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각의 중요성 (빌 04:6-9)

첨부 1



생각의 중요성(빌 4:6-9)

아프리카의 란바레에네 지방의 토인은 아이가 출생하면 그 아버지가 술을 먹고 황홀한 기분이 되어 막 태어난 아이를 향해 신체의 일부분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아버지가 말한 그 신체의 일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맞게 될 때 죽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어느 음식이나 과일을 먹으면 죽게 된다고 개인에게 암시를 준다고 합니다. 한 토인이 바나나를 요리한 솥을 씻지 않고 다른 요리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 때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바나나를 요리했던 솥이라는 사실을 알자 새파랗게 질려 경련을 일으키면서 의식을 잃고 미처 손쓸 겨를도 없이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토인에게는 바나나가 금기 열매였던 것입니다.
또한 어느 서반아 왕은 예언자가 왕이 '마드리갈'에 이르면 죽게 되니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좋은 별궁이 있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촌락에서 병이 났습니다. 그는 부하에게 그 지방이 어딘지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부하는 그 곳이 '마드갈레'라고 하였습니다. '마드리갈'과 비슷하게 들려서 왕은 '마드리갈'로 알아듣고 며칠이 못되어 죽었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는 생각 여하에 따라 좌우될 때가 많습니다.
대구 지방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한 청년이 회사를 퇴근하면서 평소 좋아하던 미스 김을 불러내어 '오늘 저녁 데이트를 해야지'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청년과 미스 김은 만나서...
어디에서 멋진 데이트를 할까 생각하다가 팔공산으로 드라이브를 가자 생각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 생각대로 팔공산에 가서 데이트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청년이 너무 과속으로 차를 몰아 그만 큰 사고를 내어서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그 날 두 사람을 죽게 했을까요? 데이트를 하자는 생각. 팔공산에 가자는 생각. 신나게 달려 보자는 생각. 그 생각이 그 날..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성공과 실패.. 일상생활, 나아가 운명이라고 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생각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나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합니다. 존 템플턴은 “마음 속에서 일어난 생각은 그 속성상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하였습니다. 80-20법칙에 의하면 20%의 생각이 80%의 삶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은 우리의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합니다. 좋은 생각과 행동은 결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나쁜 생각과 행동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생각은 우리의 손과 발을,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눈으로 매일의 삶을 경이로운 삶을 만들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면서도 유쾌하고 희망찬 삶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는 지금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지 차분히 생각해볼 때입니다.
사람이 어떤 색의 안경을 끼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빨간색 안경을 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이고 검정색 안경을 끼면 삼라만상이 까맣게 보입니다. 우리의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 삶의 스타일과 가치관이 달리 표현됩니다. 그러기에 사고 그 자체보다도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잘못된 사고와 치우친 생각의 결과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까지 심각한 피해를 줍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사고의 틀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부정적 사고입니다. ‘아니다’로 일관하는 태도입니다. 실천해보지도 않고 일단 안될 것이라는 가설 속에서 제멋대로 판단하는 사고의 틀입니다.
박사과정을 위한 고급 수학시간이었습니다. 교수는 칠판에 문제를 적으며 연구원들에게 말했습니다.
“여기 이 문제는 많은 수학자들이 도전하였지만 풀지 못한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1시간만 이 문제와 씨름해보십시오.”
교수가 그 문제를 낸 것은 꼭 풀게 하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학습에 유익함을 주려는 생각에서 낸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5분 늦게 입실한 한 연구원이 아무 생각 없이 칠판에 제시된 문제를 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문제를 풀어냈습니다. 그 지각생이 풀 수 없다는 문제를 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풀 수 없는 문제’라는 교수의 설명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단순히 ‘해답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없는 것까지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그 길을 내었고 우리 또한 그 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둘째, 비관적 사고입니다. 이 사고는 밝고 희망찬 면보다는 어둡고 절망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같은 꽃을 바라보더라도 활짝 핀 꽃을 보고 감탄하기보다는 시든 꽃을 바라보고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 사고의 틀입니다.
좋은 것이 좋게 여겨지지 않고 감사 할 것이 감사함이 아니라 불평으로 짜증으로 지겨움과 싫음으로 내 생활 속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상황 때문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내 마음이 문제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부모탓이고 상대 때문이지 내 마음의 잘못은 아니라고 철저하게 믿습니다. 내 마음에 평화와 즐거움이 사라지고 주변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고 감미로운 음악도 귀에 거슬릴 뿐이라면 사는 것이 재미가 없고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뭔가를 놓치고 있거나 잘못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하루 하루를 겨우겨우 지탱하고 있으려니 사는 것이 얼마나 따분하고 지겹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만난 문제를 깊이 생각하길 귀찮아하고 해결책을 찾아보고 개선책을 마련하기보다는 대충대충 지나가려는 게으름의 병이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루도 새로운 날이 없이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똑같이 무감각과 무책임 속에서 살다보니 몸은 젊은데 마음은 이미 꿈을 잃고 늙어버린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좀더 잘해보자 좀더 달라져보자는 욕심을 가질 때 그 사람은 일이나 공부에 의욕이 생기게 되고 의욕을 가진 사람은 모든 일에 적극적입니다. 그 결과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고 현실에 편안하게 머물러 있기보다는 앞을 향해 가는 힘을 스스로 갖게 됩니다.
셋째, 독선적 사고입니다. ‘나는 언제나 옳고 너는 잘못됐다’는 교만과 아집, 독단에 빠진 사고의 틀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분노하고 화를 잘 냅니다. 웃시야 왕이 그랬습니다. 선지자의 권고에 화를 내고 분을 품었던 것입니다.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향단에 분향하려 했습니다. 분향하는 것은 기도와 같은 것으로 구약시대에서는 제사장의 책임이요, 특권이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제사장에게만 분향의 권리와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아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죄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우선시 합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성경을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교만해진 웃시야를 하나님은 치십니다. 그래서 웃시야는 이마에 문둥병이 들어 성전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쓸쓸하게 별궁에서 인생을 마쳐야 했던 웃시야는 교만한 자의 마지막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넷째, 편협한 사고입니다.
어떤 낚시꾼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낚시꾼은 오른손에 낚시대를 들고 왼손에는 25센티 짜리 자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낚시꾼은 고기를 잡을 때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자로 물고기 길이를 재보았습니다. 고기가 자의 길이보다 크면 버리고 작으면 그릇에 담았습니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왜 그러느냐 묻자 낚시꾼은 '우리 집 프라이팬은 지름이 25센티미터입니다. 프라이팬보다 더 큰 것은 볶아먹을 수 없어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낚시꾼이 들고 있던 자가 그의 사고를 25센티미터로 제한해 놓고 있었던 거죠. 무언가 대단한 아이디어, 획기적인 생각이 떠올랐을 때 '이건 내게 맞지 않아, 너무 커'라고 생각하는 소심증 때문에 크고 좋은 것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지는 않나요?
이것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모습입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바라보며 자기이익만을 집착하는 사고의 틀입니다. 잘못된 사고의 틀은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과 타인과의 관계가 잘못됩니다. 올바르고 참된 삶은 항상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며, 포용적이고 포괄적인 사고로 전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균형적 사고가 합리적 창조적 그리고 생산적 사고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한 문제는 그런 사고의 틀이 전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는 말입니다.‘우리’라는 공동체 의식과 공생 의식이 소멸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나와 너’의 존재가치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지금이 우리 사고의 틀을 전환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를 잃게 됩니다.‘나와의 다름’을 인정하는 사고의 틀을 간직한 사회가 진정 건전한 사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생각을 하며 삽니다. 생각은 행동을 만들며 행동은 습관을 형성하고 습관은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는 한 사람의 인생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 여기서 ‘심지가 견고한 자’는 하나님만을 굳게 붙잡고 의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든지, 마귀가 활동하는 운동장이 되든지 둘 중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지혜의 왕 솔로몬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한 것입니다. 생각이 운명을 바꿉니다.
첫째, 복된 생각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빌 4:6∼7). 기도와 간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십니다(슥 12:10). 교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마음, 불신자에게 전도하고 싶은 생각, 연보 드리고 계명 지키며 살고 싶은 생각은 하나님이 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에게 평안과 장래에 소망을 주려고 생각하시는 분입니다(렘 29:11).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싶은 생각은 마귀가 줍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준 자는 다름 아닌 마귀였습니다(요 13:2).
마귀는 욕심과 음란과 시기와 질투와 미워하는 생각을 주는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싶은 마음을 주는 사악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벧전 5:7∼8).
셋째, 사람은 생각을 바꿀 때 운명이 바뀝니다.
캐스렐리라는 처녀가 가수가 되기를 원했는데 불행히도 얼굴이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녀의 입은 크고 이는 뻐드렁니였습니다. 그녀는 뉴저지의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를 때 이 뻐드렁니를 감추려고 자꾸 윗입술을 오므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감추려해도 감춰지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한 사람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그 재질을 인정했습니다.
“아가씨! 나 좀 봐요. 난 당신이 노래하는 것을 주의해 보고 있었는데, 당신은 무엇인가 감추려는 것이 있어. 그 이가 창피한 모양인데…….”
그녀는 홍당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오히려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이가 어떻단 말이오. 뻐드렁니가 무슨 죄가 있나? 감추려고 하지 말아요. 당신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 청중들은 오히려 당신을 좋아할 거요.”
캐스렐리는 그 충고를 듣고 자기의 못생긴 이를 생각지 않고 늘 청중을 생각하면서 즐겁게 입을 벌려 노래했습니다. 그녀는 영화와 라디오의 톱스타가 되었고, 많은 희극배우들은 그녀를 모방하려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계발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왕하 5장 9∼14절에 보면“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10절).
아람나라 군대 장관은 한센병자로서 그 병을 고침 받고 싶어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다가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며 화를 내고 돌아섰습니다. 즉, 엘리사가 그의 종을 통해 병을 고치려거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한 말이 자기 생각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행원들이 병을 고치려면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간청하자 그때서야 자기가 국방장관이 아닌 문둥병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각을 바꾸어 선지자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때에 그의 살이 어린아이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생각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생각으로 바꿀 때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950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세계 역도 선수권 대회가 열렸습니다. 세계적인 관심은 러시아의 전설적인 역도 선수 바실리 알렉세에프가 당시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5백 파운드(약 270 kg)를 들어올리느냐에 쏠렸습니다. 그러나 알렉세에프는 세계인들을 실망시켰습니다. 그가 5백 파운드를 포기하고 4백 99파운드를 들어올렸기 때문입니다. 알렉세에프가 4백 99파운드를 택한 이유는 누구라도 5백 파운드는 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들어올린 역기의 무게를 다시 달아보니 501.5파운드였습니다. 이것이 발표되자 그 해에만 무려 여섯 명의 선수가 5백 파운드의 장벽을 뛰어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육체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다는 한계는 심리적인 것뿐이었습니다. 스포츠계의 또 하나의 유명한 신화는 100m달리기의 10초벽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은 1968년 미국의 짐 하인스가 깼습니다. 마라톤도 마찬가지입니다.
2003년 9월 케냐의 폴터갓이 기록을 깨기까지는 2시간 5분대의 벽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마라톤도 2시간대의 기록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있어서 심리적인 장벽은 매우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마음보다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믿고 인간의 심리적인 제한선을 뛰어넘어 능력 있는 성도들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나의 미래는 바뀌게 되어 있고 몸도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만나는 모든 일들이 모든 사람들이 새롭고 다릅니다. 잘못된 생각, 비뚤어진 생각이 나를 엉망으로 만들고 싸구려 인생으로 전락시키고 손해도 보게 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에 나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기쁨이 없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환경이나 내 주변의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한 부분이 고장을 일으켜 모든 것을 시들하고 재미없게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고치고 나의 생각을 고치면 사는 것이 달라지고 재미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게 되고 견딜 수 없는 고통마저도 견디게 되는 힘이 생깁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사람을 바꾸는 지름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생각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창조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남보다 앞서나가며 축복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은 히브리서 3:1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마16:23). 이것이 바로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사도바울은 7가지 좋은 것을 생각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1. 무엇에든지 참되며-참된 생각을 하라.
참되다는 것은 거짓되게 속이는 것이 없이 진실된 것을 말합니다. 아무 흠이 없고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생각과 행동을 가리킵니다. 성도는 선한 양심을 써서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엡4:25). 우리 성도들은 무엇에든지 참된 생각을 하여 소금과 빛의 사명을 바로 해야 합니다.

2. 무엇에든지 경건하며-경건한 생각을 하라.
경건하다는 말은 방종과 반대되는 말로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결하고 위엄 있는 삶을 말합니다(딤전4:8). 경건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신앙생활입니다. 약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무엇에든지 경건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3. 무엇에든지 옳으며-옳은 생각을 하라.
옳은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아야 합니다(약1:12).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인정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옳아야 합니다. 옳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생각을 옳게 해야 합니다. 생각이 옳지 못한데 행동이 옳게 나올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신앙과 가치관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보지 않고, 인정에 기울어지고 감정이나 기분에 움직이면 잘 못됩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 앞에 옳지 않는 생각과 행동은 성공할 수 없고 옳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십니다(이사야33:15-16).

4. 무엇에든지 정결하며-정결한 생각을 하라.
정결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깨끗함을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정숙한 것을 의미합니다. 더러워지지 않은 마음과 행동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순결하고 청결하며, 생각이 깨끗하고, 행동이 부정 없이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을 귀하게 쓰십니다.

5.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사랑할 만한 생각을 하라.
사랑을 주고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도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입니다. 사랑할 만한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마귀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6.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칭찬할 만한 것을 생각하라.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칭찬은 고상한 인격과 덕성으로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칭찬할만하며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도록 하고 사람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하면 모든 사람도 칭찬하게 됩니다. 칭찬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칭찬 받을 만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먼저 칭찬 받을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잠12:8, 잠31:30, 행6:3, 행10;2, 고전11:2). 롬14:17-18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7.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덕과 기림이 있는 생각하라.
덕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선행이나 봉사입니다. 기림은 도덕적으로 인정되어 칭찬 받는 것을 말합니다. 덕망 있는 사람, 인격이 훌륭한 사람은 덕 세우기를 먼저 생각합니다. 엡4:29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덕을 끼치는 사람은 어디가나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7가지 좋은 것을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은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이 있고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생각하고, 배운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성도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는 축복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 함께하는 사람은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습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 참으로 7가지 좋은 것만 생각합시다. 그대로 행하여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앞으로 남은 인생에 평강의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살피시는 하나님! 복된 생각으로 복된 삶을 살게 하소서. 하나님과 원수 되는 육신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영의 생각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