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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안식의 믿음 (히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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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와 비교하면서 모세 때 이스라엘 백성이 믿지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모세보다 탁월하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안식에 들어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 이 구절에서 안식은 무엇을 말합니까? 가나안 땅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안식)을 향해 애굽(세상)을 출발하고 홍해(세례)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향해 애굽을 떠난 사람 중에서 가나안 땅의 안식을 얻은 사람은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 중에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 기록자는 백성들의 불신 때문이라고 규정했습니다(3장 19절).

그러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나안은 과연 무엇일까요? 천국이 궁극적인 가나안이지만 살아있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것이 가나안일까요? 좋은 집일까요? 아니면 돈이 많은 편안한 삶일까요? 아니면 미국 시민권일까요? 우리에게 있어서 가나안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일 것입니다. 그 평안은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오직 약속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어집니다. 세상적인 축복과 돈은 '편안(便安)'은 줄 수 있어도 '평안(平安)'은 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가나안(천국과 안식)의 약속이 있어도 가나안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가나안을 소유하지 못합니까?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가나안 땅의 약속의 말씀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말씀이 어떤 분에게는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은 듣는 자가 그 약속의 말씀에 자신의 믿음을 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틀림없이 그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는 가나안(안식) 백성이 되어야지 믿는다고 출발했지만 믿지 않아 광야에서 헤매는 광야백성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의외로 광야에서 헤매는 교인들이 많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교인'과 '성도(혹은 신자)'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몸은 교회에 있는데 아직 애굽의 삶이 그대로 배여 있는 분이 있습니다. 애굽의 고기와 채소를 그리워하고, 아직 애굽 사람들의 가치관을 그대로 따릅니다. 결국 가나안을 취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는 광야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복음의 약속이 있어도 믿음을 더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그런 인생이 있다면 그 인생은 정말 불쌍한 광야 인생이 됩니다. 교회 리더의 사명이 무엇일까요?

'광야 교인'을 '안식을 누리는 안식의 교인'으로 이끄는 것이 교회 리더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리더가 오히려 교인을 광야 교인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어떤 체육관 집회에 갔더니 시종일관 '믿으니까 주셨습니다'는 얘기뿐이었습니다. 그런 얘기도 믿음을 격려하는 차원에서는 때로는 필요한 것이지만 너무 그런 식으로만 나가면 안 주셨을 때에는 박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 믿음으로 불평과 감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바로 광야 믿음입니다. 분명히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고, '믿습니까?'라고 하면 '아멘. '이라고 대답하지만 진정한 믿음이라기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신념인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믿는 사람들이 가진 믿음이 가나안(안식)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애굽의 눈에 보이는 찬란한 것을 얻기 위한 믿음이라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대한 믿음이 아닌 애굽 것을 추구하는 믿음을 불신으로 보시고, 믿음을 화합지 않은 것으로 여기시고 광야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출애굽기와 민수기가 말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그래서 판단력이 있는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 60여만 명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정말 참 안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애굽 것을 바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믿음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믿음은 믿음 같지만 광야에서 고생하게 하는 믿음이요, 어려운 일이 생기기만 하면 꼭 불평이 생기게 하는 세상적인 믿음입니다. 우리는 가끔 성경의 출애굽기, 민수기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없이 체험하고도 저렇게 불평만 할까?'

그러한 의문이 생기지만 우리도 안심하지 말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애굽 것을 바라면서 믿음 생활을 하면 수시로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애굽의 화려함과 축복에 집착하면 믿음이 주는 은총을 맛보기 힘듭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교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그래도 눈에 보이는 축복도 있어야 하잖아요. ' 물론 눈에 보이는 축복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순서의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눈에 보이는 축복이 앞서면 광야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것 때문에 불평하고. 그러한 삶이 반복되는 모습은 결코 가나안의 삶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이 앞서면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게 되고 예수 안에는 부요하심이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축복도 뒤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참 안식에 들어가면 그때에는 정말 우리들의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이 될 것입니다. 참 믿음으로 광야의 삶이 아닌 안식의 삶을 누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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