 축복하는 대신 저주를 내립니다.

아버지의 아내를 범했다는 것은 아버지를 능멸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짓밟은 것이지요. 아버지 다윗 왕에게서 왕위를 빼앗으려고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윗이 피난을 떠난 후 왕궁에 남아 있던 후궁들과 동침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자리에 내가 앉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목숨을 잃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다윗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아도니야는 군대장관 요압과 모의해서 자기 스스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자 다윗은 서둘러 솔로몬에게 왕위를 넘겨주지요. 결국 아도니야는 항복을 했고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살려줄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아비삭이라는 여자를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비삭은 다윗이 늙어서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게 되자 다윗을 침실에서 수종들도록 데려온 아리따운 아가씨였습니다. 인간 난로라고나 할까요? 다윗의 아내인 밧세바의 입장에서는 아비삭이 고맙기도 하지만 썩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을 거예요. 또 다윗이 죽고 나면 아비삭의 위치도 애매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왕자인 아도니야가 데려가겠다고 하니 냉큼 허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 말을 듣자 불같이 노를 발합니다. 그래서 살려주려고 했던 아도니야를 죽여버리지요. 아버지가 곁에 두던 여자를 아내로 삼겠다는 것은 밧세바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일입니다. 솔로몬으로서는 왕위가 위협받는 일이 되기도 하지요.

모세의 율법에도 이러한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고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은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본 바울은 이런 구약의 사건들이나 율법의 조항을 들어서 책망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런 얘기는 하지 않고 어떻게 이방인들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발생하느냐고 꾸짖습니다. 사실 이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도 없지요.

이 사건은 단지 일회적으로 일어나고 만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관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 계속된 행동을 나타내는 시제로 쓰였거든요. 그래서 더 죄질이 좋지 않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더 통탄할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교회가 그런 행위를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범죄행위가 발생하면 교회가 통한히 여기고 그 일 행한 사람에게 적절한 조치를 했어야 할 일인데, 고린도교회는 교회의 직무를 태만히 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교회에서 행해지는 징계를 권징이라고 하는데, 이 권징은 범죄한 사람과 교회 전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절차입니다. 고린도교회가 태만히 하고 있는 이 징계를 멀리 떨어져 있는 바울이 시행한다고 말하고 있지요?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이 사람을 교회에서 쫓아내지 않은 것을 책망합니다. 교회에서 시행하는 권징의 가장 중한 것이 출교, 즉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인데,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멸망하도록 또는 지옥에 가도록 사탄에게 넘겨주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는 말을 보세요. 그렇게 내어준 목적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단기적으로 육신이 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장기적인 면에서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인지 잘 이해가 안 되지요?

우선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사탄에게 잡아가라고 내준다기보다 교회 밖으로 내쫓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교회와 대조되는 사탄의 권세와 지배 아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신이 멸한다는 것은 아마도 질병이나 심지어는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그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마치 욥이 사탄의 농간에 의해 고난을 받은 것처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이 육신의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징계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장나고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사람이 결국은 구원받게 되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징계의 목적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중대한 범죄를 행한 사람에게 출교라는 중한 징계를 내려야 하는 이유는 또한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누룩을 예로 들어서 죄의 파급효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전염성이 강해서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넘어뜨립니다. 처음에 악한 죄를 보았을 때는 놀라고 멀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꾸 반복해서 보게 되면 감각이 무뎌지고 그것이 보통의 일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것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 참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던 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누룩 없는 빵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급하게 떠나야 했기 때문에 누룩을 넣어서 발효시킨 빵을 만들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되면 누룩 없는 빵을 만들어 먹으면서 그 명절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상징으로 이용해서 죄의 성격을 말합니다. 누룩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처럼 죄가 제거되지 않고 남아 있을 때 교회 전체를 더럽힌다는 의미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애굽이라는 옛 세계를 떠나면서 누룩이 없는 빵을 먹은 것을 가지고 바울은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이 교회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오면서 세상에 속했을 때 가지고 있던 더러운 죄악을 버리고 순전한 지체가 되어야 한다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이러한 죄악에 대해서 권징을 하지 않은 이유를 바울은 교만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 베드로, 아볼로 같은 위대한 사도와 선생들에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자기들은 믿음이 강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부도덕이 교회 안에 있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적은 누룩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경고하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크게 오해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고기를 자신의 신앙에 따라 먹을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을 자유도 있다고 했는데, 고린도 교인들은 음행을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들처럼 신앙이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음행조차도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커버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우상의 제물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우상이라는 것이 실체가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거리끼거나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한다면 먹지 않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음행은 명백히 실체가 있는 범죄거든요.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마음속의 음욕까지 간음으로 규정하실 만큼 철저하게 금하신 범죄입니다. 자신이 유능하고 믿음이 좋다는 교만은 이처럼 자신의 죄악까지 합리화하는 이차적인 범죄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권징이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통일된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 교회에서 권징을 당하면 교회를 나가서 다른 교회에 가요. 그러면 그 교회에서 대환영을 하고 받아주거든요. 회개하고 새출발을 하겠다는데 안 받아주는 것은 좀 야박하게 생각되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까 권징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거예요. 이것은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일이지요. 또 권징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인간적인 관계 때문이기도 합니다. 남의 이목도 있고, 또 당사자의 반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과 이유 때문에 권징이 시행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권징이 교회와 당사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원리에 동의한다면 겸손 가운데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개인이건 조직이건 도덕이 무너지면 힘을 잃습니다. 최근에 소위 연예인 X 파일이라는 것이 유포되어 시끄러운데, 거기서 가장 문제가 되고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고 인기가 많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생활과 스캔들 같은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세상의 도덕이 무너지고 혼란에 빠질 때는 교회의 역할이 더 요구됩니다. 먼저 교회가 도덕성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일 때 우리가 세상을 일깨울 수 있고, 또 세상을 향해 구원의 메시지를 힘있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