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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관용하라 (빌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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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연못에는 개구리와 물방개와 소금쟁이, 그리고 물매암이와 우렁이들이 어울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연못의 우두머리인 개구리가 며칠 연못을 비우면서 물방개한테 관리를 맡겼습니다. 물방개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늘 말썽을 피우는 소금쟁이를 해치워 버렸습니다. 한동안 조용한 듯 싶던 연못에 이번에는 물매암이 나서서 설치는 것입니다. 물방개는 연못의 평화를 위해 물매암이도 없애 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렁이가 나서서 술주정을 부렸습니다. '저런 등신같은 놈이!' 물방개는 우렁이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연못은 고요하기만 하였습니다. 얼마 후, 밖에서 돌아온 개구리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토록 활기차던 연못이 죽음의 늪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개구리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자 물방개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연못의 평화를 위해 말썽부리는 녀석들을 없애버렸습니다.' 개구리가 크게 한탄하였습니다. '미운 말썽꾸러기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공동체의 운명인 것이다. 마음에 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없애다보면 함께 없어지고 마는 거야. 완전치는 못해도 서로 마음을 맞추어서 살아야지.'
만일 사람들이 관용이 없이 상대방을 비판하고 욕하고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것입니다.(갈5:15)
세상이 얼마나 악합니까? 세상이 얼마나 더럽습니까? 세상이 얼마나 모순이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는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며 밝고 건강하게 그리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문제가 생겨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길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특별히 관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앗시시의 성 프랜시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가장 근접했던 사람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와 관련된 감동적인 이야기들도 많아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고개가 수그러지게 합니다. 프랜시스와 그의 제자들은 산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년이 혼자 남아 집을 지키는데 악명 높은 산적 셋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방문 목적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도적은 도적질하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은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용기를 다하여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남들은 땀 흘려 일하는데 너희들은 남의 것을 훔쳐먹으려는 것이냐!” 도적들은 마음이 찔렸는지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선생님이 돌아오시자 이 소년은 자랑스러운 듯이 있었던 일을 고했는데 프랜시스가 섭섭한 투로 말했습니다. “그건 네가 실수했다. 지금 곧 도적들에게 가서 이 빵과 포도즙을 주고 오너라.”소년은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들을 바로 쫓아가서 빵과 포도즙이 든 선물을 전달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먹지 않고 소년을 따라 수도원으로 왔으며, 회개하고 프랜시스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성도가 관대함을 보일 때 이러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람들과 어우러져 그 틈바구니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향해서 내가 얼마만큼 관용했는지 반성해 보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은 좁은 땅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참 조급합니다. 마음도 좁아서 어떤 면에서는 용서를 잘 못합니다. 유머감각도 너무 빈약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반세기 전만 해도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여유가 없어서 그렇겠지 하고 이해했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살만한데도 점점 더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로 변해가고 다른 사람들을 품지 못하는 좁은 가슴을 안고 사는 모습을 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한국인만이 갖고 있는 고질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얼마 전 전문적인 여론 조사기관에서 한국을 위시하여 동남아 지역에 있는 여러 나라 젊은이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묻는 설문조사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이들의 경우 71%에 해당하는 수가 제 1순위로 '성격'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격을 가장 원하는지 다시 질문하자 '너그러운 성격'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단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소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사람들이 너그럽지 못해서 답답하다는 감정의 표현임과 동시에 좀더 너그러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소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에 초나라의 장왕이 커다란 잔치를 베풀고 장수들을 초대했습니다. 장왕은 애첩을 거느리고 술좌석에 앉았는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장수 중에 장웅이란 젊은 장군이 왕의 애첩을 보고 그만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습니다. 밤늦게까지 춤과 노래가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주연장의 불이 모두 꺼지고 말았습니다. 주위가 깜깜해지자 이 젊은 장군은 술김에 용기가 나서 왕의 애첩에게 접근하여 와락 껴안았습니다. 그러자 놀란 애첩은 비명을 지르며 장웅 장수의 투구에 달린 금술을 잡아당겨 떼어 냈습니다. '나를 희롱한 자는 투구의 금술이 끊어져 있습니다.'
왕의 애첩을 감히 희롱한 장수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목 베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불켜는 일을 중지시키고 초대된 모든 장수들에게 투구에 달린 금술을 모두 떼어 왕에게 바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불이 켜진 후 장수들을 보니 모두 금술이 없어서 애첩을 희롱한 장본인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장왕이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사지에 빠졌습니다. 왕은 급히 피신하는데 부하장군들은 눈에 띄지 않고 적들이 뒤쫓아 올 때 유독 한 장군만이 충성스럽게 왕 곁에서 생명을 다해 임금을 보호하며 추적하는 적을 물리쳤습니다. 바로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장수는 수 년전 왕의 애첩을 껴안았던 중죄를 왕이 너그럽게 용서하였던 바로 장웅이란 그 장수였던 것입니다. 자신을 너그러이 용서해 준 왕의 은덕을 갚을 기회를 얻어 용감히 적과 싸운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관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은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당할 수 있는 모든 손해는 다 당하고 살았습니다. 법적으로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고, 자녀들이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살고 있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정처 없이 유랑생활을 해야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심지어 끌려가서 남모르게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자기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향해 적의를 품거나 분노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용서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태도를 관용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나와 마음이 잘 안 맞는 사람을 품는 그런 사치스러운 관용이 아니라, 나를 정말 괴롭히고 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사람을 품는 넓은 마음을 일컬어 관용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와 같은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라고 명령하십니다.(딛3:2) 따라서 우리가 이런 말씀 앞에서 얼마나 주눅이 드는지 모릅니다. 조금만 마음이 틀어져도 품지 못하는 형편에 나를 핍박하는 원수를 품어주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위해 축복을 해줄 만큼 넓은 가슴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 앞에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관용의 본질은 긍휼,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려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처지로 내려가서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 있을 때 관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예수님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관용의 극치는 십자가를 지실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나타났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너무나 끔찍한 고통과 씨름할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고 고함을 지르던 폭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저런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처럼 용서하고 품는 것이 관용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넓게 열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긍휼은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혼자 살려면 긍휼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어우러져 살려면, 서로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온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치유의 공간으로 우리의 마음을 넓게 확장하는 것이 긍휼이다.' 모든 사람을 품고 그들의 심신을 고쳐주는 공간, 이것이 바로 긍휼로 넓어진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 누구든지 관용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마음은 굉장히 이해타산에 예민합니다. 우리에게 좌절을 안겨주고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을 쉽게 품지 못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어도, 아무리 목사가 되어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어도 나를 욕하고, 나에게 고통을 주고, 나를 좌절시키는 사람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여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형제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내 속에서 일어난다면 그 때는 관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긍휼이 여기는 것은 큰복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내가 남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법대로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떤 수필가는 이 관용을 일컬어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자기 안에 자기와 다른 사람을 품는 것이다.' 관용이란 자기와 다른 사람을 품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와 다른 것,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한 애정이 바로 관용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르지만 받아주는 것, 틀리지만 품어주는 것, 잘 맞지 않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아 주는 것, 이것이 관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용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울릴 수 있는 조건이라곤 없습니다. 오죽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편안하게 품어줄 만한 어떤 근거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머리에 하나님의 긍휼로 관을 만들어서 씌워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허물대로 갚지 않으시고, 법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관용입니다. (약3:17, 롬9:22) 그리고 이제 우리가 형제에게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너희 관용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숨은 자리에서 남을 포용하지 말고, 가정에서만 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정말 마음이 넓다. 정말 대단하다.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하고 감탄할 정도로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명작 ‘레미제라블’에는 두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장발장, 또 한 사람은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평생을 괴롭히는 형사 자베르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뒤 장발장을 추종하던 청년대원들은 눈엣가시 같던 형사 자베르를 잡아와 총살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그를 풀어줍니다. 충격을 받은 자베르는 장발장을 향해 외칩니다.
“ 당신이야말로 나를 가장 죽이고 싶을 텐데 왜 나를 살려줍니까?” 그러자 장발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세상에는 넓은 것이 많이 있소. 바다가 땅보다 더 넓고 하늘은 그보다 더 넓소. 그러나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이 바로 용서라는 관대한 마음이오.” 장발장의 말에 차갑고 냉혹한 자베르 형사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얼어붙은 골짜기는 봄바람만이 녹일 수 있습니다. 모질어진 가슴은 관대한 마음만이 녹여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사람들에게 관용하고 있습니까? 뜻이 잘 맞지 않는 자들을 얼마나 품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마음을 넓히고 있습니까? 심지어 해를 끼치는 자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면서 품어줍니까? 그렇게만 했더라면 우리의 삶이 훨씬 밝고 건강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문제에도 품어주지 못하고 서로가 갈등하면서 어두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진 않았는지 한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쉬운 것부터 그리스도의 관용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먼저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우리는 관용을 보이도록 합시다. 교회 환경은 잘못하면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상처를 입고도 오랜 시간 동안 서로 풀지 못한 채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게 됩니다. 서로 반목하고 용납하지 못하고 헐뜯는 일들이 교회 안에 비일비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는 '아버지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날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나를 품어달라고 기도하면서 실제로 교회 안에서는 형제들을 품고 용서하며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모순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통해 사랑하라는 말을 듣고, 설교를 통해 서로 용서하고 품어주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실제는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위선자를 가장 많이 양산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교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안고 있는 약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중생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약함이 있고, 부패한 인간의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갈등하면서 잘못하면 등을 돌릴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런 약점이 있음을 알고 서로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형제에게 완전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목사에게 완전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고 중생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긴 했지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약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 그것이 노출될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완전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또한 어떤 실수나 잘못을 범했다 할지라도 거기에 얽매여 형제를 보지 마십시오. 잠깐 그 잘못으로 인해 상처를 입을 수는 있지만, 거기에 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빨리 우리는 그 잘못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형제의 여러 가지 좋지 못한 것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돌려야 됩니다.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가지고 위험한 감정, 해로운 감정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거기에 얽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구하면서 노력만 하면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는 축복, 긍휼이 여길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증오를 극복하는 은혜를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서로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곳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소망을 가지고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교회가 체험해야 합니다.
이안 맥라렌으로 잘 알려져 있는 존 왓슨 목사가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했을 때 일입니다. 그는 원고 없이 설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메모만을 적은 종이 한 장을 들고 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말할 내용이 떠오르질 않아 여러 번 당황하게 되었고 그럴 때면 '여러분, 이 부분이 잘 생각나지 않는군요. 지난 토요일, 설교 준비를 할 때는 분명했었는데... 자,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초조해 하거나 짜증내는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주일예배가 끝났을 때였습니다. 바싹 마르고 나이가 꽤 든 어떤 교인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앞으로 설교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을 땐 우리에게 찬송가를 한 곡 지정해 주십시오. 목사님이 설교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저희들은 찬송을 부를게요. 저희 모두는 목사님을 사랑하고 목사님을 위해 기도한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왓슨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날, 내가 이렇게 목회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그 시골 교인들이 보여 주었던 자비심과 온정 때문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신자며 기독교인이었다.' 관용의 모습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교회답지 못한 면을 너무 많이 보여주어 사회로부터 관심 밖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번 틀어지면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한번 상처 주고 나면 두고두고 그것을 기억합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형제의 약함을 끌어안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까? 서로의 실수까지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까? 교회 안에서부터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관용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밖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말해 그 사람은 아직도 주님의 마음을 닮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담을 쌓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예배 마치고 나가서 자신을 드러내고 약함을 고백하면서 서로를 품는 아름다운 관계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또 자기 가족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살과 피를 나눈 혈육의 관계가 가족입니다. 따라서 가족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끝까지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가족 밖에 없습니다. 가족이야말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동안 좌절하지 않도록 항상 새 힘과 위로를 공급받으며, 마음에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일한 선물입니다. 가정에서 사랑하는 자녀들, 아내, 남편, 부모, 형제들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지, 아직도 마음에 담을 쌓고 있는 자가 있는지, 아직도 미워하고 있는 자가 있는지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말씀대로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남편에게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내 마음이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아내에게 보여주십시오. 자녀에게 보여주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가족들에게 그 넓은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그럴 때 우리가 살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만 관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관용해야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거짓되고 더럽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아픔과 손해의 대부분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 때문에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직접 간접적으로 받습니다. 정치를 잘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 왔습니까? 경영을 잘못하는 기업인 때문에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가족들과 얼마나 어려운 삶을 이어왔습니까? 환경 파괴를 제 마음대로 하면서 자기 뱃속만 챙기는 모리배 같은 인간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고 있습니까? 돈 없는 서민이야말로 죽든지 살든지, 집을 구하든지 못 구하든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동산 투기로 아파트나 토지 값을 천정부지로 솟구치게 만들어 자기 잇속만 챙깁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집 하나 얻으려면 평생 일해도 얻을 수 없도록 만들어놓은 장본인들이 누구입니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 모두 얼마나 해를 당하고 있습니까? 호화롭게 사치하면서 나랏돈이나 축 내고, 대신 국민들의 세금으로 메우려 하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음주운전으로 교통 사고를 일으켜 억울하게 평생 장애인으로서 슬픈 인생을 살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책임 없이 아이들을 낳고는 제대로 키우지 못해서 그들이 나중에 사회악의 주범이 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래서 피해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는 이상 우리는 그들을 향해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관용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열심히 전도해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세상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관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한 가지 비결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주께서 가까이 오시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하면 관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계1:7) 그 예수님께서 임하시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손해 주고 받던 모든 인간 관계가 다 떠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의 영광이 너무나 화려하고, 그 나라의 영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세상에서 받았던 모든 고통과 상처는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날만 바라보면 어떤 사람도 용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그 날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도 품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좁아질 때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하시던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 답답한 일이 일어납니까? 어떤 사람이 미워집니까? 그럴 때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하시던 주님을 기대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넓어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눈앞에 크게 보이는 일도 작은 일로 보일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세상 사람들 앞에 우리의 관용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일에 절대 실패하지 않는 멋진 인생 살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관용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주님 앞에 머리 숙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마음처럼 넓은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형제를 불쌍히 여김으로 누구든지 내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축복해주시옵소서. 교회 안에서도 서로 관용하게 하시고, 가정에서도 서로 관용하게 하시고, 이 악한 세상에 나가서도 관용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품기 위해 날마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재림의 소망을 날마다 확실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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