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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빌 0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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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대 김영길 총장과 오성연 부총장이 52일 동안 구치소 생활을 했습니다. 두 분이 구치소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김영길 총장이 구치소에 들어간 첫날, 32명의 죄수들이 비좁게 들어가 있는 작은 방에 배정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벽에 얼굴을 대고 무릎을 꿇고 ‘신고식’을 했답니다. 그리고 32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좁아서 제대로 못 눕고 칼 잠을 자면서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여기에 왜 왔나? 그동안 한동대를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결과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
본인도 상상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김영길 총장의 마음을 지배했다고 합니다.

그러는 중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는 성경 본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7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김영길 총장은 이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수갑이 채워지고 포승줄에 묶여 경주 교도소에서 대구 교도소로 죄인처럼 이송될 때도 이 말씀을 생각했고, 독방에 갇혀서 정좌를 하고 있을 때도 이 말씀을 계속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저는 참 부끄러웠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와서 그런 고생을 하셨는데, 제 지나간 과거의 삶을 보니 정말 저는 예수님을 위해 고생한 것이 없었습니다. 부끄럽게 살아왔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김영길 총장에게 들으면서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난 예수를 믿는 목사인데 구치소에 한 번 안 가보고, 예수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보지도 않고 이 말씀을 해석하려 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후로 이 빌립보서 2장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했고 다시 씹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모델이신 예수

이 말씀 속에서 다섯 가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저는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삶의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삶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고방식, 예수님의 생활 양식, 태도, 관점, 사상, 철학, 이 모든 것이 한 마디로 용해되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5절 말씀은 ‘너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판단하고 해석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습니다. 해석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 고통을 겪고 혼돈을 경험합니다. 어떤 때는 갈등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관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기준을 가졌기 때문에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때아닌 보수와 진보의 논쟁으로 사회 전체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갑자기 생긴 것은 이념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념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다 보니 극단적인 이념주의자들이 자기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자꾸 복잡해지는 겁니다.

요즘 우리는 정치에 대해서 난맥상과 몰염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왜 이렇게 됐는지 생각해보니 ‘대권’이라는 권력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대권으로 해석합니다. 곧 선거가 있기 때문에 누가 권력을 잡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가치가 본질의 옳고 그름에 있지 않고, 누가 대권을 잡느냐 못잡느냐에 있습니다. 그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기 때문에 이렇게 양극화 현상과 극도의 혼돈이 생겼습니다. 정의나 옳고 그름이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사물을 돈의 가치와 관점으로 생각합니다. 이익이 생기느냐 생기지 않느냐가 판단 기준입니다. 이익이 생기면 일을 하고, 이익이 생기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돈이 중요합니다. 수험생들은 진학이 중요합니다. 좋은 학교로 진학하느냐 하지 못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사람은 결혼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어떤 관점을 갖느냐, 어떤 기준을 갖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관점으로 사물을 봅니까? 어떤 관점에서 가정과 자녀들의 교육, 직업, 미래를 생각합니까? 이 관점이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얘기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인간인가 하나님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관점, 마음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한 해석이 6절과 7절에 나타납니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두 번째 주제가 나타나 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관점, 복음이라고 하는 관점으로 역사를 보고, 통일을 보고, 민족의 비전을 봐야 합니다. 관점이 틀리면 모든 것이 다 틀려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6절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그는 근본 하나님이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 본질, 그 본체가 하나님이셨다’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처럼 훌륭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만 하나님이 아니라 세세 무궁토록 하나님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그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분이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초자연적인 사건은 우리가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죽음, 부활, 기적, 물위를 걸으신 것, 기적을 베풀었던 것, 죽었다 살아난 것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인데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반대로 그 분이 만약 위대한 성자, 인간이라면 그 분에게 일어났던 초자연적인 사건은 다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분의 본질, 본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 1:3),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5),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요, 본질이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이지만 하나님 되기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신 하나님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됨을 포기하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세 번째 묵상이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6절에서 우리는 한 번 놀랍니다. 우리는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왔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믿기가 어렵습니다. ‘예수가 인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본질, 본체가 하나님인 것을 믿으려면 우리 이성이 거부합니다. 역사주의자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기 시작하면 충격을 받습니다.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크게 충격을 받는 말씀은 7절입니다. 그가 하나님 되기를 포기하고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본래 하나님이셨는데 스스로 자기를 비워서 하나님 되기를 포기하고 인간이 되신 것’ 이것이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 마음의 실체는 ‘자신이 하나님 되기를 포기하고 인간이 되시는 하나님의 겸손, 낮아지는 태도’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자식 앞에서 부모는 자존심과 체면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다 포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존심, 권위, 위치, 신성의 모든 영광을 다 포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겸손’이라고 합니다. 겸손은 자기 포기입니다. 자기 신분, 위치, 소유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아무리 겸손한 척 해도 포기가 없으면 겸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손해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난을 겪고, 분한 일, 원통한 일을 겪지 않았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고난입니다. 사랑은 자기 포기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 모든 영광을 버리고 자기를 비워 인간이 되고, 종이 되고, 낮아져서 말구유에까지 오셨던 사고방식, 가치체계, 태도, 이것을 가리켜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5절을 읽으면 얼핏 굉장히 멋진 구절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깊숙히 들어가 보면 굉장히 고통스러운 말입니다. 포기해야 하고 낮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비었다’ 라는 말은 컵의 물을 다 쏟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 소유, 특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고, 버리지 않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는 것 하나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포기 없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것을 다 주장하면서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부싸움의 본질은 포기하지 않은 채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문제의 갈등도 거기에 있습니다. 내 것, 내 소유, 명예를 다 지키면서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에 갈등이 있습니다.
포기가 없으면 사랑은 실체가 없습니다. 언어는 있는데 실체가 없습니다. 겸손이라는 언어는 있는데 실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희생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자신의 직업을 옮겨보고, 집도 팔아보는 자기 희생, 자기 몸을 찢는 아픔을 경험해 봤습니까? 억울한 누명을 쓴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없으면 사랑의 실천이 없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주고,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사랑이 생기지 않습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7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통치, 다스림, 하나님 되심의 모든 것들을 다 쏟아 버리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변신은 두 가지입니다. 종으로의 변신과 인간으로의 변신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많은 사람이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난 다음에 주님께 봉사합니다. 자기 것을 희생하면서 봉사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내 뿌리를 흔드는 그런 희생과 헌신을 해 봤습니까? 그것 없이 헌신과 희생과 사랑을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에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었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그 분이 우리를 섬겼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그 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가 찾아가야 할 그 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자기 낮춤, 복종의 증거 ‘십자가’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7절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예수님 마음의 실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 마음의 두 번째 실체는 8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마음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은 포기를 선택하셨고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는 순간까지 다른 사람을 훈계하거나, 정죄하거나 비판하거나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을 야단치셨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분하고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니 분하고 억울하다고 소리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사기를 당하셨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남편에게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까?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대가를 치러야 남편이, 아내가 변합니다. 그냥 놔 두면 우리 민족은 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대가를 치러야합니다. 위대한 대가를 치러야 나라가 변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영웅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초라한 죽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살고,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영적 태도를 가리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합니다.


천국을 바라보십시오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복을 주십니까? 9절부터 11절을 보면 마지막 묵상의 주제가 나타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자신의 특권과 권리와 소유를 다 포기하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세 가지 선물을 주십니다. 첫째, 그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십니다. 둘째는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셋째는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십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까닭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적기 때문입니다. 상급, 보상, 땅에서 삶이 외로운 것은 천국에 대한 그리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천국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세상 일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한 묵상, 영광의 면류관에 대한 묵상이 희미해졌을 때 세상은 각박해집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날마다 천국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차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의 면류관, 그 상급에 대한 환희로 가득차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참고,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날 속상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내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사람을 만나도 보통 때처럼 대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환상, 상급에 대한 기쁨 때문에 그렇습니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용서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한계는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끔 ‘얼마나 순종해야 합니까? 어디까지 순종해야 합니까? 이만큼 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라’고 대답하십니다. 순종은 죽기까지 해야 합니다. 용서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순종에도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포기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인간이 되셨던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예수님 마음의 실체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김영길 장로가 구치소에서 느꼈던 ‘자기의 삶이 참 부끄러웠다’ 하는 것을 동일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도대체 한 것이 뭐가 있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목사가 되어서 이렇게 온누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내가 받은 고난이 무엇이 있나?’ 별로 없었습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 내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고 내가 무엇을 얼마나 포기했나?’ 포기 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누리는 것이 오히려 많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 바이블넷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3-07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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