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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뜻에 민감하십시오 (약 0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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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의 교회
조금만 있으면 성탄절입니다. 그러나 거리를 다녀보면 성탄분위기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분위기를 내고 있습니다만 사람들이 그 분위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능점수가 예상보다 잘 나왔는데도 기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육이 위기라고 말합니다. 정치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더우기 경제위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이 위기가 누구책임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놓고 말들이 많습니다. 정치를 잘못해서 그렇다느니 경제를 잘못해서 그렇다느니 윤리의식이 없다느니 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는 교회의 책임입니다.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빛이 필요하고,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소금이 필요한데,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위기가 왔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도전을 주고 걱정을 해주어야 하는데, 도리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굵직한 사건 뒤에는 기도원, 목사, 교회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본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도하고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기 보다 우리의 욕심을 채우고, 세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세속화’입니다. 바로 이 세속화가 교회의 가장 큰 위기입니다.

교회는 세상 한가운데로 부름받았습니다.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속화에 대한 경계를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로마서 12장 1,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마음의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세상을 얻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쁨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생의 참된 의미와 기쁨이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고상한 말을 하고 우아하게 행동할지라도 저속한 것을 기뻐하면 그 사람은 고상한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무엇을 자랑하십니까? 오늘 13절에서 세상 사람들의 자랑을 볼 수 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주제와 관심입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무엇을 하든지,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삶을 헌신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이익만 생기면 무슨 일이든지 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은 거의 2천년 전입니다. 2백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동네를 많이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2천년 전이라면 보통은 그 마을에 태어났으면 그 마을에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전 세계에 3만7천여 종족이 있다고 합니다. 종족 구분의 기준은 방언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방언이 있었을까요? 왕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회학적으로 보면 방언이 많이 생긴 이유는 왕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옆 지방인데도 쓰는 말이 달랐습니다.

2천년 전에도 장사하는 사람들은 모험을 했습니다. 실크로드는 선교사가 개척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만든 길입니다. 중국에서 이스탄불까지 그 먼 거리를 장사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신 대륙을 발견한 사람, 세계를 넓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모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향료와 금과 돈을 위해 했습니다. 그들이 온 세계를 다닌 이유는 딱 한가지, 돈을 벌기위해서였습니다. 이런 모험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선교사들보다 먼저 오지에 들어갔습니다. 가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밀입국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며칠씩이나 배 바닥에서 어떻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어떨 때는 냉동칸에까지 들어가서 밀입국을 하려고 합니다. 체포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도, 돈을 위해서라면 이런 모험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세상 사람들에게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야고보는 분명 믿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는 ‘들으라’고 강조한 표현이 두 군데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해외로 나가서 근무하라고 하면 곧바로 떠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선교사로 가라고 하면 훈련도 받고, 기도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한 뒤에 떠난다고 합니다. 갤럽에서 미국의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행동양식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결론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윤리적인 견해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행동도 다르지 않습니다. 낙태, 이혼,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차이가 없다는 것이 그 조사의 결론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 뭐가 잘못입니까?” 그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이렇게 사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삶의 전부여서는 곤란합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이득을 얻고 돈을 버는 것만 바란다면 문제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성도를 향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경고의 메시지
성경은 심판의 때를 ‘노아의 때’, ‘롯의 때’에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전의 세상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노아의 때와 롯의 때의 공통된 것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얻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누가 어디에 가서 돈을 많이 벌었는지에 여러분의 초점이 맞춰져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이만큼 돈을 벌었다’라고 자랑하는 것은 ‘허탄한 자랑’입니다. 바닥을 기어도 하늘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닥을 기어도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 것에 매이지 않고,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보고 하늘을 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계획은 누구나 다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계획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계획합니다. 이것은 허탄하고 악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14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는 꿈도 꿀 수 있고 계획도 세울 수 있고 비전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없이 된 것이라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미래는 내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내일을 장담할 수 있습니까? 내일이 내 것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어제 새벽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두 시간 전에 통화를 한 동생이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는 한 성도의 전화였습니다. 내일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내일은 내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 뿐입니다. 오늘 하루를 충성하면서 미래를 계획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가 세운 계획은 이루어집니다.

죄에는 ‘자범죄’가 있고 ‘원죄’가 있습니다. ‘원죄’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말하기도 하지만, 신학적으로 말할 때 ‘원죄’는 ‘모든 죄의 원인이 되는 죄’를 말합니다. 그것 때문에 죄를 반복적으로 짓게 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원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회개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원죄는 ‘불신앙적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인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영원을 사는 비결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생을 마감하는 것도 내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날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잠언 27장 1절에서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함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은 두 가지 때문에 생깁니다. 하나는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심판에 대한 불안함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미래의 불확실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한함 때문에 늘 불안과 근심과 염려가 우리의 삶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적을 갖고 다니고 점을 칩니다. 사업을 계획하면서도 점을 칩니다. 점쟁이들이 얼마나 부흥했는지 아십니까? 1982년 공식통계에 의하면 무당들의 숫자가 3만명이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공식적인 집계가 67만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대한민국 군대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요새는 인터넷에서 부적을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도 부적을 팝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세태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점을 치고 부적을 통해 평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보험에 드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럴지라도 그 보험이 보장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일 허무한 것이 생명보험입니다. 생명보험에 들면 생명이 보장됩니까? 아닙니다. 진짜 보험을 하나님께 드십시오. 하나님께 자기의 미래를 맡기고 걸음을 맡긴 사람이 이 땅에서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을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7절에 “주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짧은 삶 속에서 우리의 삶이 영원한 삶, 가치있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주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으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노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이 가장 좋은 날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맡겨 놓으십시오. 오늘 이것 하다가 주님의 뜻을 따라 다른 것을 하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사십시오.

지혜롭게 계획을 세우십시오. 덧붙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 지혜로 계획을 세웠지만, 이 계획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더 좋은 것은 계획을 세우기 전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백지를 꺼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교회 일도, 집안 일도,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
바울은 전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계획을 고집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로마도 방문하고 고린도교회도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런 그가 왜 편지를 먼저 보냈을까요? 못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가겠지만 허락지 아니하실 수도 있으니 바울은 자기의 뜻을 먼저 편지로 전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목회했던 에베소교회를 떠나면서 ‘주께서 허락하시면 돌아오겠다’라고 말하고 떠났습니다. 아무리 좋은 계획, 선한 계획이라도 주님의 허락이 있을 때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고 축복이 됩니다.

하목사님이 돌아오십니다. 목사님이 오시면 어떤 말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1991년 안식년을 다녀오신 후 목사님은 ‘성령목회’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때 목회자들이 모여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성령목회가 무엇입니까?” “저도 모릅니다.” “그러면 계획은 어떻게 할까요?” “계획은 세우십시오.” “그러면 뭐가 달라진 것입니까?”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전에는 계획을 세워놓고 뜻대로 안되면 마음아파하고 힘들어 했지만, 이제는 성령님께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모든 것을 내어 드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도하는 목회가 아니라 성령님이 주도하는 목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계획에 없던 일도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면 계획된 일이라도 포기하는 것이 성령목회입니다. 정말 그렇게 목회를 해 오셨습니다.
여러분, ‘성령님께 민감한 삶’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과 친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과 십계명 등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모든 일상적인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좋은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똑같은 돈을 가지고 중국을 먼저 도와야 할지, 아프리카를 먼저 도와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과 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늘 무릎을 꿇고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께 말씀을 읽고 QT를 하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짐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게 하십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
16,17절입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계획대로라면 돈을 얼마를 벌 것이다’, ‘내 미래는 보장되었다’ 등은 다 허탄한 자랑입니다. 그렇게 될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이 잘 되면 헌금도 많이 하겠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지금 하십시오. 지금 있는 대로 하십시오. 지금 가진 것으로 헌신하지 않고 나중에 돈벌어서 헌금하고 헌신하겠다는 것도 허탄한 것입니다. 내가 소원한 것을 잃었을 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으면 잘 된 것입니다. 고난 때문에 신앙적인 깊이와 성숙이 있었다면, 겸손할 수 있었다면 잘 산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다 얻었지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가 깨어졌다면 그것은 잘 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전도하고, 성숙하고, 사랑했다면 올 한 해 잘 사신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도 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도 죄입니다. 미루는 것도 죄입니다. ‘전도집회는 매년 있으니까 내년에 하지 뭐’라고 미루는 것은 죄입니다. 오늘 전도해야 할 사람을 미뤘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살아계실 때 전도하지 않고 돌아가신 다음에 추도예배를 잘 드리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이라고 일컫는 그 날에 주님의 일을 하십시오. 오늘만이 나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그 날에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시오.

13절 말씀을 보면서 큰 도전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열심을 주님을 위한 열심으로 바꿀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일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위기를 맞아도 이길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일은 주의 뜻을 행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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