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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법 권하는 사회 (고전 0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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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9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고린도전서보다 먼저 쓴 바울의 편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는 사실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첫 번째 편지는 전해 내려오지 않습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이 부주의해서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전쟁 때 불타버렸는지, 혹은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학자들이 아직도 찾아내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지요. 어쨌든 그 첫 번째 편지가 잘 보존되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린도전후서와 함께 고린도 1서, 2서, 3서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자, 그럼 첫 번째 편지가 없이 두 번째, 세 번째 편지만 성경에 포함되어 2천년 가량 내려왔는데, 오늘이라도 그 첫 번째 편지가 발견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경에 포함시켜야 할까요? 도대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누가 결정한 것일까요? 그리고 누가 거기에 새로운 책을 넣을 권위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 성경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던 예수님 이야기가 문서로 기록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4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저자가 이것을 기록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서두에서도 저자는 먼저 쓴 글(누가복음)에서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편지의 형식으로 남긴 문서들은 매우 중요한 교리와 가르침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서들을 한데 모아서 통일된 경전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논란과 검증의 과정을 통해서 신약성경의 경우 4세기 말에 이르러서 27권의 정경이 확정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유대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39권의 정경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예수님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이 퍼졌겠어요? 그 가운데는 잘못 전달된 것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구전들을 모아서 기록한다면 또 수많은 사람들이 기록을 했겠지요. 그 중에는 잘못된 내용을 포함한 것들도 있었을 거란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외에도 많은 유사한 문서가 있었기 때문에 참으로 진리를 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포함되어야 할 문서들을 골라내야 하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우리 성경에 포함된 책들을 정경이라 하고 포함되지 못한 것들 중 어떤 것은 외경이니 또는 가경이니 하는 이름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신약의 정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기준을 말하자면 우선 사도성입니다. 예수님이 책을 쓰셨다면 당연히 정경이 되겠지만, 애석하게도 예수님은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으셨거든요. 그렇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할 사명이 사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사도의 의무이며 동시에 사도가 갖는 권위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사도가 쓴 것은 예수님을 빼놓고는 가장 예수님의 가르침에 가깝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사도의 저작이거나 또는 마가나 누가처럼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의 저작이어야 정경으로 인정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내용이 중요하겠지요? 아무리 사도가 기록을 했어도 내용이 엉터리라면 정경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도가 엉터리 내용을 기록할 리가 없지만, 베드로복음이나 도마복음 같은 책들은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일단 내용에서 사실과 다르거나 복음의 진리에 합치하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나 도마가 엉터리로 그런 문서를 기록했다기보다 그것들이 가짜 문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또 한 가지 기준은 보편성입니다. 즉 모든 교회에서 전반적으로 그것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럴 만큼 그 문서가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의 절반은 받아들이고 절반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경으로 채택되기에 문제가 있겠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문서가 성령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저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말한 것처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기본적인 전제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렇게 해서 정경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즉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성경이 올바로 형성될 수 있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성경은 내 맘에 딱 드니까 좋아하고 어떤 책은 재미없고 지루하니까 별로 관심이 없고 하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요.

자, 그렇다면 바울이 써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가 이제 와서 발견되었다면 성경에 포함시켜야 할까요? 그것은 분명히 정경의 기준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즉시 정경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2천년 가까이 현재의 확정된 정경을 사용해 왔고, 또한 현재의 성경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가르치는 데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렵게 빛을 본 바울의 첫 번째 편지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취급될 수는 없겠지요. 처음에는 정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 문서로 사용되기도 하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 확인과 검증의 과정을 거친 다음 언젠가는 정경에 포함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바울은 지난 번 편지에 쓴 것을 다시 말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전에 말한 것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혹은 바울이 말한 것을 고린도교인들이 오해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 번 설명하면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난 번 편지에서 말한 것은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이것을 교회 밖의 비도덕적인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마도 바울에게 다시 질문을 했거나 또는 불평을 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분명하게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밖의 비도덕적인 사람들과 완전히 관계를 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교회 밖의 모든 사람들을 비도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많은 비도덕적인 일들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민과 갈등이 작지 않습니다. 현진건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이 세상을 술 권하는 사회라고 했거니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불법을 권하는 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직장생활을 하거나 특히 사업을 하다 보면 사회 구조가 불법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 비정상적인 사회지요. 그래서 모두가 불법을 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우리가 그런 불법으로 가득한 세상을 떠나서 우리끼리 정직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어 산다면 참 좋겠지요? 그러면 굳이 뇌물을 주고받을 일도 없고 부정을 저지르지 않아도 좋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해법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비도덕적인 세상을 등지고 떠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중세의 수도원 운동은 기독교의 영성에 큰 공헌을 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 있으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중구조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셨고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우리는 불법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 남아서 살아야 하는데,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남들이 다 불법을 행한다고 나도 덩달아 함께 불법을 행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 되겠지요. 불법을 행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들다는 핑계는 또 무엇입니까? 소금의 짠 맛이 귀찮으니까 버리겠다는 거지요? 남들이 다 불법을 행해도 그리스도인이 정직하게 행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짠 맛을 가진 소금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해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친하게 잘 지낸다면서 같이 어울리고 함께 정직하지 못한 삶을 나누고 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증거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 토색하는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사귀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해요. 그러나 그들과 사귄다고 해서 그들과 똑같이 하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로운 삶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았으면서도 부도덕한 옛 삶의 쾌락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도덕한 행위들이 교회 안에서까지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을 보고 바울은 교회 밖의 부도덕한 사람들을 사귀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교회 안에서까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당장 교회 밖으로 쫓아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빛이 발산되어 어두운 세상을 비춰야 할 터인데, 반대로 세상의 어두움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교회를 어둠에 잠기게 하는 것이 고린도교회의 실상이었습니다. 교회 안의 음행하는 자들을 내쫓아야 하는 것은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순결함과 거룩함을 지키고 있어야만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외인들, 즉 세상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이 불법을 행하든 말든 상관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도덕적인 삶으로 세상의 부도덕한 사회구조에 항거해야 하고, 세상의 불법을 그치게 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교회 안의 부도덕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책망하기 위한 것이지요. 사실 세상의 비도덕적인 사람들을 우리가 잡아다가 벌을 주거나 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을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교회 안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당연히 제재를 가하고 내쫓아서 교회를 깨끗하게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지요.

오늘도 우리는 불법을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우리도 불법을 행해도 된다는 핑계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불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 노릇을 하고, 세상에 대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이 비도덕적인 세상 속에 살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불법을 행하고 비도덕적인 사람들과 사귀며 사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불법과는 결코 사귀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들이 여러분의 양심과 사귀도록 하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도덕을 사모하도록 하십시오. 그들과 같이 한통속이 되어 놀아서는 결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그리스도께로 데려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양심에 따라 살다가 손해를 보았다면 하나님께 청구하십시오. 여러분이 불법 행하기를 거부해서 불이익을 당했다면 하나님이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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