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행함이 있는 믿음 (약 02:14-26)

첨부 1


믿음과 삶의 관계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인구조사를 할 때 보면 ‘종교’를 쓰는 난이 있습니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각자 믿는 종교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라고 표시한 사람이 20억 가까이 됩니다. 그 20억 중에서 복음적이고 활동적인 그리스도인들은 10분의 1이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자기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표시하지만 교회에 다니지 않고 예배도 드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평생 3번 교회에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유아세례 받을 때, 결혼할 때, 장례를 치를 때 교회에 간다고 합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바로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믿음과 삶의 일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백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믿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 고백이 없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만 믿는다고 하는 분들은 ‘이기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고백을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손해를 보더라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과 삶이 일치하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 사도는 신앙고백과 삶이 일치 되지 않을 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이 삶으로 표현되지 못할 때 그 믿음은 유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 신앙은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신앙, 능력없는 신앙, 껍데기 뿐인 신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은 우리가 ‘인격자’ 또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노력은 하지만 어떻게 말과 행동이 정확히 일치할 수 있겠습니까? 노력은 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말과 행동을 고의적으로 다르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 다르고 겉 다른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우리는 ‘위선자’,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말은 청산유수입니다. 말로 하면 뭐든지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실해야 합니다. 능력은 없을지라도 세상 사람들 앞에서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말한 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긍휼한 마음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화가 15,16절에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지나가다가 만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늘 우리 곁에서 만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함께 순예배도 드리고, 예배도 드리는 형제 자매를 말합니다. 우리가 보는 사람들 중에 헐벗거나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은 동정합니다. ‘얼마나 힘드냐 가서 밥먹고 힘을 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말만하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면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어렵기도 하지만 자존심도 상한 사람에게 말만 하고 휙 돌아서면 그 사람들은 더 부끄럽고 더 속상합니다.

도울 때 지혜로와야 합니다. 말로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도와야 합니다.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내 형편도 어렵지만 네가 더 어려우니까 너부터 써라’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말만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방송을 통해 어려운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믿지 않는 사람도 돕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선한 양심을 가지면 하는 일을 믿음의 사람이 그정도도 하지 않으면서 ‘내가 믿노라’하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기도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가짜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든지 세상 사람들보다는 나아야 합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더 이기적이다’라는 말은 들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린 요즘 이런 말들을 듣습니다. 물론 우리를 헐뜯고 비난하기 위해 하는 말들도 있지만, 귀담아 들어야 할 것도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빙자해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도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잘못된 일 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생각할 것도 없이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고도 ‘내가 도왔다’라는 의식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 41-46절에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예수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사람은 긍휼히 여길줄 압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심판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저 사람 불쌍한데 누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 불쌍한 사람은 내가 도와주라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누군가 도와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움직인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긍휼이 없으면 무능한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자신도 변화시킬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기적이고 인색한 마음을 고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도 없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셨는데도 행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 삶을 변화시킵니다. 산을 옮기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죄와 유혹을 이깁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게 합니다. 믿음은 생명입니다.

세상 지식과 믿음의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지식은 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식과 행동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를 변화시킵니다. 나를 움직이고 새롭게 합니다.
문제는 자기의 믿음이 죽은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죽은 줄 알고 병든 줄 알면 고칠 가능성이라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믿음이 없는 줄 알고 겸손하게 회개하고 기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믿음은 가망이 없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자기 믿음이 병들지 않았나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1절에 사데 교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데 교회는 예전에는 굉장한 교회였습니다. 일곱 교회 중에 제일 먼저 이름을 가진 교회가 사데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옛 명성을 계속 갖고 있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여러분, 믿음의 행위가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혹자는 이 본문을 가지고 믿음이 먼저냐 행함이 먼저냐, 믿음이 중요한가 행함이 중요한가를 따집니다. 그렇게 해서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믿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가 하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맞섭니다.
믿음은 중요합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이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절대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려는 것은 우리를 몸과 영혼으로 분리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릅니다. 구분은 가능하지만 분리하기 시작하면 정상적이지 못합니다. 몸과 영혼은 분리되면 죽습니다. 행함과 믿음을 분리하면 이단이 되기 쉽습니다.
신앙에는 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와 도덕이 신앙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선함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치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18절에 이 논쟁이 나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입니다. 신앙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분리하고, 분석하면 안됩니다. 내가 말씀을 쪼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쪼개야 합니다. 말씀은 먹어야 하는 것이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씀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어떤 일을 행하든 상관없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21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멘’, ‘할렐루야’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을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생명력 ‘행함’
믿음만 강조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행함만 강조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행함만 강조하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교만하게 되고 판단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행함은 공로나 자랑이나 의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행한 것과 자기 의로 행한 것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한 것은 행하고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잘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의로 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고, 알리고 싶어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강조한 분이지만 그분만큼 하나님을 위해 수고한 분이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있었지만 누구보다 수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참된 행함이요 참된 믿음입니다.
행함은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나타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믿음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에서도 ‘믿음’을 강조해야 합니다. 가장 선하고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었더라도 그것은 믿음의 열매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은 오직 믿음 밖에 없습니다.
종종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 시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믿음 없는 행함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것은 절대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다툼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키고 시끄럽게 하고 상처를 주는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없는 행함은 누구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 2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다 할지라도 믿음없는 행함일 수 있습니다. 교만일 수 있습니다. 자기 의를 자랑했기 때문에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왜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야단을 맞았을까요?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함은 믿음없는 행함이었습니다. 행함 그 자체를 자랑했습니다. 행함이 자기 의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꾸짖으셨습니다.
믿음없는 행함은 율법주의입니다. 믿음없는 행함은 바리새주의입니다. 그것은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죽입니다. 19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서 온전히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귀신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 귀신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지식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겁낼줄도 압니다. 귀신도 이런 믿음은 있습니다. ‘귀신도 믿고 떤다’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문제는 회개입니다.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삶을 의탁하지 못하고, 삶을 맡기지 못하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위대한 순종’의 뿌리
20절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참된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이요 온전한 믿음입니다. 22절이 진짜 믿음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온전한 믿음은 행함과 함께 합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 믿고 순종하면 더 큰 믿음이 됩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 참된 믿음의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21-24절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말을 아브라함이 들었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그가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여서 각을 뜨고 태워서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일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서운 사람이기 때문에, 하면 한다는 불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증명된 것은 모리아산에서였습니다. 우리의 행함은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위대한 순종, 위대한 행동은 온전 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구원받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분이 내 죄를 사하여 주셨고,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구원 그 이후의 믿음은 행동과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또 한 예가 25절에 나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이 정탐꾼을 목숨을 걸고 숨겨준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먹이시고 어떻게 전쟁을 이끄셨는지를 들었습니다. 라합은 가나안의 신은 거짓이고 소망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들음에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라합은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숨겨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둘을 믿음의 예로 들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극단적인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라합은 창녀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이방여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믿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외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주일날 왔다갔다 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의식적으로 찬양하는 것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그에 따르는 행함을 보십니다.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되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면서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성령의 능력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